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30일~7월2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문화체육회관에서 열린 제25회 회장배 전국리듬체조대회. 1일 오전 중등부 대회를 앞두고 연습중인 선수들.
[토요판] 커버스토리
양구에서 만난 포스트 손연재들
양구에서 만난 포스트 손연재들
1년마다 바꾸는 4벌의 경기복
보석 붙이는 수공비 아끼려
촛농으로 크리스털 한알 한알…
재즈, 발레도 따로 배워야죠
“쿵.” 경기가 시작된 뒤 후프 종목을 연기하던 한솔이가 공중으로 던진 후프를 놓쳤다. 지켜보던 김주영 코치가 고개를 떨궜다. “쉬운 건데 마지막 확인을 안 해서 못 받은 거예요.” 옆자리의 모이세예바 코치는 발을 쾅쾅 구르며 자기 나라 말로 거칠게 욕을 했다. “후프랑 리본에서 조금 실수했는데, 곤봉이나 볼은 괜찮았어요. 난도 올려서 더 열심히 하려고요.” 경기를 마치고 만난 한솔이가 수줍게 말했다. 한솔이는 이 대회에서 중등부 개인종합 2위를 했다.
리듬체조는 선수가 자신의 수준에 맞춰 준비한 동작을 최대한 완벽하게 연기해야 하는 종목이다. 다른 선수와의 경쟁보다 누가 더 자신의 연기에 충실했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난이도에 따른 기본점수의 차이는 있지만 실수를 하지 않아야 감점이 적다.
전국 선수 150명…전라도는 오래전에 0명
“확인! 중심! 힘!” 2층 관중석에서 들려온 소녀들의 낭랑한 목소리가 체육관에 쩌렁쩌렁 울렸다. 오다빈(부산 사직여중1), 박예은(부산 온천초6) 등 먼저 경기를 마친 선수들이 선후배 선수의 경기 중간중간 보내는 응원이었다. 후프·리본·곤봉·볼 등 리듬체조에 쓰이는 수구를 높이 던지고 받아야 할 때는 떨어지는 지점을 ‘확인’하라고, 또 순간적인 힘이 필요할 때는 ‘힘’을 내라고, 균형을 잡아야 하는 동작에서는 ‘중심’을 잡으라고 일깨워주는 일종의 추임새였다. “집중하라고 말해주는 거예요. 시합중에는 아무 생각도 안 들거든요.” 오다빈 선수의 설명이었다.
신수지 선수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통해 인기를 모은 뒤 제2의 신수지·손연재를 꿈꾸며 리듬체조에 입문하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국내 리듬체조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우선 선수층이 얇다. 현재 대한체조협회에 등록된 선수는 초등부 53명, 중등부 47명, 고등부 30명, 대학부 24명, 일반부 2명 등 모두 150명 정도다. 선수를 해봐야 지도자가 된다. 등록된 지도자는 65명뿐이다. 황지훈 대한체조협회 사무국 과장은 리듬체조 선수가 적은 이유를 한국 리듬체조의 짧은 역사와 얕은 저변에서 찾았다. “국내 어디를 가더라도 탁구장, 당구장, 골프장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이 종목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나가 잘할 수밖에 없는 거죠. 반면 리듬체조의 경우 천장까지의 높이가 8m 이상인 체육관이 필요한데, 그런 경기장을 찾기가 어디 쉽습니까?”
지도자가 적다 보니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는 리듬체조를 배우는 것조차 어려웠다. 경기도 안산의 초·중·고등학교에서 10여명의 선수들을 가르치고 있는 심재영 코치는 “서울과 지역의 격차가 크다”고 말했다. “지방에 사는 코치가 없으니 자연히 지역 아이들은 코치를 만나기조차 어려워요. (지도자가 없는) 전라도는 선수 끊긴 지 벌써 꽤 됐죠.” 현재 리듬체조를 배울 수 있는 초등학교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서울에 12곳, 경기에 6곳이 있으며, 충청에 3곳, 부산과 경남, 인천에 1곳씩이다. 선수가 줄어드는 중·고등학교의 경우 수도권 집중 현상은 더 심해 일부 지역 선수는 코치를 찾아 원정을 가거나 개인코치를 두고 훈련해야만 한다. 리듬체조를 가르치는 중학교 22곳 중에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에만 18곳이 있고 고등학교도 9곳 중 7곳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
리듬체조를 하려면 꽤 많은 돈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얇은 선수층을 설명하는 한 이유였다. 리듬체조 동작에 유용한 재즈댄스나 발레를 따로 배워야 한다. 경기복이나 장비 값도 만만치 않다. 경기복은 후프·볼·리본·곤봉 등 종목마다 한벌씩 모두 4벌이 필요한데 한벌 가격이 40만~120만원이다. 경기복과 수구는 보통 작품이 달라지는 1년마다 바꾼다. 경기복과 수구, 음악이 어우러져 신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종목이기에 들인 비용만큼 선수가 돋보인다는 생각에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손연재 선수의 어머니가 그렇듯, 리듬체조 선수를 딸로 둔 대부분의 어머니가 수공비 20만원을 아끼려고 직접 재봉을 하고 옷에 장식물을 붙인다.
이날 만난 한 어머니는 서울 동대문시장에서 크리스털 한 상자(1440개)를 사서 촛농으로 하나하나 옷에 붙였다고 말했다. 보석마다 빛의 투명도가 다르기 때문에 값이 싼 큐빅이나 스팽글(반짝거리는 얇은 장식용 조각)은 달아봤자 반짝이는 효과가 떨어진다고 했다. 여기에 일본 업체가 독점으로 만드는 체조용 가죽슈즈는 1년에 4~5켤레씩 닳는데 켤레당 5만원 정도 한다. 학교나 경기장까지 선수들을 차로 데려다주는 등 값을 매길 수 없는 부모의 정성은 덤이 아닌 필수다.
<킹콩을 들다>를 5번도 넘게 본 이유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은 선수의 부모는 지방자치단체나 학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물론 지자체 등으로부터 일정 금액을 지원받는다 해도 비용의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달 30일 있었던 같은 대회 초등부 경기에서 중위권 이상의 성적을 거둔 한 선수는 지자체로부터 생계비 일부를 지원받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 가족이었다. 어머니 김명희(가명·50)씨는 “시에서 장비를 사주고 경기복 일부를 지원받는데도 재즈나 발레 수업은 따로 가르쳐야 한다. 평균적으로 월 50만원 정도 든다.”며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일반학교 체조부에서 운동을 배우고 있다는 신수정(사직여중1) 선수의 어머니 김연옥(46)씨도 지자체 지원이 없으면 리듬체조를 계속할 수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영화 <킹콩을 들다>를 5번도 넘게 봤어요. 영화에 나오는 가난한 시골학교 역도부 아이들이랑 우리 애들이 너무 비슷해서…, 교육청에서 학교 리듬체조부 없애자고 할 때 정말 힘들었어요.”
매트 위에서 다시 리본이 춤을 췄다. 노란 물결 위로 얼굴을 내민 선수가 씽긋 웃었다. 이번 대회 중등부 1위를 한 국가대표 천송이(오륜중3) 선수의 리본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 출신 이경화(24)씨의 박수 소리가 커졌다. “저희 때보다 애들 실력이 정말 좋아졌어요.” 이씨는 후배들을 대견해했다. 경기를 마치고 만난 천 선수는 “리듬체조 선수들은 매트 위에서 손을 많이 써서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고 습진에도 종종 걸린다”며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같은 대회에서 3위를 한 국가대표 이나경(광장중1) 선수도 박지성 선수같이 상처난 발이 콤플렉스다. “여름에 샌들을 신으면 사람들이 발만 보는 것 같아 민망하다”며 몸을 배배 꼬았다.
“지금 연재 언니는 10등 안에만 들어도 대단한 거잖아요. 저는 3위 안에 들고 싶어요.” 양구에서 만난 모든 선수들이 ‘포스트 손연재’를 꿈꿨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 출전해 메달을 따겠다는 선수들의 목표가 손연재 선수와 같았다.
양구/글·사진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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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체조부, 수도권에 몰려
지방 통틀어 각각 대여섯곳
당구, 탁구, 골프장은 많은데
체조경기장이 안 보여요
코치를 만나기도 어려워요
송희 코치가 이다솜 선수의 화장을 고쳐주고 있다.
모이세예바 스베틀라나 코치와 김한솔 선수.
이나경 선수(왼쪽)와 천송이 선수가 경기를 마치고 쉬고 있다.
경기장 구석에 놓인 수구. 보통 후프와 곤봉은 테이핑을 해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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