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2월17일 밤 9시 나가노 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한국의 김동성 선수가 중국 리자쥔과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으나, 앞으로 힘차게 뻗은 앞발이 금메달을 만들어냈다. <한국방송> 화면 갈무리
[토요판] 내 가슴속 명승부
(6) 쇼트트랙, 나의 금메달
(6) 쇼트트랙, 나의 금메달
많은 분들이 저 김동성 하면 2002년 솔트레이크 겨울올림픽 ‘오노 사건’(미국의 안톤 오노 선수가 과장된 행동으로 심판에게 김동성 선수가 반칙했다고 항의하며 금메달을 땄던 사건)을 떠올리시는데요. 사실 전 그때 편파 판정으로 노메달에 그쳤고 저의 첫 금메달은 1998년 나가노 올림픽 때였습니다.
1997년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올림픽을 나가기 위한 국가대표선발전 출전 경기를 관람하시다가 제 아버지가 시합장에서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원래 지병이 좀 있었는데 그날 그렇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저는 아버님의 장례식을 치르지도 못한 채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네가 올림픽에 나가는 걸 원하실 거야. 어서 가서 남은 선발전 경기를 마쳐라”라는 한마디에 슬픔을 뒤로한 채 경기를 나섰습니다. 아버지가 저 때문에 돌아가신 것도 같고, 혼자 계신 어머니에게 메달을 바치면 큰 위로가 될 것 같았습니다.
확실한 목표가 생기면서 저는 혹독한 훈련을 스스로 감당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대학생 형들처럼 운동을 했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때 대학생 형들이 100㎏ 역기를 들면 저도 100㎏ 역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저는 대학생 형들과 실력을 겨루었을 때 밀리지 않을 수 있었고 올림픽 국가대표로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1997 국가대표선발전 출전경기
관람하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며 혹독한 훈련을 감당
당당히 국가대표로 뽑히다
무릎부상에도 무모하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운 따랐는지 준결승에 결승까지
꼴찌로 달리다 추월, 또 추월
결승점 리자쥔 뒤에서 발 내밀기!
“한명만 제치자, 또 한명만 제치자” 하다가… 그러나 1998년 2월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저는 무릎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릎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에 물이 차올라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무릎 부상이 있는지도 모르고 제가 운동을 해왔음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감독님께 출전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감독님께서 인원수만 채워달라고 부탁하셔서 출전을 결심했습니다. 또 올림픽 메달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무릎이 아팠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무릎에 (통증을 완화해주는) 테이프를 감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98년 당시 저는 팀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에이스는 채지훈 선수였습니다. 저는 뒤에서 1등의 자리를 꿈꾸는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무릎이 너무 아파서 1등을 하기보다는 그냥 뒤에서 따라가는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저를 견제하기보다는 그냥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올림픽에 출전하면 금메달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전 무릎 부상 탓에 메달권에 진입하기조차 부족한 몸 컨디션이었고, 모든 코칭스태프와 기자들도 저의 금메달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중국 선수들이 금·은메달을 모두 딸 거라 예상했지요. 운이 따랐습니다. 쇼트트랙은 한 종목당 네번의 경기(예선,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를 뛰어야 합니다. 예선과 준준결승을 치르는데 선수들이 자기들끼리 견제를 심하게 하다가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탈락해갔습니다. 저는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아 넘어지는 일 없이 (1000m 경기)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준결승에 가니 간절히 결승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부상 때문에 결승 경기가 제 마지막 올림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릎이 찢어져도 좋으니 일단 한번 해보자.’ 준결승 경기 출발선에 섰습니다. 중국 선수를 포함해 네명이 섰습니다. 저는 1등보다는 2등 전략을 세웠습니다. 2등만 해도 결승에 진출하니까요. 첫 바퀴부터 저는 네번째에 서서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앞쪽으로 치고 나가면 그 선수 뒤를 따라가려 했습니다. 역시 중국 선수가 앞으로 튀어나갔습니다. 저는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어 2등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결승 경기 출발선에 섰습니다. 미국, 캐나다, 중국, 그리고 저 네명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1등보다는 올림픽 메달만 따자는 생각이어서 ‘한명만 제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총 아홉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한바퀴를 9초대로 돌아야 할 만큼 빠른 스피드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동메달만 따자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네명 선수 중 네번째로 계속 달렸습니다. 여섯바퀴 돌 때쯤 제가 미국 선수 앞으로 나갔습니다. 세번째 위치에서 계속 미국 선수만 막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두바퀴가 남았습니다. 갑자기 ‘한번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메달보다는 은메달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한바퀴 남기고 제 앞의 캐나다 선수를 안쪽 코너 쪽으로 제치고 치고 나갔습니다. 이제 두번째 순서로 달리게 됐습니다. 마지막 한바퀴. 중국의 리자쥔 선수가 제 앞에 있었습니다. 리자쥔은 96년도부터 저랑 경합을 많이 벌였기에 그도 저를 잘 알고 저도 그를 잘 알았습니다. 왠지 인코스를 공략하면 저를 잘 막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웃코스 공략은 무척 위험합니다. 자칫 속도가 떨어져 앞에 있는 선수 추월은커녕 뒤따라오는 선수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차피 동메달이 목표였기에 뒤 선수에게 밀리더라도 그냥 아웃코스 공략을 시도해 리자쥔 선수를 추월해보기로 했습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리자쥔 선수를 아웃코스로 제치고 나갔습니다. 무릎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치고 나가 결승선 통과를 앞두고 있는데 제가 리자쥔 선수의 몸 뒤에 있었습니다. 저는 오른발을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습니다. 0.053초 차, IMF 위기에 위안이 된 선물 그 순간이 저는 정지된 화면처럼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 발이 리자쥔 선수보다 앞에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리자쥔 선수를 불과 0.053초 차이로 제치고 제가 1등을 했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어렸을 때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동료들과 연습하면서 ‘네가 먼저 들어가냐, 내가 먼저 들어가냐’ 하면서 결승선 앞에서 발 내밀기를 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연습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습관처럼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순간에 제가 금메달을 따는 동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올림픽에서 ‘발 내밀기 전략’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 빙상연맹에 계신 어떤 분이 얼음판 위로 태극기를 던져주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경기장 위를 계속 돌았습니다. 일본의 현지 교민들이 저에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97년은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IMF) 금융위기를 겪을 때였고, 제가 금메달을 따면서 온 국민이 힘들었을 시기에 제가 자그마한 선물을 드렸다는 생각에 날 듯이 기뻤습니다. 경기장을 나오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스케이트 타지 말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제가 최고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못 보여드려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올림픽이 끝난 뒤 한국에 돌아와 무릎 엠아르아이(MRI)를 찍어보니 오른쪽 연골판이 파열돼 있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최선을 다한 결과로 얻은 부상이었기에 후회스럽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나가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이 순간을 제 인생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합니다.
한편 제가 에이스였고 몸 상태도 최고였던 2002년 솔트레이크 올림픽 때 오노와의 편파 판정 사건은 명승부라기보다는 그냥 잊지 못할 하나의 사건 정도로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이번 소치 올림픽 때 제가 해설위원으로 가서 오노 선수와도 마주쳤습니다. 2002년에는 앙숙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웃으면서 만나는 사이가 됐습니다. 저는 그를 용서했고 그래서 더 편한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동성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
1997 국가대표선발전 출전경기
관람하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그 자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하며 혹독한 훈련을 감당
당당히 국가대표로 뽑히다
무릎부상에도 무모하게 출전한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운 따랐는지 준결승에 결승까지
꼴찌로 달리다 추월, 또 추월
결승점 리자쥔 뒤에서 발 내밀기!
“한명만 제치자, 또 한명만 제치자” 하다가… 그러나 1998년 2월 나가노 올림픽에 출전하는 비행기에 오르면서 저는 무릎에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릎이 붓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에 물이 차올라 있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무릎 부상이 있는지도 모르고 제가 운동을 해왔음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감독님께 출전을 포기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감독님께서 인원수만 채워달라고 부탁하셔서 출전을 결심했습니다. 또 올림픽 메달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무릎이 아팠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버텼습니다. 무릎에 (통증을 완화해주는) 테이프를 감고 경기에 나섰습니다. 돌이켜 보면 참 무모한 행동이었습니다. 98년 당시 저는 팀의 에이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에이스는 채지훈 선수였습니다. 저는 뒤에서 1등의 자리를 꿈꾸는 선수였습니다. 게다가 무릎이 너무 아파서 1등을 하기보다는 그냥 뒤에서 따라가는 전략을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나라 선수들도 저를 견제하기보다는 그냥 편하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올림픽에 출전하면 금메달을 목표로 하게 됩니다. 전 무릎 부상 탓에 메달권에 진입하기조차 부족한 몸 컨디션이었고, 모든 코칭스태프와 기자들도 저의 금메달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는 중국 선수들이 금·은메달을 모두 딸 거라 예상했지요. 운이 따랐습니다. 쇼트트랙은 한 종목당 네번의 경기(예선,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를 뛰어야 합니다. 예선과 준준결승을 치르는데 선수들이 자기들끼리 견제를 심하게 하다가 부딪히고 넘어지면서 탈락해갔습니다. 저는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아 넘어지는 일 없이 (1000m 경기) 준결승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준결승에 가니 간절히 결승으로 가고 싶어졌습니다. 어쩌면 부상 때문에 결승 경기가 제 마지막 올림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릎이 찢어져도 좋으니 일단 한번 해보자.’ 준결승 경기 출발선에 섰습니다. 중국 선수를 포함해 네명이 섰습니다. 저는 1등보다는 2등 전략을 세웠습니다. 2등만 해도 결승에 진출하니까요. 첫 바퀴부터 저는 네번째에 서서 달렸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앞쪽으로 치고 나가면 그 선수 뒤를 따라가려 했습니다. 역시 중국 선수가 앞으로 튀어나갔습니다. 저는 그를 끈질기게 따라붙어 2등으로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결승 경기 출발선에 섰습니다. 미국, 캐나다, 중국, 그리고 저 네명의 선수가 있었습니다. 1등보다는 올림픽 메달만 따자는 생각이어서 ‘한명만 제치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총 아홉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한바퀴를 9초대로 돌아야 할 만큼 빠른 스피드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동메달만 따자고 결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네명 선수 중 네번째로 계속 달렸습니다. 여섯바퀴 돌 때쯤 제가 미국 선수 앞으로 나갔습니다. 세번째 위치에서 계속 미국 선수만 막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두바퀴가 남았습니다. 갑자기 ‘한번 나가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메달보다는 은메달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한바퀴 남기고 제 앞의 캐나다 선수를 안쪽 코너 쪽으로 제치고 치고 나갔습니다. 이제 두번째 순서로 달리게 됐습니다. 마지막 한바퀴. 중국의 리자쥔 선수가 제 앞에 있었습니다. 리자쥔은 96년도부터 저랑 경합을 많이 벌였기에 그도 저를 잘 알고 저도 그를 잘 알았습니다. 왠지 인코스를 공략하면 저를 잘 막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웃코스 공략은 무척 위험합니다. 자칫 속도가 떨어져 앞에 있는 선수 추월은커녕 뒤따라오는 선수에게 추월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차피 동메달이 목표였기에 뒤 선수에게 밀리더라도 그냥 아웃코스 공략을 시도해 리자쥔 선수를 추월해보기로 했습니다. 순간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마지막 코너를 돌면서 리자쥔 선수를 아웃코스로 제치고 나갔습니다. 무릎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꾹 참았습니다. 그렇게 치고 나가 결승선 통과를 앞두고 있는데 제가 리자쥔 선수의 몸 뒤에 있었습니다. 저는 오른발을 앞으로 쑥 내밀었습니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습니다. 0.053초 차, IMF 위기에 위안이 된 선물 그 순간이 저는 정지된 화면처럼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 발이 리자쥔 선수보다 앞에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리자쥔 선수를 불과 0.053초 차이로 제치고 제가 1등을 했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어렸을 때 잠실 롯데월드 아이스링크에서 동료들과 연습하면서 ‘네가 먼저 들어가냐, 내가 먼저 들어가냐’ 하면서 결승선 앞에서 발 내밀기를 하곤 했습니다. 특별히 연습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습관처럼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그게 결정적인 순간에 제가 금메달을 따는 동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올림픽에서 ‘발 내밀기 전략’이란 것은 없었습니다. 결승선을 통과하자 빙상연맹에 계신 어떤 분이 얼음판 위로 태극기를 던져주었습니다. 그것을 들고 경기장 위를 계속 돌았습니다. 일본의 현지 교민들이 저에게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 모습들이 보였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97년은 우리나라가 아이엠에프(IMF) 금융위기를 겪을 때였고, 제가 금메달을 따면서 온 국민이 힘들었을 시기에 제가 자그마한 선물을 드렸다는 생각에 날 듯이 기뻤습니다. 경기장을 나오자마자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스케이트 타지 말라고 권유한 적이 있는데 제가 최고 정상에 오르는 모습을 못 보여드려 안타까워했던 기억도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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