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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던 기록 창조, 톱클래스의 완성

등록 2012-07-27 19:31수정 2012-07-28 13:57

지난 25일 수영 국가대표 선수 박태환이 영국 런던의 올림픽파크 아쿠아틱센터에서 훈련에 열중하고 있다.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보입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
마린보이 박태환
“퐁당~.”

분명 준비 휘슬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벌써 물속에 들어가 있었다. 부정출발. 그게 끝이었다. 팔은 단 한번도 휘젓지 못했다. 주섬주섬 짐을 싸고 라커룸으로 들어와 모퉁이에 숨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었다. 억울했고 창피했고 분하기까지 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참으면 참을수록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백지장 같던 머릿속이 점점 선명해지며 가족들 얼굴이 하나둘 떠올랐다. 엄마, 아빠, 누나…. 순간 가슴 한끝이 아려왔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다음번엔, 정말 다음번엔 잘하고 말 거야.’ 열다섯 소년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2004년 8월 그리스 아테네의 태양은 그렇게 졌다.

유방암 치료중에 제주까지 달려간 어머니

처음부터 ‘아쿠아보이’는 아니었다. 물 가까이 가기 싫어하는 꼬마였다. 박태환(23·SK텔레콤)이 바다에 처음 들어간 것도 2008 베이징올림픽이 끝난 뒤 광고를 촬영하면서다. 서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수영장이 아니면 물을 접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도 않았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동네 수영장을 찾은 것이 다섯살 때. 천식 예방에 좋다는 이유로 어머니는 그에게 수영복을 입혔다. 물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물과 친해졌다. “수영 참 잘한다”는 주위의 칭찬도 듣기 좋았다. ‘수영 천재’라는 소리는 수없이 들었다. 천부적인 자질이 있었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 자질만으로 ‘선수’가 되지는 않는다. 적지 않은 목돈이 필요하다. 그즈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집안도 어려워졌다. 한달 수영 레슨비를 내는 것도 부담이었다. 더 큰 문제는 뚜렷한 ‘멘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 수영 역사상 박태환 이전에 세계 대회에서 성적을 낸 선수는 없었다. 조오련·최윤희 등이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올림픽에서는 결선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2004 아테네올림픽 개인 여자 혼영 400m에서 남윤선이 결선에 오른 게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즈음 아버지 박인호씨가 “우리나라에 수영 잘해서 성공한 사람이 누가 있느냐”며 박태환에게 수영을 관두라고 했던 결정적 이유였다.

어머니 유성미씨는 박태환의 재능을 썩히기가 아쉬웠다. 유방암 수술을 받고 한달 후 힘겨운 항암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어린 아들을 응원하기 위해 대회가 진행중이던 제주도까지 득달같이 달려갔던 유씨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히면서 훈련은 더욱 힘들어졌다. 추운 겨울날 수영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젖은 머리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것도 여러 번. 유씨는 버스 안에서 파르르 떠는 어린 아들을 지켜보며 무너지는 가슴을 꽉 부여잡았다. ‘태환아, 넌 꼭 잘될 거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도 점점 마음을 열었다.

아테네올림픽 15살 국가대표
부정출발, 실격의 악몽
시련은 그를 독종으로 만들었다

폐활량과 스피드를 무기로
아시아 첫 자유형 2연패 도전
하지만 목표는 ‘금’이 아니다
세계 신기록이다

반응속도 0.66초…출발 트라우마를 넘다

2004 아테네올림픽 때 박태환은 서울 대청중학교 3학년으로 대한민국 전체 선수단 중 막내였다. 세계적인 선수들과 겨룬다는 생각에 들떠 있기도 했다. 남자 자유형 400m 예선. 빨강 파랑 태극마크가 새겨진 수영모를 쓰고 2번 레인에 섰다. 너무 긴장했던 탓일까. 생각할 시간도 없이 그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악몽과도 같은 1초였다. 어린 가슴은 산산조각 났다. 집으로 돌아온 뒤 한달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웃을까봐 두려웠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미안했다. 최연소 수영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나갔는데 결과는 부정출발 실격이니 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성장통 없는 영웅은 없는 법. 박태환은 시련을 겪은 뒤 더욱 단단해졌다. 마냥 좋던 수영에 ‘독기’라는 감정이 덧입혀졌다. 한달여 뒤 다시 ‘수영 선수’ 박태환으로 돌아왔다.

첫 올림픽 출전 때 생긴 트라우마 때문인지 박태환의 출발반응속도는 아주 빠르다.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미국)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2008 베이징올림픽 자유형 400m 결선 때 박태환의 출발반응속도는 0.69초였다. 출전자 8명 중 가장 빨랐다. 2011 상하이세계선수권 때는 자유형 200m 결선에서 0.66초의 출발반응속도까지 나왔다. ‘출발’ 때문에 받은 상처를 반복 훈련으로 치유했고, 결국 세계 최고로 발돋움했다. 박태환의 승부욕과 집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09 로마세계선수권 자유형 200m·400m·1500m 예선에서 탈락하면서 온갖 비난에 시달렸으나 꿋꿋하게 일어설 수 있던 것도 그의 강인한 정신력 때문이었다. 박태환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에스케이텔레콤 권세정 매니저는 “박태환은 힘든 상황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굉장히 강한 선수다. 그의 투지와 근성이 런던올림픽 때 강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박태환의 전화번호 뒷자리는 2012다. 오른쪽 골반에는 오륜기 문신이 새겨져 있다. 2012 런던올림픽에 대한 각오가 그대로 드러난다. 2011년 10월부터 270여일 동안 오스트레일리아 브리즈번에 기반을 두고 런던올림픽을 준비하면서 그는 열흘도 채 쉬지 않았다. 목표는 금메달이 아니다. 세계신기록이다. 세계 최고 수영선수들은 대부분 세계기록을 한번쯤 깬 경험이 있다. 그는 아시아신기록을 세운 경험밖에 없다. 박태환은 “세계신기록을 단 한번도 세우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수영 톱클래스라고 할 수 없다”며 “나이 등을 고려하면 런던올림픽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계신기록을 노릴 수 있는 대회”라고 강조한다. 마이클 볼 코치는 “박태환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 최고의 레이스를 펼친다면 충분히 세계신기록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올림픽 끝나면 여친 사귀고 싶어

세계신기록을 향한 지난 9개월의 노력은 처절했다. 약점인 잠영(물속에서 헤엄치는 것)과 돌핀킥(잠수 상태에서 두 다리를 붙이고 허리와 무릎의 반동을 이용해 아래위로 흔들며 발차는 동작)을 보완하기 위해 오전 수영, 오후 웨이트트레이닝의 빡빡한 훈련일정을 소화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몸을 극한의 단계까지 밀어붙였다. 훈련이 힘들어 어떤 때는 수영장 밖으로 나오다가 몇 시간 전에 먹은 것을 다 토해내기도 했다. 훈련 파트너 이현승이 곁에 있었고, 에스케이텔레콤 전담팀이 늘 그의 곁을 지켰지만 외로움 또한 지울 수 없었다. 물속에서 그는 혼자만의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박태환이 올림픽 후 가장 하고픈 일은 여자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자유형은 배영이나 접영, 평영 같은 영법이 아니다. 그냥 가장 편한 자세로 헤엄쳐서 빨리 터치패드를 찍으면 된다. 물속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를 뽑는 게 자유형이다. 때문에 체형과 힘이 좋은 서양 선수들이 우승을 도맡아 했던 종목이기도 했다. 박태환의 키는 183㎝. 펠프스(193㎝)나 ‘중국의 떠오르는 별’ 쑨양(198㎝)보다 10㎝ 이상 작다. 그래도 그는 7000㏄에 이르는 폐활량(일반인 평균 3000㏄)과 폭발적인 스피드로 단점을 극복해왔다. 이제 박태환은 전설이 되려 한다. 지금껏 아시아 선수 중 올림픽 자유형 종목 2연패를 달성한 선수는 없다. 세계적으로도 남자 자유형 400m 2연패를 이룬 선수는 머리 로즈(1956·1960년)와 이언 소프(2000·2004년·이상 오스트레일리아) 둘뿐이다. 아테네(2004년), 로마(2009년) 등 유독 유럽에서 치러진 국제대회와는 인연이 없던 박태환은 자유형 400m(29일 결승)를 뛴 뒤, 200m(31일 결승)에 나선다. 나흘 휴식 뒤 자유형 1500m(8월5일 결승)에도 도전한다.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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