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올림픽 공인구. 연합뉴스
정윤수의 올림픽 이야기
올림픽이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얘기를 실제로 믿을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우선 그런 생각부터 해 보자. 만약 올림픽이 세계 평화에 실제로 기여를 한다면, 지금 베이징 도심에는 그 많은 안전장치와 경호원이 있을 이유가 없다. 상냥한 미소로 안내하는 사람만 있으면 충분할 뿐, 굳이 삼엄한 경비망을 갖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히틀러 파시즘이 강렬하고도 기이한 열정을 널리 알리는 선전 효과를 톡톡히 본 이후로 이 ‘제전’은 개최도시와 그 나라의 정치적 선전장이 된 지 오래되었다. 며칠 전 중국 신장지역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위구르 청년들의 테러가 있었고 지금 베이징은 철통 같은 방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세계 평화’와 올림픽의 아득한 거리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올림픽이 ‘친선의 장’이라는 얘기를 믿을 사람은 또한 얼마나 될까? 이 얘기도 궁금하다. 올림픽은 8일 저녁 8시에 개막한다. ‘8’은 재물이 불어난다는 뜻의 단어와 발음이 흡사하여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다. 이번 올림픽은, 적어도 개최도시 베이징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경제적 이득이 먼저 고려 대상이 되는 것이다.
중국은, 자신들을 이 정치적인 국호 대신에, ‘중화’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축구 경기에 쓰일 공인구에는 한자로 ‘중국’이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아메리카 쇼 비즈니스’의 장이었고 2004년 그리스 올림픽은 다국적 대기업의 홍보 마당이었다. 이런 일들이 올림픽이 ‘친선의 장’이라기보다는 ‘기업 홍보의 마당이요. 국가 선전의 장’임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평화’와 ‘친선’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만약 올림픽 공간에서 유일하게 그 고귀한 정신의 한순간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나는 경기장 한복판이 그 성스러운 장소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종종 경기는 경기일 뿐이고, 그 밖의 가치나 이익은 장외에서 이뤄진다고 여긴다. 각국의 정·재계 지도자들이 격식을 갖춰 담화를 나누고 다양한 인종의 관광객들이 숨가쁘게 미소를 날리는 장외의 풍경에서 이런 가치를 찾으려고 한다. 미디어는 종종 그런 장면에 근사한 음악을 깔아준다.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선수들이다. 오랜 역사와 문화에 의해 형성된 수많은 종목이 펼쳐진다. 그 종목의 원리만 제대로 이해해도 지구촌 문화를 자연스레 공부하는 셈이 된다. 선수들은 규칙의 범주 내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레슬링 선수의 일그러진 얼굴, 육상 선수의 팽팽한 근육, 체조 선수의 신중한 호흡, 양궁 선수의 무념의 경지에 오른 눈동자 그리고 모든 선수들의 몸에서 고귀하게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런 생생한 모습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삶의 유한성에 맞서 조금이라도 더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려는 숙연한 자세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평화와 친선은 바로 선수들의 소중한 몸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선수들은 그것을 맘껏 펼칠 것이고 우리는 그 몸들이 벌이는 경연을 통하여, 참담하거나 지루한 현실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발견할 차례이다. 평화와 친선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스포츠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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