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베이징올림픽 축구대표팀 골키퍼 정성룡(23·성남)이 코트디부아르전을 치른 다음 날 파주 국가대표팀 훈련장에서 회복훈련을 하고 있다
송기자·조피디의 스포츠다큐<6> ‘골 넣은 골키퍼’ 정성룡
16살때 아버지 잃고 힘든 나날
“숙소 뒤에서 남몰래 펑펑 울어”
누나는 지적장애로 재활원에 먼지가 밟고 지나갈까, 혹여 닳기라도 할까 액자에 ‘모셔둔 건’, 다시봐도 박주영 기사였다. 우리에겐 그렇게 보이는데, 엄마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박주영이 2004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과 최우수선수 2관왕을 했다는 기사네요. 아드님 이름은 한줄도 없는데.” “거기 사진에….” 어디요? 아!, 가만보니 뒷줄 오른쪽 끄트머리에 그 얼굴이 숨어 있다. 우승컵을 둘러싸고 포개진 친구들은 죄다 유니폼을 입었는데, 혼자 유니폼이 아니었다. 벤치멤버여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으나, 그래도 옷 색깔이 달라 엄마가 사진에서 아들을 찾아내기엔 좀 쉬웠던 것이다. [스포츠다큐] 정성룡, “브라보 마이 라이프” 방 한쪽 벽엔 태극마크가 붙은 등번호 1번 유니폼이 걸려있다. 고교 시절 국가대표팀 경기 때 골키퍼 김병지 뒤에서 ‘볼보이’를 하며 “나도 저랬으면” 부러워했다던 소년, 그 정성룡(23·성남 일화)의 지금 유니폼이다. 국가대표까지 겸하는 그는 이제 올림픽축구대표팀 ‘1번’ 주전 수문장 장갑을 끼고 있다. 지난달 27일 코트디부아르전에선 80m가 넘는 ‘롱킥’을 날렸는데, 그게 공격수들 머쓱해지게 선제골이 되고 말았다. ‘골 넣는 골키퍼’까지 된 것이다. 엄마는 1999년 10월14일, 제주도에 있던 16살 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급히 올라와 아빠 장례식장에 들어섰던 그 날을 얘기하는 대목부터 손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때 성룡이 보고 많이 울었지요. 걱정도 됐죠.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잘 갈까, 나쁜 길을 택하면 또 어쩌나.” 경기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정성룡을 그해 제주 서귀포중으로 데려갔던 설동식 감독은 “아버지께서 대표 선수로 키워달라 뭐 그런게 아니었고, 먹는 거 잘 좀 먹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월세 30만원짜리 집에서 살았으니, 축구부 회비도 받을 수 없었다. 지붕에 기와쌓는 일을 했던 그 아버지가 뇌 충격으로 쓰러진 지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는 공사 도중 지붕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뇌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축구부 숙소 뒤에서 아무도 없을 때 많이 울었어요. 우는 건 그때 다 운 것 같아요. 이제 내가 가장이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아직은 어렸으니, 돈은 엄마가 벌어야 했다. “미싱사도 해봤고, 애들 아빠따라 기와도 쌓고, 도배일도 하다가 예전에 했던 파출부 일을 다시 했죠. 지난해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잠시 파출부 일을 그만뒀어요. 후유증인지 날이 추우면 머리가 아프기도 해서.” ‘애들’ 아빠…, 그렇다, 정성룡에겐 두살 위 누나가 한명 있다. 조그만 체구의 누나를 만난 건 경기도 성남의 한 재활원, ‘은난초반’에서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누나는 가쁜 숨을 쉬었다. 재활원 선생님은 “식사 시간이 되면 이러세요. 지적장애 1급이시라, 말을 전혀 못 알아듣고, 보행도 휠체어를 타야 가능하시죠. 찬송가를 들으면 참 좋아하세요”라고 했다. 어렸을 때 가게에 가면 누나 먹을 것까지 꼭 챙겨왔다던 동생인데, 누나는 한번도 “성룡아”라고 따뜻하게 불러주지 못했다. “태어나 3개월 즈음에 딸이 경기를 하더니 그렇게 됐어요. 아이 11살 때 ‘엄마, 맘마’ 소리를 딱 한번 하고는, 그 말이 다시 들어가고 말았어요. 육체는 그렇지만, 영혼은 맑은 아이예요.” 출국 전 평가전 3연승을 지켜낸 정성룡은 3일 베이징올림픽 본선 D조 1·2차전이 열리는 중국 친황다오로 떠났다. 올림픽축구대표팀은 사상 첫 메달에 도전한다. “실점율을 줄여 올림픽 메달권에 진입하고, 오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는 것”이 소망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호강시켜드리겠다”는 게 그가 꼭 지켜야할 자신과의 약속이다. 중국으로 가기 얼마 전, 정성룡은 엄마에게 경기도 분당 25평 아파트를 마련해드렸다. 소풍가면 엄마 실반지라도 사왔던 아들의 선물이다. 엄마는 새벽, 오후, 저녁, 이렇게 세번 예배당에서 두 손을 모은다. “내가 할 수 있는 뒷바라지라곤 이것 밖에 없다”는 엄마는 “(운동장에서, 또 삶에서) 아들이 깊고, 넓고, 높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랑스러운 동생이지만, 소리내어 자랑하지 못했던 누나는 은난초반에서 또 하루를 보낸다. 동생이 경기하는 날, 동생을 알아볼 수 없는 누나는 대신 찬송가를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느닷없는 중거리슛처럼 아픔은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빠르게 날아 들었으나, 정성룡은 그걸 빠짐없이 막아내 ‘80m 롱킥’으로 중앙선 너머 저쪽까지 날려버렸다. 이젠 세계강호와 맞붙는 올림픽에서도 그러겠노라며, 손을 흔들고 중국으로 향했다.
글/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사진/조소영 피디 azuri@hani.co.kr
※올림픽 기간 동안 <스포츠다큐> 쉽니다
“숙소 뒤에서 남몰래 펑펑 울어”
누나는 지적장애로 재활원에 먼지가 밟고 지나갈까, 혹여 닳기라도 할까 액자에 ‘모셔둔 건’, 다시봐도 박주영 기사였다. 우리에겐 그렇게 보이는데, 엄마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박주영이 2004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과 최우수선수 2관왕을 했다는 기사네요. 아드님 이름은 한줄도 없는데.” “거기 사진에….” 어디요? 아!, 가만보니 뒷줄 오른쪽 끄트머리에 그 얼굴이 숨어 있다. 우승컵을 둘러싸고 포개진 친구들은 죄다 유니폼을 입었는데, 혼자 유니폼이 아니었다. 벤치멤버여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으나, 그래도 옷 색깔이 달라 엄마가 사진에서 아들을 찾아내기엔 좀 쉬웠던 것이다. [스포츠다큐] 정성룡, “브라보 마이 라이프” 방 한쪽 벽엔 태극마크가 붙은 등번호 1번 유니폼이 걸려있다. 고교 시절 국가대표팀 경기 때 골키퍼 김병지 뒤에서 ‘볼보이’를 하며 “나도 저랬으면” 부러워했다던 소년, 그 정성룡(23·성남 일화)의 지금 유니폼이다. 국가대표까지 겸하는 그는 이제 올림픽축구대표팀 ‘1번’ 주전 수문장 장갑을 끼고 있다. 지난달 27일 코트디부아르전에선 80m가 넘는 ‘롱킥’을 날렸는데, 그게 공격수들 머쓱해지게 선제골이 되고 말았다. ‘골 넣는 골키퍼’까지 된 것이다. 엄마는 1999년 10월14일, 제주도에 있던 16살 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급히 올라와 아빠 장례식장에 들어섰던 그 날을 얘기하는 대목부터 손으로 눈물을 찍었다. “그때 성룡이 보고 많이 울었지요. 걱정도 됐죠.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잘 갈까, 나쁜 길을 택하면 또 어쩌나.” 경기도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정성룡을 그해 제주 서귀포중으로 데려갔던 설동식 감독은 “아버지께서 대표 선수로 키워달라 뭐 그런게 아니었고, 먹는 거 잘 좀 먹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죠”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월세 30만원짜리 집에서 살았으니, 축구부 회비도 받을 수 없었다. 지붕에 기와쌓는 일을 했던 그 아버지가 뇌 충격으로 쓰러진 지 3일 만에 숨을 거뒀다. 아버지는 공사 도중 지붕에서 떨어진 후유증으로 뇌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축구부 숙소 뒤에서 아무도 없을 때 많이 울었어요. 우는 건 그때 다 운 것 같아요. 이제 내가 가장이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고요.” 아직은 어렸으니, 돈은 엄마가 벌어야 했다. “미싱사도 해봤고, 애들 아빠따라 기와도 쌓고, 도배일도 하다가 예전에 했던 파출부 일을 다시 했죠. 지난해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잠시 파출부 일을 그만뒀어요. 후유증인지 날이 추우면 머리가 아프기도 해서.” ‘애들’ 아빠…, 그렇다, 정성룡에겐 두살 위 누나가 한명 있다. 조그만 체구의 누나를 만난 건 경기도 성남의 한 재활원, ‘은난초반’에서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누나는 가쁜 숨을 쉬었다. 재활원 선생님은 “식사 시간이 되면 이러세요. 지적장애 1급이시라, 말을 전혀 못 알아듣고, 보행도 휠체어를 타야 가능하시죠. 찬송가를 들으면 참 좋아하세요”라고 했다. 어렸을 때 가게에 가면 누나 먹을 것까지 꼭 챙겨왔다던 동생인데, 누나는 한번도 “성룡아”라고 따뜻하게 불러주지 못했다. “태어나 3개월 즈음에 딸이 경기를 하더니 그렇게 됐어요. 아이 11살 때 ‘엄마, 맘마’ 소리를 딱 한번 하고는, 그 말이 다시 들어가고 말았어요. 육체는 그렇지만, 영혼은 맑은 아이예요.” 출국 전 평가전 3연승을 지켜낸 정성룡은 3일 베이징올림픽 본선 D조 1·2차전이 열리는 중국 친황다오로 떠났다. 올림픽축구대표팀은 사상 첫 메달에 도전한다. “실점율을 줄여 올림픽 메달권에 진입하고, 오래 기억에 남는 선수가 되는 것”이 소망이기도 하지만, “어머니 호강시켜드리겠다”는 게 그가 꼭 지켜야할 자신과의 약속이다. 중국으로 가기 얼마 전, 정성룡은 엄마에게 경기도 분당 25평 아파트를 마련해드렸다. 소풍가면 엄마 실반지라도 사왔던 아들의 선물이다. 엄마는 새벽, 오후, 저녁, 이렇게 세번 예배당에서 두 손을 모은다. “내가 할 수 있는 뒷바라지라곤 이것 밖에 없다”는 엄마는 “(운동장에서, 또 삶에서) 아들이 깊고, 넓고, 높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랑스러운 동생이지만, 소리내어 자랑하지 못했던 누나는 은난초반에서 또 하루를 보낸다. 동생이 경기하는 날, 동생을 알아볼 수 없는 누나는 대신 찬송가를 들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을 것이다. 느닷없는 중거리슛처럼 아픔은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빠르게 날아 들었으나, 정성룡은 그걸 빠짐없이 막아내 ‘80m 롱킥’으로 중앙선 너머 저쪽까지 날려버렸다. 이젠 세계강호와 맞붙는 올림픽에서도 그러겠노라며, 손을 흔들고 중국으로 향했다.
송기자 조피디의 스포츠 다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