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선 HL 안양 감독이 지난 1일 경기도 안양시 안양빙상장에서 선수단을 지휘하고 있다. 김창금 기자
“조민호가 생각 나 날마다 운다.”
백지선 에이치엘(HL) 안양 감독의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 옆에 있는 에이치엘 안양 단장한테 물어보니 “운다. 맞다”고 한다. 동양인 최초의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선수로 스탠리컵까지 포옹했던 ‘탱크’ 백지선 에이치엘 안양 감독. 거구의 그가 만날 운다니…. 하지만 그의 눈물에 ‘기적의 용병술’의 비밀이 있는지 모른다. 한번 인연을 맺은 선수를 사무쳐 잊지 못하는 울보 감독. 지난해 요절한 한국아이스하키 간판 조민호도 하늘에서 기뻐하지 않을까.
2018 평창겨울올림픽에서 한국 아이스하키팀을 이끈 백지선 에이치엘 안양 감독이 또 역사를 썼다. 에이치엘 안양은 지난 4일 일본에서 열린 2022~2023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도호쿠 프리블레이즈와 원정 경기 승리(5-0)로 정규리그 우승(31승9패)을 차지했다. 시즌 9번의 패배 가운데 4번이 무승부 뒤의 승부치기에서 갈린 것이어서, 에이치엘 안양 선수들의 압도적인 시즌 경기력을 짐작할 수 있다. 통산 정규리그 6회 우승.
정규 경기 일본 원정 경기를 앞두고 경기도 안양 아이스링크에서 만난 백 감독은 “우승을 하려면 다치고, 피나고, 울고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까지 달려온 것은 선수들의 열정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활짝 웃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국내 아이스하키 등록선수는 3600여명으로, 대부분 유·청소년이다. 실업팀은 에이치엘 한라가 유일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가뜩이나 선수층이 두꺼운 일본의 5개 팀은 코로나19 기간에도 정상적으로 리그를 개최하는 등 감각을 유지해 온 강팀이다. 이들을 상대로 새내기 8~9명을 가동하고, 이중국적인 골리 맷 달턴을 비롯해 전원 국내파로 정상에 올랐으니 더 돋보인다.
에이치엘(HL) 안양이 지난 4일 일본 도호쿠에서 2022~2023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정규리그 정상에 오른 뒤 기뻐하고 있다. HL 안양 제공
백 감독은 “특별히 내가 한 것은 없다. 그동안 해온 대로 반복해서 준비했다. 내가 선수들을 믿었고, 선수들은 나를 믿었다”고 했다. 기자가 “당신이 영웅”이라고 하자, 그는 “노(No), 내가 아니다. 선수들이다”라며 다시 한번 공을 돌렸다.
물론 백 감독의 촘촘한 훈련 프로그램과 리더십이 중심이 됐다. 그리고 선수들이 따랐다. 그는 “감독이나 선수 모두 디테일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것 없다.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그냥 해”라고 말하는 지도자는 자격이 없다. “조금 신경 쓰는” 지도자는 평범하다. 지도자라면 “비디오 분석, 웨이트 훈련, 휴식, 연습량, 영양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여기에 선수가 여자 친구나 가족 문제로 고민할 때는 친구가 돼 들어 주고, 함께 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에이치엘 안양과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은 조민호를 잊지 못해, 가방 키에도 조민호의 사진을 달고 다니는 것은 진정성을 보여준다. 이런 데서 “카피하지(베끼지) 않은 감독”을 신뢰하는 선수들은 똘똘 뭉친다.
2014~2022년 한국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월드챔피언십 진출(2017년), 평창겨울올림픽 선전, 일본 대표팀 추월 등 정점을 찍었던 만큼 최근 상황엔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그는 “올림픽 때 우리 유명했다. 지금은 대명도 하이원도 상무도 다 없어졌다. 이게 뭐냐. 정부부터 도와줘야 한다. 정말 슬프다”고 탄식했다. 그나마 에이치엘 안양이 최후의 보루로 한국 아이스하키를 지탱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정말 회장님의 노력이 대단하다. 다들 그런 마음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장 빙상장을 만들고, 아이스하키 인구를 늘릴 수는 없다. 그야말로 단기, 중기, 장기 계획을 세워 먼 미래를 봐야 한다. 3월 말 안양 링크에서 초등 5~6년 학생을 위해‘판타지 캠프’를 여는 것은 희망을 살리는 작업이다. 백 감독은 “아이들이 3일간 이돈구 등 아시아 최고의 선수들한테 직접 배우면 얼마나 좋아하겠나. 기술도 배우고 엄청난 동기부여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에이치엘 안양은 몇 해 전부터 시즌 뒤 선수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캠프를 열었다. 리틀 안양 유소년팀도 운영하며 저변을 다지고 있다. 더 나아가 수도권 지자체와 협의해 아이스하키센터를 만들 꿈도 갖고 있다. 백지선 감독의 영입은 유·청소년 육성까지 염두에 둔 구단의 포석이었다.
“남편은 24시간 하키만 생각한다”고 말하는 부인도 백 감독을 지원하고 있다. 백 감독은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 살고 있지만 나의 꿈을 응원하고 있다. 나 또한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나는 행운아”라며 웃었다.
그 중요한 일의 하나는 오는 9일 시작되는 아시아리그 플레이오프에서 팀에 7번째 챔피언십 트로피를 안기는 일이다. 작은 것에도 온 정성을 다하는 그의 휘슬 소리가 날카롭다.
안양/글·사진 김창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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