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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스포츠일반

백두급 고꾸라뜨릴 한라급 천하장사 누구냐

등록 2013-02-15 19:54수정 2013-02-16 10:37

백두장사를 쓰러뜨리는 한라장사 ‘제2의 이만기’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과거 엘지에서 한솥밥을 먹고 지금은 각기 다른 팀에서 한라급의 간판스타로 뛰고 있는 김기태(위·현대삼호중공업)와 이주용(아래·수원시청)은 상대방을 메쳐야 천하장사가 될 수 있다.
백두장사를 쓰러뜨리는 한라장사 ‘제2의 이만기’는 언제 나타날 것인가? 과거 엘지에서 한솥밥을 먹고 지금은 각기 다른 팀에서 한라급의 간판스타로 뛰고 있는 김기태(위·현대삼호중공업)와 이주용(아래·수원시청)은 상대방을 메쳐야 천하장사가 될 수 있다.
[토요판] 승부
씨름 김기태 대 이주용
▶ 근육질 두 사내가 어깨를 맞댔다. ‘폭격기’ 김기태(33·현대삼호중공업)와 ‘불도저’ 이주용(30·수원시청). 한라장사 10번에 빛나는 김기태가 먼저 앞서갔다. 이주용은 금강장사만 9번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6월 한라급으로 체급을 올려 김기태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둘의 대결은 1승1패. ‘안다리의 달인’ 김기태와 ‘오금당기기의 달인’ 이주용의 맞대결은 씨름 팬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설날이던 지난 10일, 두 라이벌은 ‘한라장사’에 도전했다.

한라장사 10번 김기태
금강장사 9번 이주용
2011년 이주용이 체급을 올려
같은 모래판에서 붙었다
지금까지의 맞대결 1승1패

“아우가 한라급으로 와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더라”
“형을 이겨야 진짜 챔피언”
2013년 설날장사씨름대회
꽃가마 주인은 이주용이었고
김기태는 3위에 머물렀다

군산이 들썩였다. 월명체육관에 구름 관중이 몰려들었다. 2013 설날장사씨름대회를 보려는 사람들이다.

씨름 팬들은 1980년대 민속씨름의 추억이 있다. ‘작은’ 이만기가 ‘큰’ 이준희나 이봉걸을 넘어뜨릴 때 쾌감을 느꼈다. 이만기는 한라급(110㎏ 이하)이었다. 김기태와 이주용도 한라급이다. 힘과 기를 겸비한 체급이다. 중계방송을 위해 군산에서 온 이만기 <한국방송> 해설위원(인제대 교수)은 “김기태와 이주용의 대결이 이번 대회 최고 빅매치”라고 했다. 이준희 대한씨름협회 경기감독위원은 “현역 선수 중 가장 팽팽한 라이벌”이라고 했다.

첫날(8일) 태백급(80㎏ 이하), 둘쨋날(9일) 금강급(90㎏ 이하)에 이어 한라급은 설날인 10일, 백두급(150㎏ 이하)은 11일 장사가 가려졌다.

설날씨름대회 전날 그들 숙소에선

한라급에는 모두 40명이 출전했다. 토너먼트로 장사를 가리기 때문에 5~6번을 이겨야 정상에 오른다. 김기태는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했다. 반면 이주용은 1회전부터 치러야 했다. 이런 것을 두고 선수들은 “똥통에 빠졌다”고 한다.

2월9일, 3회전까지 치러 8강이 결정됐다. 김기태와 이주용도 8강에 합류했다. 선수들은 시합이 다가올수록 예민해진다. 김기태는 “지나가다 휴지라도 하나 떨어져 있으면 꼭 쓰레기통에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겐 공개하지 못하는 징크스도 하나 있다. 이주용도 “인터뷰 징크스가 있어서 경기 직전엔 절대로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둘은 다음날 ‘본선’을 위해 숙소에서 일찌감치 휴식에 들어갔다. 이날 늦은 오후, 이주용의 숙소를 먼저 찾아갔다. 대여섯평 남짓한 군산의 한 모텔방에 선배 최종경(32)과 방을 함께 쓰고 있었다. 더블침대 하나에 둘이 같이 잘 수 없었던 탓인지 바닥에도 이불이 깔려 있었다.

이주용은 “지금 이 시간부터 내일 상대할 선수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마인드컨트롤에 들어간다”고 했다. 8강, 4강, 결승 상대를 차례로 떠올리며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고 했다. 방심은 금물이다. “8강에서 만날 상대는 저에게 두번 모두 졌던 선수다. 하지만 그 선수 역시 그동안 저를 얼마나 더 연구했겠는가.” 그는 “철저하게, 더 철저하게…”라고 되뇌었다. 그의 ‘연구 대상’ 마지막은 김기태였다.

이날 저녁 김기태의 숙소도 방문했다. 현대삼호중공업은 국내 20여개 씨름단 가운데 유일한 프로팀이다. 지자체 팀들은 모텔에 숙소를 잡았지만 현대삼호 선수단은 무궁화 3개짜리 호텔을 사용했다. 예닐곱평 남짓한 온돌방에서 김기태는 동갑내기 ‘단짝’ 이준우(33)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준우는 한라장사 3번을 차지한 실력자로 역시 8강에 올라 있었다.

김기태는 “예선이 더 힘들다. 8강부터는 모래판 위에 올라가면 긴장되지만 그 전에는 괜찮다”며 웃었다. “(대진운이 좋아) 오늘 2경기밖에 안 치렀고, 컨디션도 좋다.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 역시 내일 상대할 선수들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만약 김기태와 이준우가 8강을 통과한다면 둘이 4강에서 맞붙는다. 설날장사의 꿈을 꾸는 두 친구가 나란히 잠이 들었다. 말 그대로 동상이몽이다. 하지만 김기태는 이준우의 벽을 넘어 결승 상대로 이주용을 그리고 있었다.

김기태와 이주용 둘 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은 넉넉지 못했다. 김기태의 아버지는 충남 청양에서 농사를 지었고, 어머니는 공장에 다녔다. 그는 “어머니가 친구들 사이에서 기죽지 말라고 용돈을 넉넉히 주셨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주용의 아버지는 경기도 수원에서 바둑 기원을 했지만 벌이가 시원치 않았다. 이주용이 처음 씨름을 한다고 했을 때 엄마와 누나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아버지만 찬성했다. “운동하면 돈 안 드는 줄 알고 그러셨대요.”

어릴 적엔 둘 다 씨름 선수 체격이 아니었다. 어린 김기태는 키는 컸지만 비쩍 말랐다. 운동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씨름보다 육상을 먼저 시작했다. 100m가 주종목이었다. 1991년, 초등학교 5학년 때 군 대표 선발대회를 앞두고 선생님이 씨름도 한번 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덜컥 1등을 했다. 육상은 2등이었다. “선생님이 ‘씨름이랑 육상 중 어떤 종목으로 나갈래?’ 하시길래, ‘기왕이면 1등 한 씨름으로 나가겠다’고 했죠. 그래서 씨름을 시작하게 됐어요.”

어린 이주용은 몸이 약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체육시간에 선생님이 반 아이들을 운동장 한쪽의 씨름장으로 데려갔다. “선생님은 대뜸 키 작은 저와 우리 반에서 가장 뚱뚱했던 애랑 씨름을 시키더라고요. 샅바도 없이 허리춤을 잡고 했는데 그만 제가 이겼죠. 반 친구들은 ‘와~ 대단하다’ 하면서 제 어깨를 주물러줬어요.” 어쩌면 그게 씨름 선수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이주용이 씨름부에 들어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순전히 먹을 것 때문이었다. “학교에선 흰우유만 주는데 씨름부에선 딸기우유랑 초코우유를 줬어요. 빵도 제과점 빵을 3개씩 주고…. 매주 수요일엔 삼겹살도 줬어요. 어렸을 땐 먹을 것에 약하잖아요.(웃음)”

내겐 재미있었던, 재미없었던 씨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씨름을 배웠다. 하지만 훈련 과정은 대조적이었다. 김기태는 흥미 만점이었다. “씨름부 선생님이 겨울에 선수들을 산에 데리고 가서 산토끼 한마리 잡아오라고 했어요. 그때는 산토끼가 많을 때였죠. 눈앞에 보이는데도 못 잡아요. 뛰고 구르고 난리도 아니었죠.” 산토끼 잡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산악훈련이 따로 없었다.

“여름에는 도로에서 러닝을 시켰어요. 선생님은 8㎞ 정도 떨어진 곳에 미리 가서 투망 치고 고기 잡아 어죽을 끓이셨죠. 우리는 어죽 먹겠다는 생각에 8㎞를 단박에 달렸어요.” 김기태는 복싱 선수 출신이었다는 그 선생님을 잊지 못한다. 그는 “나도 지도자가 되면 그렇게 시키고 싶다”고 했다.

반면 이주용은 훈련 과정이 너무 지루했다. “처음 씨름부 들어가서 기둥 잡고 자세 잡는 연습만 6개월을 했어요. 샅바를 못 차게 하더라고요. 30분 자세 잡고 10분 쉬는 것을 반복했는데 어린아이들 누가 씨름을 재밌어했겠어요.”

그만두는 친구가 속출했지만 어린 이주용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땐 제가 씨름을 가장 못했어요. 제 또래가 5명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중학교,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한명씩 한명씩 이겼죠. 그때마다 저한테 진 아이는 자존심이 상했던지 씨름을 그만뒀죠.”

두 선수 모두 고통스러운 고교 시절을 보냈다. 매도 많이 맞았다. 이주용은 “이겨도 맞고, 져도 맞았다”고 했다. 김기태는 “선배들한테 하루 한번은 꼭 맞았다. 차라리 새벽에 맞으면 하루 종일 편안한데 오후까지 안 맞으면 조마조마했다”고 털어놨다.

이주용 역시 “코치님이 3년 내내 긴장을 풀어주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고3 가을에 숙소를 이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키도 크고 골격이 커지면서 몸무게가 84㎏으로 불어났다. 제한 체중은 70㎏이었다. 무려 14㎏을 빼야 하는데 아무리 운동을 해도 빠지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운동을 했는데 체육부장 선생님이 다시 운동을 시키려고 따라오라고 했다.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있었는데 따라가는 척하다가 골목길로 내뺐죠.”

그 뒤 2주 만에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고형근 감독이 “넌 이제부터 내 제자 아니다, 인사도 하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이주용은 고 감독과 마주칠 때마다 큰 소리로 인사했고, 얼마 뒤 제자를 용서했다. 고 감독은 현재 이주용의 소속팀 수원시청 감독이다.

김기태는 고교 때 살인적인 훈련 일정을 소화했다. 새벽 5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네 차례 10시간을 훈련했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선배들이었다. “고1 때 동기 2명이 선배 20명을 모셨다. 야구방망이로 50대씩 맞았다”고 했다.

1학년 가을 어느날 밤, 몰래 숙소를 나가려고 짐을 쌌다. “교문을 나서려는데 보름달에 어머니 얼굴이 보였어요. 차마 발길이 안 떨어졌죠. 그래서 다시 숙소로 들어갔어요.”

김기태는 고2 때부터 전국을 휩쓸었다. 고3 때인 1998년에는 강원도 동해 망상대회에서 대학생 형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고교생으로는 처음으로 정상에 올랐다. “그때 아마 씨름계에 제 이름이 처음 알려졌고, 당시 엘지 이준희 감독님 눈에 든 것 같아요.”

이주용도 경기대에 진학한 뒤 실력이 급성장했다. “고교 때 기초를 튼튼히 쌓은 덕분에 대학에서 응용력과 창의력이 생기면서 씨름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주용은 대학 3학년 때 통일장사에 오르며 이름을 날렸다.

기태형에게 패한 뒤 ‘타도’를 외치다

김기태와 이주용은 자주 만나지 못했다. 체급도 다르고, 나이 차이도 3살이나 났기 때문이다. 서로의 존재를 알고는 있었지만 둘이 기억하는 만남은 2004년께 엘지(LG)에서 잠시 한솥밥을 먹을 때다. 당시 김기태는 프로팀 엘지에 몸담고 있었고, 대학생이던 이주용은 엘지의 스카우트 표적이 돼 연습생으로 경기도 구리 숙소에 머물며 훈련을 같이 했다.

김기태는 “경기대 재학생이던 주용이가 훈련하러 들어왔는데, 첫인상이 다부져 보였다. 인사성도 밝고 운동도 정말 열심히 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그는 “어느날 주용이를 제 차에 태워 형이 일하던 골프장을 간 적이 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는데, 주용이가 기억할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이주용의 기억이다. “기태 형은 프로에 가자마자 신인인데도 몇번 한라장사를 했다. 저는 텔레비전으로 기태 형을 보면서 ‘와~ 멋지다’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대학 3학년 때 엘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와서 연습생으로 엘지에 들어갔다. 아파트 2개 층을 숙소로 사용하며 운동을 같이 했는데, 기태 형이 유난히 저를 예뻐해 주셨다.”

이주용도 승용차를 함께 탔던 추억을 차종까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은 기태 형의 오피러스 승용차를 타고 골프장에 갔다. 승용차 몰고 다니던 프로 형들이 멋있어 보였고, 저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때 기태 형이 맛있는 식사도 사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김기태는 한라급에서, 이주용은 금강급에서 이름을 떨쳤다. 2년 전에는 설날장사에서 나란히 우승한 뒤 <한국방송> ‘아침마당’ 프로그램에도 함께 출연해 ‘수다’를 떨었다. 이주용은 2011년 6월 금강급에서 한라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금강급에서 아무리 많이 우승해도 백두급과 한라급만큼 주목받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그는 “한라급에서 한판 두판 이기다 보니 자신감이 생겼고, 어느새 기태 형과 대적할 만한 실력이 됐다”고 했다.

둘의 첫 대결은 2011년 9월 여수 추석장사대회 결승전이었다. 체급을 올리고 두번째 대회에 나온 이주용을 상대로 김기태는 작전을 완벽히 짰다. 이주용은 “기태 형이 저의 특기인 오금당기기를 잡히는 척 미끼를 주고 상체를 옆으로 흘려 중심을 잃게 한 뒤 되지기를 했다. 완벽히 당했다”고 혀를 내둘렀다. 둘째 판, 셋째 판도 마찬가지였다. 3-0, 김기태의 완벽한 승리였다.

이주용은 절치부심했다. 4개월 뒤 2012 설날대회에서 첫 한라장사에 올랐다. 하지만 김기태는 햄스트링 부상이라 출전하지 못했다. 이주용은 우승 인터뷰에서 “기태 형을 이겨야 진정한 챔피언”이라고 말했다. 김기태는 그 시각 재활훈련중이었다. “텔레비전으로 주용이 인터뷰를 봤어요. 큰 자극이 됐죠.”

김기태는 “주용이가 한라급으로 올라왔을 때 잘할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줄 몰랐다”고 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을 이긴 선수를 만나면 자신감을 잃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주용은 달랐다. 그는 “한번 졌던 상대한테는 다시 지지 않으려고 한다. 기태 형한테 진 뒤 주위에 ‘기태 형과 붙여달라’, ‘타도 김기태’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했다.

마침내 기회가 왔다. 지난해 9월2일 경북 청도에서 열린 한씨름큰마당. 단체전으로 진행되는 이 대회에서 이주용은 김기태를 2-0으로 가볍게 제압했다. 이번에도 작전이 승부를 갈랐다. 이주용은 ‘필살기’ 오금당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기술에 변화를 줬다. 샅바를 놓치게 해 장기전을 펼쳤고, 태클로 들어가 이겼다”고 했다. 밑씨름의 승리였다.

김기태의 회고다. “샅바를 딱 잡아 보니 안 되겠더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지고 나서 속으로 ‘주용아! (정신차리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김기태는 고2 망상대회에서
이주용은 대학 3년 통일장사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4년 엘지 프로와 연습생으로
둘은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그들의 목표는 천하장사
체급 떼고 벌이는 최강자 싸움
김기태는 준우승까지 올랐었고
이주용은 백두급에 오른 뒤
정상 등극을 꿈꾸고 있다
제2 이만기는 누가 될 것인가

이만기의 추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5개월이 흘렀다. 1승1패. 이제는 진정한 승자를 가려야 할 때다. 2013 군산 설날장사대회를 앞두고 둘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산을 타고 땀을 흘렸다. 한라급 대진표가 나왔다. 결승에서나 만날 대진이었다. 관중들은 둘의 결승 격돌을 기대했다. 1회전부터 치른 이주용은 5번, 1회전을 부전승으로 통과한 김기태는 4번을 이겨야 둘이 만난다. 실력대로라면 둘의 결승 맞대결은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씨름의 세계에선 이변이 잦다.

둘은 나란히 8강을 통과했다. 김기태는 신예 왕덕유(22·영월군청)를 호미걸이와 덮걸이로 가볍게 제쳤다. 이주용도 노장 이한신(34·태안군청)을 안다리와 들어메치기로 손쉽게 제압했다. 이제 4강만 통과하면 둘의 숨막히는 세번째 승부가 펼쳐진다.

김기태가 먼저 4강에서 김보경(30·동작구청)을 만났다. ‘절친’ 이준우를 8강에서 물리친 다크호스다. 김보경은 이주용과 동기로 중학교 때부터 맞붙은 호적수다. 게다가 이주용과 똑같이 오금당기기가 주특기다. ‘전초전’으로는 제격이었다. 그런데 김보경은 만만치 않았다. 첫판부터 기싸움이 팽팽했다. 김기태의 선제공격을 김보경이 막아냈고, 이어 두 선수가 동시에 옆으로 넘어졌다. 심판은 김기태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상대는 비디오 판독을 요청했고, 김기태의 어깨가 먼저 모래판에 닿은 것으로 확인되면서 첫판을 잃었다. 김기태는 둘째 판에서 경기 시작하자마자 기습적인 밀어치기로 1-1 동점을 만들었다.

마지막 셋째 판. 샅바를 잡을 때부터 긴장이 흘렀다. 관중들도 숨을 죽였다. 어깨를 맞댄 두 선수 중 김보경이 먼저 밭다리를 시도했다. 김기태는 역으로 되치기로 받아쳤고, 첫판처럼 동시에 옆으로 넘어졌다. 역시 비디오 판독이 이어졌다. 관중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느린 화면을 쳐다봤고, 일부 관중이 환호성을 질렀다. 김보경의 승리였다. 1-2로 결승 진출이 좌절된 김기태는 허탈한 듯 두손을 허리춤에 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주용도 준결승 상대 박정의(25·장수한우)를 맞아 고전했다. 첫판을 뿌려치기로 잡았지만 상대의 배지기에 둘째 판을 내줬다. 1-1 동점. 관중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군산에서 가까운 전북 정읍 출신의 박정의를 응원하는 이가 더 많았다. 그러나 이주용은 박정의를 저돌적으로 몰아붙인 뒤 잡채기로 경기를 끝냈다.

김기태와 이주용의 맞대결은 무산됐다. 그러나 이주용은 정상 도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결승 상대 김보경은 “중학교 때부터 자웅을 겨뤄온 동갑내기 친구”다. 김보경 역시 오금당기기가 주특기로 씨름 스타일마저 비슷하다. 경기는 예상대로 장기전으로 흘렀다. 첫판부터 정규시간 1분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연장에서 이주용은 멋진 왼배지기를 성공시키며 김보경을 모래판에 눕혔다. 이주용의 멋진 기술에 관중들은 환호와 함성을 내질렀다. 둘째 판도 연장까지 이어졌다. 샅바 싸움부터 신경전이 치열했고, 경고가 난무했다. 결국 이주용이 경고승을 거뒀다.

마지막 셋째 판. 이주용은 들어메치기로 경기를 끝낸 뒤 포효했다. 모래판 위에 흰색 꽃가루가 날리고 풍악이 울렸다. 한라급으로 체급을 올린 지 1년8개월 만에 세번째 한라장사 꽃가마를 탔다. 김기태는 2-3품 결정전에서 상대의 기권으로 2품(3위)을 차지했다.

김기태(왼쪽)와 이주용(오른쪽)은 2011년 9월 여수 추석장사 결승에서 처음 맞붙었다. 김기태는 금강급에서 한라급으로 체급을 올려 출전한 이주용을 3-0으로 눌렀다.
김기태(왼쪽)와 이주용(오른쪽)은 2011년 9월 여수 추석장사 결승에서 처음 맞붙었다. 김기태는 금강급에서 한라급으로 체급을 올려 출전한 이주용을 3-0으로 눌렀다.

축제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이날 밤 이주용은 수많은 축하 문자와 끝없는 축하 전화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는 “기태 형이 올라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고 겸손해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김기태는 “지나친 겸손”이라고 했다. 김기태는 지인들과 패배의 쓴잔을 마시고 있었다. 호탕한 성격의 그는 “시합 얘기는 하지 말자”며 웃었다. 하지만 웃음 뒤엔 진한 아쉬움이 그의 폐부를 찌르고 있었다.

김기태와 이주용 모두 천하장사가 꿈이다. 해마다 12월 체급과 상관없이 모든 선수들이 참가해 최고 씨름 선수를 가린다. 이를 ‘천하장사’라고 한다.

김기태는 천하장사에 한뼘 모자란 적이 있다. 2008년 남해 천하장사 대회에서 자신보다 40~50㎏이나 무거운 윤정수(28·현대삼호중공업)와 결승전에서 만나 2-3으로 아쉽게 1품(준우승)에 머물렀다. 김기태는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자꾸자꾸 이기고 결승까지 올라가니까 관중들이 모두 ‘김기태’를 연호했다. 씨름하면서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고 했다.

이주용은 체급을 백두급으로 올려 한국 씨름 사상 전무후무한 세 체급 석권과 천하장사 등극이 목표다.

씨름계에선 씨름이 살아나려면 ‘제2의 이만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고꾸라뜨리는 쾌감을 말한다. 이만기 위원은 “김기태와 이주용이라면 한라급 천하장사를 기대해도 좋다”고 했다. 둘이 천하장사를 놓고 격돌하는 날을 상상해 본다. 관중들의 함성과 심장 박동 소리는 더욱 커질 것이다.

군산 영암 수원/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대한씨름협회 제공



형님은 속도전, 아우는 장기전

김기태와 이주용은 여러 가지로 대척점에 서 있다. 우선 씨름 스타일이 대조적이다. 씨름은 상대를 들어서 넘기는 들씨름과 밑을 파고드는 밑씨름으로 나뉘는데, 김기태는 안다리, 밭다리, 들배지기 등 전형적인 들씨름을 하고, 이주용은 오금당기기, 뒤집기 등 밑씨름의 대명사다. 이렇다 보니 김기태는 속전속결로 경기를 끝내고, 이주용은 장기전에 강하다.

소속팀도 라이벌이다. 김기태가 나온 인하대와 이주용의 출신 학교 경기대는 씨름 맞수이다. 두 학교는 ‘인-경전’, ‘경-인전’이라는 이름으로 한때 씨름과 배구 두 종목 교류전도 벌인 적이 있다. 현 소속팀 현대삼호중공업과 수원시청도 한씨름큰마당 결승에서 단골로 맞붙는 ‘앙숙’이다. 최근 설날장사대회에서도 4체급 중 현대삼호는 장사 2명을 배출했고, 수원시청은 장사 1명, 1품 2명의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주용은 장사가 확정되면 모래판 위에서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김기태는 불교를 믿는다. 본가와 처가 모두 절에 다니고, 특히 그의 장인은 경남 김해에서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성격도 대조적이다. 김기태는 쾌활한 성격과 유머로 만난 지 5분이면 사람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이주용은 차분하면서도 은은하게 조곤조곤 말을 잘한다. 김기태는 딸만 둘이고, 이주용은 아들만 둘이다.

공통점도 많다. 김기태는 2남1녀 중 막내이고, 이주용은 1남2녀 중 막내다. 두 집안 막내는 러브스토리도 흥미롭다.

김기태는 대학 시절, 씨름 선배 소개로 아내 조현경(33)씨를 만났다. 그는 “처음 사진을 보니 느낌이 좋았고, 일주일 뒤 통화를 했다. 그리고 3주쯤 지난 뒤 처음 만났다”고 했다. 금요일 밤, 심야 버스를 타고 경남 김해로 내려갔다. 조씨가 “왜 내려왔냐”고 물었다. 김기태는 “이렇게 예쁜 사진을 보고 안 내려올 수 있겠느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둘은 2003년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주용도 대학 4학년 때 아내 이민영(33)씨를 만났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내가 중계방송을 보다가 우승하고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 이주용을 발견한 게 인연이 됐다. 인터넷에 글을 남기고 전화 통화를 하다가 한달 만에 처음 만났다. 이주용은 “꿈에서만 그리던 이상형이 내 앞에 나타났다”며 웃었다. 둘은 2009년 부부가 됐다.

김기태는 카카오톡 대문에 ‘가화만사성’이라고 써놓았다. 그의 숙소에는 가족사진이 크게 걸려 있다. 이주용도 카카오스토리에 가족사진을 잔뜩 올려놓았다. 이주용은 씨름 복장 차림으로 세살배기 아들과 양반다리를 하고 마주 앉은 사진이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김기태는 안다리로 이길 때마다 5만원씩 적립한다. 지난해엔 ‘사랑의 안다리 기금’ 50만원을 전달했다. 이주용을 꺾고 정상에 올랐던 2011 여수 추석장사대회 때는 우승상금의 절반인 1000만원을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했다.

이주용도 소년소녀 가장을 후원하고 보육원에 성금을 낸다. 개척교회 목회자도 지원한다. 액수를 밝히진 않았지만 꽤 많은 성금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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