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도쿄올림픽 선수촌에 걸린 대한민국 선수단의 현수막과 태극기. 도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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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26일 서울 잠실 주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의 축구 평가전. 한국팀의 수비수 홍명보와 일본의 미드필더 나카타 히데토시는 두 나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스타였다. 그런데 극도의 긴장감 넘치는 한·일전에서 둘은 갈등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면서도 서로를 존중했다고 할까. 나카타가 경기 중 손으로 슬쩍 홍명보를 치며 ‘아는 체’하자, 홍명보가 눈인사를 교환한 것은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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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 아이스하키가 일본팀을 처음 이긴 것은 2016년 세계대회 디비전 1경기에서였다. 그전까지 한국의 일본전 전적은 1무19패. 한국이 이렇게 실력을 끌어올리는 데는 한국과 일본이 중심이 돼 2003년 출범시킨 아이스하키 아시아리그가 있었다. 한국을 상대해주지도 않던 일본팀과의 경기를 통해 실업선수들의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스포츠에서 보여준 윈-윈의 대표적 사례다.
과거의 일들이 떠오른 것은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한·일 두 나라의 스포츠 교류가 크게 후퇴했다는 느낌 때문이다. 스포츠가 정치와 완전히 떨어질 수야 없겠지만, 정치적 갈등의 첨단에서 스포츠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가령 대한체육회가 도쿄올림픽 선수촌 한국동에 설치한 이순신 장군을 연상케 하는 현수막을 걸었다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요구로 철거한 것은 대표적이다. 대한체육회 입장에서는 선수들의 전투의지(?)를 높이기 위해 걸었을지 모르지만, 선수들의 경기력은 이런 식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만에 하나 상대가 일본 선수일 경우, 오히려 그를 자극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이런 감정적 대응은 체육계 내부의 일만은 아니다. 한·일 두 나라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갈등이 근본적인 것이고, 뒤를 이어 내부적으로 국내 정치가 스포츠를 활용하면서 부추긴 측면이 있다. 선수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도쿄올림픽 보이콧을 얘기한 것은 정치권이었다. 선수단을 파견한 지금 되돌아보면 정치가 스포츠를 도구화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자회견장에서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경우가 많다. 출전을 앞둔 감독한테 한·일 갈등을 염두에 둔 세리머니를 준비했느냐고 물어보거나, 올림픽 선수단 미디어데이에서 독도나 후쿠시마 식자재, 욱일기 등만 물어보는 것도 과한 측면이 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올림픽 선수단이나 감독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정부나 정치가 해결할 부분이다.
일본 현지에 파견된 <한겨레> 이준희 기자가 현지인과 인터뷰한 내용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이 있다. “일본 언론은 한국이 역사 문제로 인해 일본을 싫어한다는 내용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한다. 하지만 일본산 불매운동이 일던 2년 전 서울과 대구 등을 여행하면서 한국인의 마음을 알게 됐다. 그들은 ‘한국에 여행 와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당시 한국 언론의 보도를 보면서, 일본과 똑같이 거짓말쟁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하야시다 미도리(37) 아키타현 거주, 병원에서 근무) 정치권이나 언론이 떠드는 것과 달리 두 나라 민중이 느끼는 감정의 체감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올림픽은 스포츠 무대이지 정치 대결의 장이 아니다. 홍명보 감독은 2012 런던올림픽 3~4위전 한·일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절대 상대를 자극하지 말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싸워라.” 그럴수록 페어플레이가 나오고, 실제 사상 첫 축구 동메달도 일궈냈다.
도쿄올림픽에 참가한 한국 선수들도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100% 선보이면 된다. 다른 잡념이나 사념이 들어갈 필요도 없다. 선수가 정치를 대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코로나19 시기에 안전하게 경기하고, 세계인들과 친선을 나누고, 일본 사람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고 돌아오면 된다. 그 결과가 외교관 수백명도 해내지 못하는 한·일 관계 개선의 밑돌을 놓는 일이 되면 더 좋을 것이다.
김창금 선임기자
kim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