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승부
“당신 제자니 데려가라.”
지금은 고인이 된 양희태 전 한국전력 감독이 1996년 신영철 세터에 대한 이적동의서를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에게 써주며 건넸던 말이다. 신치용 감독은 1995년까지 한국전력 코치로 있으면서 신영철 세터를 선수로 관리해왔다. 그런데 실업배구 삼성화재가 세터 신영철을 데려가자 현대자동차써비스가 트레이드의 적법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대한배구협회의 회장사이기도 했던 한국전력의 전횡이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이 논란으로 애틀랜타올림픽을 마치고 1996년 8월12일자로 삼성화재에 입단한 그는 ‘1년 자격정지’의 불이익을 당하게 됐다. 신영철 감독은 “당시엔 이런 주장도 통하던 때였다”고 했다. 이에 앞서 신영철 감독은 경기대를 졸업한 뒤 신치용 감독이 당시 코치로 있던 한국전력에 1989년 입단한다. 그러니 둘의 ‘한솥밥’ 인연은 1989년 한전부터 시작해 1996년 삼성화재로 이어졌고, 2004년 신영철 감독이 엘지(LG)화재 감독으로 떠날 때까지 15년이나 계속됐다.
신치용 감독은 1995년 삼성화재 배구단 창단 사령탑으로 첫 지휘봉을 잡은 뒤 16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창단 데뷔 해부터 실업리그 최고 무대인 슈퍼리그 초유의 8연속 우승, 프로배구 V리그 4연패(2008~2011) 및 통산 5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의 승률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실업팀 슈퍼리그 91.9%, 프로 V리그 78.1%, 평균 83.2%에 이른다. 성지공고와 성균관대 시절 선수로서 빼어난 면모를 나타내지 못했지만 지도자로서는 정반대다. 배구감독이 삼성그룹 전무까지 승진하게 된 것도 신 감독만의 독특한 이력이 됐다.
신치용 감독은 삼성화재로 가기 전인 1991년부터 1994년까지 국가대표 코치로도 활약했다. 이때 감독 3명이 교체됐지만 당시 신치용 코치는 그대로 남을 정도의 실력파였다.
그런 신치용 감독 밑에 신영철 감독이 그림자처럼 15년을 함께 생활했다. 경북사대부고를 나와 경기대를 졸업한 신영철 감독은 경기대 시절부터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정도로 선수(세터)로서 활약을 떨쳤다. 한국이 처음 출전한 1990년 월드리그에서 그는 세계 강호들과의 경쟁 속에서 세터상을 받아 일약 국제적인 명성도 얻었다. 김호철-신영철-최태웅을 잇는 한국 세터 계보에 그의 이름은 함께한다.
플레잉코치로 삼성화재에 입단한 뒤 신치용 감독을 보좌하며 삼성화재의 슈퍼리그 8연승을 눈앞에 뒀던 2004년 2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엘지에서 감독 제의가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새로운 도전이다. 떠나라. 다만 ‘감독은 외롭다’는 것을 잊지 말고 이겨내라.”
선수로 화려했지만 초보 감독은 실패였다. 실업팀 엘지화재 감독을 맡았다가 임기 1년을 남겨놓고 꼴찌로 추락한 뒤 2007년 팀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에게 실패란 두번 필요하지 않았다. 대한항공 감독을 맡아 두 시즌 만에 팀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올해 정규리그 2위를 기록하며 신치용 감독과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권오상 기자 k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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