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7일 오후 전주체육관, 프로농구 케이씨씨(KCC)-동부 경기 현장. 전날 밤 12시까지 함께 술잔을 나눴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허재(오른쪽)·강동희 감독의 표정엔 날이 서 있다.
[토요판] 승부 / 허재 vs 강동희
케이씨씨(KCC)와 동부의 프로농구 경기(4라운드)를 하루 앞두고 있던 지난 1월6일 오후 전주체육관. 동부 선수들이 벤치에서 무릎과 발목 등에 테이핑을 하면서 훈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부의 간판스타 김주성 선수와 주장 황진원 선수 등이 취재진을 반겼다. “허재 감독과 강동희 감독 취재하러 왔다”고 하자, 몇몇 선수가 웃음 띤 얼굴로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세요. 언제까지 감독님들만 찾으실 거예요.”
정말 그랬다. 현역 선수 시절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허재(47) 케이씨씨 감독과 강동희(46) 동부 감독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고 배가 나온 중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다. 허 감독은 “나를 아직도 현역 선수로 아는 사람도 있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허 감독의 유머에 강 감독이 껄껄 웃었다. 그러더니 강 감독은 “형, 나는 중앙대 학생으로 알아”라고 맞받았다. 강 감독의 재치에 허 감독 역시 배꼽을 잡았다.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죽이 척척 맞는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둘의 찰떡궁합이 어쩌면 아직도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4강 플레이오프에선 만나기 싫어~”
동부 선수들의 훈련이 시작됐다. 강 감독은 케이씨씨 하승진 선수에 대비해 선수들한테 이것저것을 주문했다. 하 선수는 키 2m21로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가장 키가 큰 농구선수다. 관중 없는 텅 빈 전주체육관에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가 메아리쳤다. 주전 선수 5명이 조끼를 입은 후보 선수 5명과 실전처럼 몸을 부대꼈다. 강 감독이 나섰다. “하승진이 들어오면 이렇게 하고, 2 대 2 공격은 이렇게 하란 말이야.”
강 감독은 마음이 급했다. 동부는 이때까지 28승7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2위 인삼공사(25승9패)에 바짝 쫓기고 있었다. 아무리 ‘허재 형’이 이끄는 팀이지만 다음날 케이씨씨와의 승부는 결코 물러설 수 없는 한판이었다.
케이씨씨는 더 급했다. 케이티(KT)와의 3위 다툼에서 조금 밀리면서 21승13패로 4위를 기록중이었다. 이대로 순위가 굳어진다면 4강 플레이오프에서 ‘최강’ 동부를 만날 가능성이 높다. 허 감독으로선 3위를 차지해 동부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6강 플레이오프에선 4-5위전 승자가 1위와 맞붙고, 3-6위전 승자가 2위와 대결한다.)
두 시간 가까운 동부의 훈련이 끝난 뒤 강 감독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 어디예요?” 허 감독이었다. 강 감독은 허 감독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두 감독은 정규리그 여섯 경기를 치르면서 세번은 원주(동부의 연고지)에서, 세번은 전주(케이씨씨의 연고지)에서 경기 전날 언제나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진이 형, 창진이 형, 도훈이, 재학이 형 등등하고는 여섯번 중에 한두번 먹는데 허재 형하고는 여섯번 다 먹어요.”
김진 감독(엘지), 전창진 감독(케이티), 유도훈 감독(전자랜드), 유재학 감독(모비스) 등 경기 전날 다른 팀 감독들과의 저녁 자리 횟수가 허 감독과는 다르다는 얘기다. 동부와 케이씨씨 선수단 숙소는 똑같이 전주 ㄹ호텔이다. 프로 스포츠에서 맞상대가 같은 숙소를 쓰는 일은 매우 드물다.
두 감독은 이날 저녁 ㄹ호텔 중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마침 텔레비전에서는 2위 인삼공사와 3위 케이티의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중계방송을 바라보는 두 감독은 동상이몽이었다. 인삼공사를 떨쳐내고 1위를 해야 하는 강 감독은 케이티가 이기길 바랐다. 반면 허 감독은 케이티가 져야 3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승부는 엎치락뒤치락 팽팽했다. 두 감독은 장기판 훈수 두듯 간간이 관전평을 내뱉었다. 마침내 케이티가 72-66으로 이겼다. 강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동희야! 네가 술 사라.”(허 감독)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건 안 되죠. 원정팀인데….”(강 감독)
허 감독이 껄껄 웃었다. 그는 “솔직히 다른 팀한테 졌을 때보다 동희(동부)한테 지면 마음은 편하다”고 했다. 허 감독의 덕담이 이어졌다.
“동희야! 부담 갖지 마. 조금만 더 하면 무조건 우승이야.”
허 감독은 “이제 감독 3년차인데도 여유가 있고,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며 강 감독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강 감독이 몸을 낮췄다.
“형, 무슨 소리. 재학이 형, 창진이 형, 그리고 형 정도는 돼야지 난 아직 멀었어요.”
술잔이 돌고 밤이 깊어갔다. 두 감독한테 ‘술’은 빼놓을 수 없는 매개체다. 허 감독은 “선수 시절엔 먼동이 틀 때까지 마셨다. 다음날 시합이 있는데도 그랬다”고 했다. 강 감독도 “그때는 새벽 4시도 좋고, 6시도 좋았다. 형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셨다”고 했다. 소문난 ‘주당’ 덕분에 둘은 술 광고도 함께 찍었다.
잘 알려진 대로 허 감독은 술 때문에 ‘사고’도 많이 쳤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강 감독은 ‘사고의 현장’에 없었다. 그는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허재 형이 음주사고 칠 때는 난 항상 빠졌다”며 웃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때 농구대표팀 음주 파문 때도 그랬다. 강 감독은 당시 주장을 맡아 감독과 한방을 쓰느라 숙소 이탈에 동참할 수 없었다. 허 감독은 “사고를 많이 친 건 사실이지만 구차하게 핑계 대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 실제보다 더 확대된 경우도 많다”고 했다.
술자리는 정확히 밤 12시에 끝났다. 두 감독은 “밤 12시를 넘기는 일은 없는데 오늘은 옛날 얘기 하느라 좀 길어졌다”며 웃음지었다.
심판에게 항의 말자? 짜고 치냐 재미없다?
다음날(1월7일) 아침, 동부와 케이씨씨 선수들은 한 시간씩 전주체육관에서 몸을 풀었다. 오후 3시 경기를 앞둔 마지막 점검이었다. 두 감독도 훈련을 마친 뒤 숙소에서 정장으로 갈아입고 결전의 시간을 기다렸다. 다시 전주체육관에 도착한 둘은 케이씨씨 선수단 버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잡담’을 나눴다. 경기 시작 직전 라커룸에서 선수단 미팅이 끝나자 강 감독이 허 감독의 라커룸으로 찾아왔다. 40분 뒤 코트에서 ‘적장’으로 만날 사이인데도 둘은 틈만 나면 붙어 있었다. 둘을 본 최형길 케이씨씨 단장이 “너네 둘이 양복도 똑같이 맞춰 입었니? 재질이 똑같아 보인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두 감독의 양복도 비슷했다.
둘 사이의 그 무엇이 서로 잠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게 하는 걸까?
“동희요? 착하잖아요. 재밌고요. 동희랑 있으면 편해요. 동희가 없었다면 내 농구 인생도 지금보다 훨씬 재미없었을 거예요.”(허 감독)
“형은 인간미가 있어요. 특히 후배들을 잘 챙겨주죠. 형은 내 농구 인생의 롤모델이었죠. 형이 없었다면 농구 선수로 대성하지 못했을 거예요.”(강 감독)
경기 시간이 임박했지만 라커룸에 나란히 앉은 둘 사이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마침내 경기 시간 15분 전이다. 두 감독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찔러 넣은 뒤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 찬 코트로 들어섰다. 동부와 케이씨씨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다. 동부는 수비가 강해 평균실점이 가장 적고, 케이씨씨는 최강의 공격력으로 득점이 가장 많은 팀이다.
경기장 입장권은 매진됐다. 토요일인데다 빅매치였다. 경기 내내 끌려가던 케이씨씨가 3쿼터에 힘을 내자 경기장 열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키 2m, 몸무게 100㎏이 넘는 육중한 몸들이 둔탁하게 부딪쳤다. 관중석의 함성과 코트의 거친 숨소리에 두 감독의 지시는 마치 ‘절규’ 같았다.
결국 승부는 동부의 70-65 승리로 끝났다.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인터뷰실에 들어온 두 감독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 허 감독은 노타이 와이셔츠 차림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질문에 한두마디 답한 뒤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이어 강 감독이 들어왔다. 그는 “경기 끝나고 지는 쪽에서 먼저 전화한다”며 “아마도 형한테 축하 전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이번 시즌에는 강 감독의 동부가 선두를 질주하고 있고, 케이씨씨와의 맞대결에서도 4승1패로 앞서 있다. 하지만 강 감독은 허 감독한테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다”고 했다. 두 감독은 중앙대 졸업 이후 지금까지 세차례 ‘적’으로 만났고, 승자는 언제나 허 감독이었다.
첫 대결은 1991년 1월2일에 열린 농구대잔치 1차 대회 결승전이었다. 당시 상무에서 제대를 앞둔 말년이던 강동희는 친정팀 기아와 맞붙었지만 허재를 넘지 못했다. 강동희는 2차 대회 이후 기아에 복귀했다.
두번째 대결은 프로농구 2002~2003 시즌 4강 플레이오프. 강 감독이 엘지(LG), 허 감독이 티지(TG) 유니폼을 입고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티지가 1, 2차전을 이겨 기선을 제압했지만 엘지가 3, 4차전을 이겨 승부를 마지막 5차전으로 몰고 갔다. 엘지는 전반 한때 18점 차까지 앞서며 챔피언결정전 진출을 눈앞에 두는 듯했다. 그러나 허재를 앞세운 티지는 막판 대반격에 성공해 기어이 83-75로 이겼고, 결국 그해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세번째 대결은 지난해 4월 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이다. 결전을 앞두고 강 감독은 “지금까지 허재 형을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는데 이번엔 그 벽을 넘어보겠다”고 결의를 밝혔다. 허 감독은 “챔피언전이 끝날 때까지 당분간 인연을 끊자”고 했다.
강 감독의 동부는 예상을 뒤엎고 1차전과 3차전을 승리하며 앞서 나갔다. 허 감독의 케이씨씨는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그러나 케이씨씨가 4, 5, 6차전을 내리 이기면서 다시 승자는 허 감독이 됐다.
32년 동안 변함없는 우정을 이어가고 있지만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관계가 소원해질 때도 없지 않았다. 강 감독은 “항상 사이가 좋았던 것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둘 사이가 가장 서먹했던 때는 1997년 프로농구 챔피언전 때다. 둘이 소속된 기아는 우승을 차지했지만 둘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렸다. 강동희는 챔피언전에서 펄펄 날며 프로농구 원년 최우수선수(MVP)의 영광을 안았다. 반면 허재는 당시 최인선 감독과의 불화로 벤치에 앉아 자신을 비추는 카메라를 향해 멋쩍은 웃음만 지어야 했다. 둘 사이엔 말이 없었고 미묘한 감정이 흘렀다.
지난 시즌 챔피언전 때도 하마터면 둘 사이에 금이 갈 뻔했다. 예상을 뒤엎고 강 감독의 동부가 앞서 나가자 자존심 강한 허 감독이 절치부심했다. 챔피언전 시작 전 “심판에게 항의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두 감독을 두고 일부 언론에선 “짜고 치냐. 재미없다”며 전투심을 부추겼다. 그런데 두 감독은 4차전까지 2승2패로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강 감독은 “허재 형이 4차전까지 삐쳐 있었다”고 놀려댔다. 허 감독은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사실 3차전에서 진 허 감독은 4차전을 앞두고 원주 치악체육관에서 먼저 훈련을 마친 뒤 강 감독을 기다렸다. 그는 “내가 그냥 가버리면 동희가 또 삐친 줄 알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강 감독은 1점 차로 승패가 갈린 5차전에서 심판의 애매한 판정에도 깨끗이 승복하면서 허 감독에게 축하의 악수를 건넸다.
추격과 역전, 그러나 전태풍의 5반칙 퇴장
두 감독은 1월7일 ‘전주대첩’이 끝난 지 정확히 보름 뒤, 이번에는 ‘원주대첩’을 앞두고 저녁 술상 앞에 마주 앉았다. 두 팀의 5라운드 맞대결을 하루 앞둔 1월21일 저녁, 언제나 그렇듯이 농구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강 감독이 먼저 “살 좀 빼야겠다”고 했다. 허 감독은 “젓가락이 계속 쉬지 않는데 어떻게 살을 빼느냐. 먹는 것부터 줄이라”고 놀려댔다.
다음날, 경기를 앞두고 두 감독은 자신의 라커룸을 지켰다. 전주 경기 때와 달리 상대 라커룸을 찾아가지 않았다. 이유는 엉뚱하게도 “멀어서”였다.
“상대팀 라커룸에 가려면 체육관 반 바퀴를 돌아야 해요.”(강 감독)
“전주는 열 발짝만 움직이면 되는데, 여긴 너무 멀어요.”(허 감독)
원주 치악체육관 역시 설 연휴를 맞아 빅매치를 보려는 관중들로 통로까지 가득 찼다. 이날 경기엔 케이씨씨 하승진 선수가 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코트 위 선수들뿐 아니라 벤치의 지략 대결도 불꽃을 튀겼다. 초반엔 예상대로 동부가 16-4, 21-7로 크게 앞서갔다. 이때 허 감독이 작전시간을 요청하더니 빠른 선수들을 내보냈다. 작전은 주효했다. 날쌘 가로채기와 3점슛으로 성큼성큼 추격하더니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다. 눈동자 굴리기도 바쁠 만큼 빠른 공수 전환 속에 3점슛까지 펑펑 터지자 경기장 열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케이씨씨 ‘빠른 농구’의 핵심 전태풍 선수가 4쿼터 초반 5반칙으로 퇴장당했고, 경기는 급격히 동부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동부의 85-78 승리.
그런데 허 감독의 표정이 밝았다. 그는 경기가 끝난 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강 감독과 동부 코치들에게 “수고했어”라는 말과 함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 강 감독 역시 “형! 수고하셨어요”라고 화답했다.
“전태풍 선수가 5반칙으로 퇴장당해 이길 수 있었어요. 내용적으로는 허재 형이 이긴 경기예요.” ‘승장’ 강 감독이 몸을 낮췄다. “허재 형이 준비 많이 했더라. 하승진 선수가 빠졌지만 잘 연구해서 전술 잘 짜서 나왔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고 다음에는 더 좋은 경기하셨으면 좋겠다.”
올해는 강 감독이 허 감독을 처음 넘어설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케이씨씨도 호락호락한 팀은 아니다. 두 감독의 정규리그 마지막 6번째 맞대결은 2월18일 전주에서 펼쳐진다. 4강 플레이오프나 챔피언전에서 만나지 않는다면 이번 시즌 마지막 맞대결이다.
코트 안에선 언제나 뜨거운 승부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에 앞서 전날 저녁엔 두 감독의 술잔이 먼저 부딪친다. 32년 긴 세월을 함께한 인생의 동반자, 농구의 동반자가 나누는 술잔이다. 그 술잔엔 승패보다 훨씬 더 소중한 두 사람의 우정이 담겨 있다.
▶ 한판의 승부는 인생의 축소판입니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있습니다. 기뻐 날뛸 수도, 극도의 좌절감에 쪼그라들 수도 있습니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엎치락뒤치락’은 희로애락을 골고루 맛보게 해줍니다. ‘승부’는 종목을 가리지 않습니다. 유명과 무명을 가리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전주·원주/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중앙대 시절, 이젠 말할 수 있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32년 전, 1980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용산중학교 3학년 허재는 신문 스포츠면에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인천 송도중학교 1학년 강동희는 벤치에서 허재의 경기를 지켜봤다. 강동희 감독은 “그때 허재 형 모습이 생생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러나 허재 감독은 “정말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둘이 다시 만난 것은 그 뒤 3년이 지나서였다. 1983년 8월, 당시 고교농구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쌍용기대회 결승전이었다. 용산고 3학년 허재는 이미 전국구 스타였다. 이민형(현 고려대 감독), 한만성(작고)과 함께 고교 무대를 평정했다. 중학교 때 2년 동안 농구를 그만두고 송도고에서 다시 시작한 강동희는 무명이었다. 그러나 경기는 뜻밖에 접전이었다. 용산고가 8점 차로 이기고 우승했지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강동희는 이 대회를 계기로 처음 이름을 알렸다.
둘이 ‘절친’이 된 것은 다시 3년이 흐른 뒤였다. 1986년 초, 중앙대 3학년 허재는 신입생 강동희가 마냥 귀여웠다. 그는 “어디 갈 때 언제나 동희를 데리고 다녔다”고 회상했다. 강동희 역시 허재를 잘 따랐다. 그 이유를 강 감독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마도 성격이 반대라서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저는 순진했지만 형은 속된 말로 발랑 까졌었죠. ㅋㅋ”
활달하고 외향적인 허재와 차분하고 조용한 강 감독은 그림자처럼 붙어다녔다. 둘이 술 마시다가 밤이 깊어지면 서울 논현동에 살던 허재는 집이 인천이던 강동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곤 했다. 허 감독은 “늦게 귀가해서 화가 난 아버지는 삽을 들고 쫓아오다가도 동희를 보면 ‘일단 자!’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동희 덕분에 ‘면피’할 때가 많았다”며 껄껄 웃었다.
강동희는 허재의 집에 갈 때마다 옷이 하나씩 생겼다. 강 감독은 “허재 형은 유명 브랜드의 청바지와 점퍼 등이 많았는데 형 집에 갈 때마다 형 옷을 많이 빼앗아 입었다”며 웃음지었다. 허 감독은 “동희는 정말 꾸밀 줄 몰랐다. 옷도 아무렇게나 입고 다녔다”고 추억했다.
허재와 강동희는 중앙대 시절부터 찰떡궁합이었다. 84학번 허재는 김유택, 한기범 등과 함께 연세대와 고려대가 양분하던 대학농구 판도를 뒤바꿔놓았다. 강동희(86학번)가 입학한 뒤에는 ‘허동택 트리오’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유택마저 졸업한 1987년에는 허재가 센터, 강동희가 가드를 맡아 호흡을 맞췄다. 성균관대를 상대로 137점을 넣은 일도 있었다.
특히 허재는 1987년 10월5일 가을철 대학농구연맹전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혼자 75점을 넣는 믿기지 않는 기록을 세웠다. 더욱 놀랍게도 전반에 팀이 기록한 54점을 혼자 넣었다. 게다가 일방적인 경기가 아니라 99-97의 극적인 역전승이었다. 이 기록의 숨겨진 비밀을 강 감독이 털어놓았다.
“이충희 선배가 세운 한경기 최다 득점 69점 기록을 허재 형한테 밀어줘서 한번 깨보자고 의기투합했죠. 그래서 허재 형한테만 기회를 줬어요.”(하지만 이 기록은 정확히 열흘 뒤 당시 기업은행 최철권 선수가 전국체전에서 97점을 올리면서 깨졌다.) 전주/김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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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7일의 승부는 동부의 70-65 승리로 끝이 났다. 케이씨씨(파란 유니폼)는 3쿼터에 반전을 노렸으나 실패했다.
환호와 함성으로 가득 찬 코트로 들어서는 순간. 1월7일의 전주체육관 경기입장권은 매진됐다.
1월6일 밤 술자리에서 러브샷 직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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