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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다” 모두가 포기했을 때 그는 주문을 외웠다

등록 2016-08-10 19:00수정 2016-08-10 22:09

펜싱 에페 금메달 박상영
십자인대 수술 받은 21살 대표팀 막내
남들이 “이제 끝” 할 때 이 악물고 도전
무릎부상 때문 8강전부터 다리 통증
결승전 10-14 매치포인트 몰렸을 때도
통증 참고 ‘발펜싱’ 이용 대역전극 일궈
박상영(왼쪽)이 10일 오전(한국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 3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펜싱 에페 남자개인 결승에서 헝가리의 게저 임레와 겨루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왼쪽)이 10일 오전(한국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 3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펜싱 에페 남자개인 결승에서 헝가리의 게저 임레와 겨루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21·한국체대)은 갑자기 다리를 움켜쥐었다. 방금 끝난 8강전에서 막스 하인처(스위스)를 15-4로 제압하고 무대를 내려오던 찰나였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일생일대의 올림픽 무대”. 그런데 준결승을 앞두고 근육경련(쥐)이 일어난 것이었다. 박상영은 펜싱 남자 에페 종목에서 가장 빠른 발놀림을 자랑한다. 키(178㎝)가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그에게 빠른 발을 이용한 찌르기는 최고의 무기로 통한다. 만약 발의 속도가 느려진다면…. 그때 불현듯 그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한마디가 있었다. “박상영은 이제 끝났잖아?”

시간을 거슬러 지난해 3월, 박상영은 왼쪽 무릎 십자인대 재건술을 받고 올해 초 복귀했다. 하지만 첫 대회 1차전부터 허무하게 졌다. 야박한 평가가 쏟아졌다. “박상영은 이제 끝”이라는 말도 그때 들었다. 주위의 부정적인 평가에 “자괴감이 들었다”는 박상영은 “난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다시 준결승전. 이를 악물었다. 경기에 집중하면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근육 경련 따위에 무너질 그가 아니었다. 박상영은 ‘발펜싱’(빠른 발을 이용해 높이를 극복하는 펜싱)을 유감없이 보여주며 베냐민 슈테펜(스위스)을 15-9로 꺾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니 그제야 애써 잊고 있던 아픔이 진하게 몰려왔다. 그래서 “욕심을 조금 내려놓았다.”(박상영)

하지만 박상영은 무대를 즐길 줄 아는 20대 초반의 ‘Z세대’였다. 10일(한국시각) 결승전이 열린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 3을 뒤덮은 관중들의 함성소리와 한국 응원단의 태극기를 보자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다시 생겨났다”. 경기 전 여유롭게 관객들을 향해 사방으로 검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펜싱을 하면서 관심이 집중된 무대에 서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슴이 쿵쾅쿵쾅, 용광로처럼 뜨거워졌다. ‘난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박상영은 거듭 자기 주문을 외웠다.

박상영이 10일 오전(한국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 3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펜싱 에페 남자개인 결승전에서 9-12로 지고 있던 2라운드가 끝난 휴식시간에 “할 수 있다”는 승리의 주문을 외우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이 10일 오전(한국시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바하 올림픽파크 카리오카 경기장 3에서 열린 2016 리우올림픽 펜싱 에페 남자개인 결승전에서 9-12로 지고 있던 2라운드가 끝난 휴식시간에 “할 수 있다”는 승리의 주문을 외우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함성이 잦아들고 조명도 어두워졌다. 결승 상대인 세계 3위 게저 임레(42·헝가리)와 박상영의 발소리, 검소리만이 허용된 시간. 아뿔싸, 순식간에 10-14 매치포인트에 몰렸다. 승부는 이미 기운 듯했다. 펜싱 3종목 중 에페는 유일하게 전신을 모두 공격할 수 있고 동시 타격 때 둘 다 점수를 인정한다. 조종형 펜싱 대표팀 총감독이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말한 이유다. 그러나 박상영은 내리 4점을 뽑아 동점을 만든 뒤 빠른 발을 이용한 기습적인 찌르기를 성공시키며 대역전극에 마침표를 찍었다.

박상영이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포효했다. 무대 중앙에서 조희제 남자 에페 코치와 뜨겁게 끌어안았고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도 돌았다. 경기장 밖에서 제일 먼저 무릎 상태를 확인한 그는 “여기까지 버텨준 무릎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며 “그동안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박상영의 빠른 발놀림을 버텨준 왼쪽 무릎이 결국 한국 펜싱 2회 연속, 한국 에페 사상 최초, 2016 리우올림픽 한국의 3번째 금메달을 만들어낸 것이다.

박상영은 과거 임레를 상대로 2번 모두 승리한 경험이 있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임레가 공격적으로 나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임레는 이를 역이용했다. 지키면서 받아쳤다. 그는 “상대가 나를 잘 분석하고 나와서 당황했다. 그러니 침착해지자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조희제 남자 에페 대표팀 코치는 10-14가 된 시점에서 작전시간을 불렀다. 그는 “14점을 뺏기고 나서도 진다는 생각은 둘 다 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딱 한 점을 내기 위해서 동시타격을 노릴 테니 방어 후 공격하는 방법을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조종형 총감독도 “하늘이 박상영한테 금메달을 주려고 하는 건지 평소와 다르게 임레가 박상영한테 먼저 달려들었다”고 했다. 박상영은 자신한테 덤벼드는 임레를 차분하게 피했고, 곧바로 득점으로 연결했다.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이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이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박상영은 진주제일중학교 1학년 때 펜싱에 입문했다. 체육 선생님의 권유가 계기였다. 어머니 최명선씨는 이를 극구 반대했다. 펜싱은 장비 구입에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다. 장비 한 세트당 200만원이 넘는다. 당시 박상영은 부모의 사업 실패로 친척집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펜싱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최씨는 아들의 펜싱에 대한 진심을 확인해보려 몰래 학교를 찾았는데 그때도 아들이 땀을 흘리며 훈련하고 있어 마음을 고쳐먹었다.

리우 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 선수에게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 선수가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부친이 편지로 아들을 응원하는 가운데 그의 모친 최명선씨는 두 달 전부터 전국 사찰을 돌며 아들을 위해 108배 참배를 했다. 연합뉴스
리우 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 선수에게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 선수가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부친이 편지로 아들을 응원하는 가운데 그의 모친 최명선씨는 두 달 전부터 전국 사찰을 돌며 아들을 위해 108배 참배를 했다. 연합뉴스
박상영은 그의 출중한 재능을 알아본 주변의 도움과 비영리재단의 지원으로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경남체육고등학교에 진학해 운동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선배들의 장비를 물려받지 않아도 됐고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며 최연소 국가대표가 됐다.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에게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금메달의 박상영에게 부친 박정섭씨가 선물한 '국가대표 심리학' 책과 격려를 담은 손편지를 박상영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그는 21살의 나이로 우승해 최근 116년간 이 종목 정상에 오른 선수 중 최연소 선수가 됐다. 세상에 나와 받은 가장 큰 칭찬이었다. 세계순위 21위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제 박상영은 14일부터 남자 에페 단체전에서 2번째 금메달을 노린다. 박상영의 본래 목표는 단체전 금메달이었다. 반전 서스펜스 스릴러 펜싱 영화 ‘상영’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리우데자네이루/권승록 기자 ro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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