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 시절 임달식 감독의 제자였던 강양현 부산 중앙고 감독은 “부산에서 보름 동안 전지훈련을 할 때였는데 전지훈련을 도와주신 분들과 거의 매일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면서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코트에 나타났다. 어느날 아침엔 이단줄넘기 500개씩을 했는데 줄넘기를 마친 뒤 저를 보고 ‘너 12개 모자란다’고 지적해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임 감독과 신한은행 선수들이 연습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여자농구 4연패’ 임달식 신한은행 감독
임달식(47). 한때 포털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을 치면 관련 검색어로 ‘허재’가 떴다.
21년 전의 일이다. 1989년 3월3일 부산 사직체육관. 현대와 기아의 농구대잔치 결승전 열기는 뜨거웠다. 경기 시작 4분56초 만에 기아의 허재(현 전주 KCC 감독)가 현대의 왼쪽 골밑을 파고들다 자신을 악착같이 막던 임달식의 팔꿈치에 맞아 쓰러졌다. 벌떡 일어난 허재는 임달식의 이마를 들이받았고, 임달식의 주먹이 허재의 턱을 강타했다. 마침 이 장면은 텔레비전으로 전국에 생생히 중계됐다. 이 사건으로 임달식은 자격정지 1년을 받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팀에 복귀한 뒤에도 자꾸만 폭행사건이 거론되며 자존심을 건드렸고, 결국 서른도 안 된 젊은 나이에 변변한 은퇴식도 치르지 못한 채 코트를 떠났다.
농구팬들에게 까마득히 잊혀졌던 임달식이라는 이름이 다시 등장한 것은 2007년 2월이다.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프로농구 신인드래프트. ‘조선대 감독 임달식’은 제자들의 프로팀 진출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리고 마침내 조선대 농구부 역사상 처음으로 프로선수를 2명이나 배출했다.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그해 7월 공개모집한 여자프로농구 안산 신한은행 사령탑에 당당히 올랐다. 그리고 지난 4월6일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4연패를 동시에 달성한 최초의 감독이 됐다. 오는 11월에는 태극마크를 달고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해 여자농구 금메달에 도전한다.
휘문고·고대·현대전자 시절 허재와 대척점
농구장 폭력사건 뒤 코트떠나 사업 ‘방황’
“그땐 너무 힘들어 이민가려고 짐까지 싸” 하루 팬레터 수십통…꽃미남 농구선수 임달식은 서울 공덕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만졌다. “담임선생님이 학교 농구부 감독이었어요. 키가 작았는데 피구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농구 한번 해볼 테냐고 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죠. 그게 제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맨땅에서 하는 농구였지만 소년 임달식은 “겨울엔 쌓인 눈을 치워가며” 농구의 재미에 푹 빠졌다. 수도중학교에 진학해선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중3 때는 소년체전 우승 욕심이 컸던 감독 때문에 1년을 ‘꿇었다’. 당시 운동선수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휘문고 1학년 때는 키도 부쩍 자랐다. 2학년 때부터 1년 후배인 용산고의 허재와 운명처럼 맞붙었다. “저와 허재가 라이벌이라기보다 학교가 라이벌이었죠.” 당시 용산고와 휘문고는 숱하게 결승에서 만났다. 허재, 이민형, 한만성의 용산고와 임달식, 윤창호, 이완규의 휘문고간 대결은 장안의 화제였다. 허재의 전담 마크는 늘 수비가 좋은 임달식의 몫이었지만, 우승은 언제나 용산고와 허재의 차지였다. 대학(고려대)과 실업(현대전자)에서도 허재(중앙대-기아자동차)와는 대척점에 섰다.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지만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농구대잔치에서 만나면 죽기살기로 으르렁댔다. 임달식은 귀공자 같은 곱상한 외모로 허재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한창 잘나갈 땐 하루 팬레터가 수십통씩 오곤 했죠.” 하지만 그의 인기를 시샘이라도 하듯 뜻하지 않은 코트 폭력 사건이 터졌고, 그 이후 그가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끝내 못 이룬 프로골퍼의 꿈 농구라면 진저리가 났다. “캐나다로 이민 가려고 짐까지 다 쌌어요.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해 포기했죠.” 농구판과는 인연을 끊고 1993년 서울 가락동에 레스토랑을 차렸다. 그 음식점에 골프선수들이 자주 찾아왔다. “바로 앞에 커다란 골프연습장이 있어서 최광수, 유종구, 이준영 같은 프로골퍼들이 많이 왔어요.” 골퍼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골프 클럽을 잡았다. 그런데 골프 입문 6개월 만에 싱글을 쳐버렸다. 슈터 출신답게 손맛이 살아 있었다. 제2의 인생을 골프에 걸었다. ‘머리를 올린 지’ 2년7개월 만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세미프로 자격증을 땄다. 4언더파 68타를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프로골퍼가 되기 위해 정식 프로 입문 테스트에 나섰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꼭 한두 타 차이로 떨어지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실력은 정체되고 돈은 떨어지고 암담했습니다.” 시련은 끝이 없었다. 1997년 당장의 생계를 위해 빚까지 얻어 한정식집을 냈는데 8개월 만에 구제금융(IMF) 사태가 닥쳤다. “주 고객이 중소기업 사장들이었는데, 여기저기 부도가 나는 판이니 장사가 될 리 없었죠.” 그와 아내(김경란)그리고 딸(효정)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제2의 모교 조선대와의 만남 2001년 7월 어느날. 그날도 필드에서 골프공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았다. 계속 받지 않으니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오늘 면접 보러 오지 않으면 감독 제안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광주의 조선대에서 온 문자였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 때문에 이미 스코어는 엉망이 됐다. 기권을 하고 골프장을 빠져나와 부리나케 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안되는 골프 때문에 방황하자 지인들은 농구판으로 돌아오라는 조언을 했다. 고려대 시절 스승 박한 감독이 특히 그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리고 농구공을 손에서 놓은 지 거의 10년 만에 ‘조선대 감독’으로 그는 다시 코트를 밟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열등감에 시달리는 10명 남짓한 선수와 해진 농구공 3개가 전부였다. “일주일만 있는 척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죠.” 수도권 소재 대학에 스카우트되지 못한 선수들은 깊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2부 리그에서도 3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목표를 잃어버린 선수들은 때로는 차가웠고, 때로는 거칠었다. “정말 다루기 힘들었다”고 그는 그때를 회고했다. 임 감독은 결심했다. “그래 도덕교사가 되자!” 선수들에게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졌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했다. 선수들과 똑같이 코트에서 땀을 흘렸고, 체력훈련을 소화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너희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너희들이다. 영화를 봐라. 주인공은 끝까지 안 죽는다. ○○○! 너 죽지 않았어!”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웠다. 생활도 선수들과 함께 했다. 숙소에서는 아예 한덩어리가 됐다. 직접 밥을 짓고 음식을 만들어 선수들과 함께 먹었다. 여러 반찬을 쓸어넣어 볶아 먹는 ‘임달식표 잡탕밥’은 선수들에게 일품 소리를 들었다. 언제부턴가 선수들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 꼴찌들의 즐거운 반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선수들의 몸은 가벼워졌고, 톱니바퀴 은 조직력으로 무장됐다. 그해 3월 첫 대회에서 바로 2부 리그 정상에 올랐다. 부임한 지 불과 8개월 만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선수들이 이기는 맛을 느낀 거죠.” 강양현, 최고봉, 남정수 등 무명 선수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우승, 우승, 또 우승. 어느새 2부 리그엔 적수가 없었다. 이따금 1부 리그에 속한 강호들을 격파하는 파란도 일으켰다. 2004년 농구대잔치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마침내 이듬해 1부 리그로 승격됐다. 대학농구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부 리그엔 또다른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2부 리그 출신 주제에…’라는 멸시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ㄷ대와 ㅅ대한테는 2년 반 동안 한번도 지지 않았다. 전국대회 6강에 든 적도 있었다. 2005년 전국체전에서는 결승까지 올라 방성윤, 이정석, 김태술, 양희종 등 스타군단 연세대와 ‘맞짱’까지 떴다. 비록 10여점 차이로 지긴 했지만 조선대로선 우승 같은 준우승이었다. 그해 슈터 강양현이 인천 전자랜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조선대 출신 최초의 프로선수였다. 그리고 2007년 2월, 최고봉이 모비스에, 남정수가 부산 KTF에(현 KT)에 지명을 받는 기적을 일궈냈다. 2부리그 조선대서 ‘꼴찌들의 반란’ 이끈뒤
신한은행 맡아 고공행진 ‘태극마크’ 달아
“중국 꺾고 아시아경기 금메달 찾아와야죠” 신한 전성시대 이끈 ‘미스터 9할’ 2007년 봄, 신한은행 여자프로농구단에서 감독을 공모했다. 신한은행은 전주원, 정선민, 하은주 등 스타 선수들이 많아 ‘레알 신한’으로 불렸다.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에 빗댄 말이다. 누구든 감독만 되면 우승은 ‘떼논 당상’으로 여겼다. 족히 20~30명의 농구인이 응모했다. 남자프로농구 감독을 지낸 이도 있었다. 최초의 여성 감독이 탄생할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새 사령탑의 주인공은 임달식 감독이었다. 농구 불모지 조선대를 1부 리그로 끌어올린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여자농구 ‘초짜’가 과연 베테랑 선수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선수들은 마치 이제 막 전입 온 소대장을 길들이는 고참 사병들 같았다. “기싸움이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게 있었죠.” 선수들이 ‘달봉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수군거려도 애써 모른척했다. 한달여쯤 지났을 때 수원 광교산으로 단합대회를 갔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다. 임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시련은 이런 폭우처럼 언제 닥칠지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강팀이라도 정상에 오르려면 뜻하지 않는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곧바로 이어진 광주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악바리 주부선수 전주원조차 “30년 가까이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감독을 접해봤지만 이렇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지도자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2007년 10월29일, 마침내 임 감독의 프로 첫 데뷔전이 열렸다. 상대는 부천 신세계였다. 연장전까지 가서 1점차로 이기는 진땀나는 신고식을 치렀지만 그 뒤 임 감독은 승승장구했다. 29승6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내친김에 플레이오프도 전승으로 마감하며 챔피언에 올랐다. 그런데 신한은행의 독주를 시샘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신한은행 때문에 여자농구 재미가 없다”, “그 멤버 가지고 누가 우승 못하겠느냐”는 말이었다. “정말 괴로웠습니다. 여자농구판의 죄인이 된 기분이었죠. 이겨도 죄인이고, 져도 죄인이라면 새로운 기록에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스포츠는 기록의 경기니까요.” 이듬해 임 감독의 신한은행은 37승3패, 승률 0.925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이 경이적인 승률은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다. 그에겐 ‘미스터 9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또 정규리그 23연승, 플레이오프 17연승, 특정팀 상대 25연승 등 숱한 기록을 세웠다. ‘임달식표 농구’는 이제부터 신한은행은 지난 4월 막을 내린 2009~2010 시즌에서 또다시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동시에 석권했다. 남녀를 통틀어 프로농구 사상 첫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다.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가 1986~89년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통합 우승은 1988년 한번뿐이다. 그는 “이번에도 우승하니까 비로소 주변의 말이 잠잠해졌다”고 했다. 그제야 ‘서말 구슬을 잘 꿰어 보배를 만든 감독’, ‘사공 많은 배를 강으로 잘 인도한 선장’이라고 인정했다. 신한은행이 강한 이유는 몇몇 스타 선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상으로 빠져도 진미정, 강영숙, 이연화, 김연주, 김단비 같은, 이만큼 강한 잇몸이 있다. 임 감독은 “아직 내 농구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빠르고 강한 임달식표 농구’를 완성시킬 주역들이다. 임 감독은 농구를 통해 신한은행에 ‘최강’ 이미지를 심었다. 구단은 보답이라도 하듯 임 감독을 뽑았던 신상훈 행장부터 현 이백순 행장, 심지어 노동조합까지 선수단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 시즌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한테서 프런트상까지 받았다. 그는 “구단과 궁합이 잘 맞는 것도 큰 복”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임 감독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그는 “1승에 목말라하던 조선대 시절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 여건이 좋다고 어슬렁거리는 농구는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표는 하나 더 있다. 오는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중국을 꺾고 아시아 정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인도 첸나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과 예선리그에서 접전을 펼치다가 결승전에서 허무하게 진 기억이 있다. 비시즌인 요즘에도 신한은행 선수들은 엄청난 체력훈련으로 땀을 흘리고 있다. 5연패, 6연패, 7연패를 향한 담금질이다. 임 감독이 조련한 ‘최강’ 신한은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다져지고 있었다. 인터뷰/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농구장 폭력사건 뒤 코트떠나 사업 ‘방황’
“그땐 너무 힘들어 이민가려고 짐까지 싸” 하루 팬레터 수십통…꽃미남 농구선수 임달식은 서울 공덕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만졌다. “담임선생님이 학교 농구부 감독이었어요. 키가 작았는데 피구를 잘한다는 소문을 듣고 농구 한번 해볼 테냐고 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죠. 그게 제 운명을 바꿔놓을 줄이야….” 맨땅에서 하는 농구였지만 소년 임달식은 “겨울엔 쌓인 눈을 치워가며” 농구의 재미에 푹 빠졌다. 수도중학교에 진학해선 더욱 두각을 나타냈다. 중3 때는 소년체전 우승 욕심이 컸던 감독 때문에 1년을 ‘꿇었다’. 당시 운동선수들에겐 흔한 일이었다. 휘문고 1학년 때는 키도 부쩍 자랐다. 2학년 때부터 1년 후배인 용산고의 허재와 운명처럼 맞붙었다. “저와 허재가 라이벌이라기보다 학교가 라이벌이었죠.” 당시 용산고와 휘문고는 숱하게 결승에서 만났다. 허재, 이민형, 한만성의 용산고와 임달식, 윤창호, 이완규의 휘문고간 대결은 장안의 화제였다. 허재의 전담 마크는 늘 수비가 좋은 임달식의 몫이었지만, 우승은 언제나 용산고와 허재의 차지였다. 대학(고려대)과 실업(현대전자)에서도 허재(중앙대-기아자동차)와는 대척점에 섰다.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했지만 당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농구대잔치에서 만나면 죽기살기로 으르렁댔다. 임달식은 귀공자 같은 곱상한 외모로 허재 못지않은 인기를 끌었다. “한창 잘나갈 땐 하루 팬레터가 수십통씩 오곤 했죠.” 하지만 그의 인기를 시샘이라도 하듯 뜻하지 않은 코트 폭력 사건이 터졌고, 그 이후 그가 코트에서 뛰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끝내 못 이룬 프로골퍼의 꿈 농구라면 진저리가 났다. “캐나다로 이민 가려고 짐까지 다 쌌어요. 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만류해 포기했죠.” 농구판과는 인연을 끊고 1993년 서울 가락동에 레스토랑을 차렸다. 그 음식점에 골프선수들이 자주 찾아왔다. “바로 앞에 커다란 골프연습장이 있어서 최광수, 유종구, 이준영 같은 프로골퍼들이 많이 왔어요.” 골퍼들과 어울리다가 자연스럽게 골프 클럽을 잡았다. 그런데 골프 입문 6개월 만에 싱글을 쳐버렸다. 슈터 출신답게 손맛이 살아 있었다. 제2의 인생을 골프에 걸었다. ‘머리를 올린 지’ 2년7개월 만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세미프로 자격증을 땄다. 4언더파 68타를 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프로골퍼가 되기 위해 정식 프로 입문 테스트에 나섰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꼭 한두 타 차이로 떨어지는데 정말 미치겠더라구요. 실력은 정체되고 돈은 떨어지고 암담했습니다.” 시련은 끝이 없었다. 1997년 당장의 생계를 위해 빚까지 얻어 한정식집을 냈는데 8개월 만에 구제금융(IMF) 사태가 닥쳤다. “주 고객이 중소기업 사장들이었는데, 여기저기 부도가 나는 판이니 장사가 될 리 없었죠.” 그와 아내(김경란)그리고 딸(효정)에게는 가장 힘든 시기였다. 제2의 모교 조선대와의 만남 2001년 7월 어느날. 그날도 필드에서 골프공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받지 않았다. 계속 받지 않으니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 ‘오늘 면접 보러 오지 않으면 감독 제안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광주의 조선대에서 온 문자였다. 계속 울려대는 휴대전화 때문에 이미 스코어는 엉망이 됐다. 기권을 하고 골프장을 빠져나와 부리나케 공항으로 향했다. 그가 안되는 골프 때문에 방황하자 지인들은 농구판으로 돌아오라는 조언을 했다. 고려대 시절 스승 박한 감독이 특히 그의 장래를 염려했다. 그리고 농구공을 손에서 놓은 지 거의 10년 만에 ‘조선대 감독’으로 그는 다시 코트를 밟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열등감에 시달리는 10명 남짓한 선수와 해진 농구공 3개가 전부였다. “일주일만 있는 척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가려고 했죠.” 수도권 소재 대학에 스카우트되지 못한 선수들은 깊은 패배의식에 젖어 있었다. 2부 리그에서도 3위가 최고 성적이었다. 목표를 잃어버린 선수들은 때로는 차가웠고, 때로는 거칠었다. “정말 다루기 힘들었다”고 그는 그때를 회고했다. 임 감독은 결심했다. “그래 도덕교사가 되자!” 선수들에게 내뱉은 한마디 한마디에 책임을 졌고,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했다. 선수들과 똑같이 코트에서 땀을 흘렸고, 체력훈련을 소화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수들에게 “너희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너희들이다. 영화를 봐라. 주인공은 끝까지 안 죽는다. ○○○! 너 죽지 않았어!”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웠다. 생활도 선수들과 함께 했다. 숙소에서는 아예 한덩어리가 됐다. 직접 밥을 짓고 음식을 만들어 선수들과 함께 먹었다. 여러 반찬을 쓸어넣어 볶아 먹는 ‘임달식표 잡탕밥’은 선수들에게 일품 소리를 들었다. 언제부턴가 선수들의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 꼴찌들의 즐거운 반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선수들의 몸은 가벼워졌고, 톱니바퀴 은 조직력으로 무장됐다. 그해 3월 첫 대회에서 바로 2부 리그 정상에 올랐다. 부임한 지 불과 8개월 만이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고, 선수들이 이기는 맛을 느낀 거죠.” 강양현, 최고봉, 남정수 등 무명 선수들의 반란이 시작됐다. 우승, 우승, 또 우승. 어느새 2부 리그엔 적수가 없었다. 이따금 1부 리그에 속한 강호들을 격파하는 파란도 일으켰다. 2004년 농구대잔치 2부 리그에서 우승하며 마침내 이듬해 1부 리그로 승격됐다. 대학농구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부 리그엔 또다른 장벽이 버티고 있었다. 그는 ‘2부 리그 출신 주제에…’라는 멸시와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그 와중에도 ㄷ대와 ㅅ대한테는 2년 반 동안 한번도 지지 않았다. 전국대회 6강에 든 적도 있었다. 2005년 전국체전에서는 결승까지 올라 방성윤, 이정석, 김태술, 양희종 등 스타군단 연세대와 ‘맞짱’까지 떴다. 비록 10여점 차이로 지긴 했지만 조선대로선 우승 같은 준우승이었다. 그해 슈터 강양현이 인천 전자랜드에 연습생으로 입단했다. 조선대 출신 최초의 프로선수였다. 그리고 2007년 2월, 최고봉이 모비스에, 남정수가 부산 KTF에(현 KT)에 지명을 받는 기적을 일궈냈다. 2부리그 조선대서 ‘꼴찌들의 반란’ 이끈뒤
신한은행 맡아 고공행진 ‘태극마크’ 달아
“중국 꺾고 아시아경기 금메달 찾아와야죠” 신한 전성시대 이끈 ‘미스터 9할’ 2007년 봄, 신한은행 여자프로농구단에서 감독을 공모했다. 신한은행은 전주원, 정선민, 하은주 등 스타 선수들이 많아 ‘레알 신한’으로 불렸다. 스페인 프로축구 레알 마드리드에 빗댄 말이다. 누구든 감독만 되면 우승은 ‘떼논 당상’으로 여겼다. 족히 20~30명의 농구인이 응모했다. 남자프로농구 감독을 지낸 이도 있었다. 최초의 여성 감독이 탄생할 것이란 얘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새 사령탑의 주인공은 임달식 감독이었다. 농구 불모지 조선대를 1부 리그로 끌어올린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여자농구 ‘초짜’가 과연 베테랑 선수들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선수들은 마치 이제 막 전입 온 소대장을 길들이는 고참 사병들 같았다. “기싸움이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게 있었죠.” 선수들이 ‘달봉이’라는 별명을 붙이며 수군거려도 애써 모른척했다. 한달여쯤 지났을 때 수원 광교산으로 단합대회를 갔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 옷이 흠뻑 젖었다. 임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시련은 이런 폭우처럼 언제 닥칠지 모른다. 우리가 아무리 강팀이라도 정상에 오르려면 뜻하지 않는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곧바로 이어진 광주 전지훈련에서 선수들은 입에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악바리 주부선수 전주원조차 “30년 가까이 선수생활을 하면서 많은 감독을 접해봤지만 이렇게 혹독한 훈련을 시키는 지도자는 처음”이라며 혀를 내둘렀다. 2007년 10월29일, 마침내 임 감독의 프로 첫 데뷔전이 열렸다. 상대는 부천 신세계였다. 연장전까지 가서 1점차로 이기는 진땀나는 신고식을 치렀지만 그 뒤 임 감독은 승승장구했다. 29승6패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뒤 내친김에 플레이오프도 전승으로 마감하며 챔피언에 올랐다. 그런데 신한은행의 독주를 시샘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신한은행 때문에 여자농구 재미가 없다”, “그 멤버 가지고 누가 우승 못하겠느냐”는 말이었다. “정말 괴로웠습니다. 여자농구판의 죄인이 된 기분이었죠. 이겨도 죄인이고, 져도 죄인이라면 새로운 기록에 도전해 보기로 했습니다. 스포츠는 기록의 경기니까요.” 이듬해 임 감독의 신한은행은 37승3패, 승률 0.925로 다시 정상에 올랐다. 이 경이적인 승률은 국내 프로스포츠 사상 유례없는 기록이다. 그에겐 ‘미스터 9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또 정규리그 23연승, 플레이오프 17연승, 특정팀 상대 25연승 등 숱한 기록을 세웠다. ‘임달식표 농구’는 이제부터 신한은행은 지난 4월 막을 내린 2009~2010 시즌에서 또다시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동시에 석권했다. 남녀를 통틀어 프로농구 사상 첫 4시즌 연속 통합 우승이다.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타이거즈)가 1986~89년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통합 우승은 1988년 한번뿐이다. 그는 “이번에도 우승하니까 비로소 주변의 말이 잠잠해졌다”고 했다. 그제야 ‘서말 구슬을 잘 꿰어 보배를 만든 감독’, ‘사공 많은 배를 강으로 잘 인도한 선장’이라고 인정했다. 신한은행이 강한 이유는 몇몇 스타 선수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부상으로 빠져도 진미정, 강영숙, 이연화, 김연주, 김단비 같은, 이만큼 강한 잇몸이 있다. 임 감독은 “아직 내 농구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들이야말로 ‘빠르고 강한 임달식표 농구’를 완성시킬 주역들이다. 임 감독은 농구를 통해 신한은행에 ‘최강’ 이미지를 심었다. 구단은 보답이라도 하듯 임 감독을 뽑았던 신상훈 행장부터 현 이백순 행장, 심지어 노동조합까지 선수단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지난 시즌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한테서 프런트상까지 받았다. 그는 “구단과 궁합이 잘 맞는 것도 큰 복”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임 감독은 아직도 배가 고프다. 그는 “1승에 목말라하던 조선대 시절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 여건이 좋다고 어슬렁거리는 농구는 나 자신이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목표는 하나 더 있다. 오는 11월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에서 중국을 꺾고 아시아 정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인도 첸나이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중국과 예선리그에서 접전을 펼치다가 결승전에서 허무하게 진 기억이 있다. 비시즌인 요즘에도 신한은행 선수들은 엄청난 체력훈련으로 땀을 흘리고 있다. 5연패, 6연패, 7연패를 향한 담금질이다. 임 감독이 조련한 ‘최강’ 신한은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렇게 다져지고 있었다. 인터뷰/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 |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