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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살의 강심장’ 난 이제부터 시작

등록 2012-05-25 20:04수정 2012-05-25 20:14

이청용의 편지
이청용의 편지
[토요판] 승부 이청용의 편지
<한겨레>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먼저 여러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려야겠네요. 부상 재활 기간 동안 많은 팬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복귀전을 치렀는데, 결국 볼턴의 2부리그 강등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17일 휴식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줄곧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시즌 내내 부상 때문에 결장해 더 저의 책임이 크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뛰어준 동료들이 있기에 다시 한번 희망을 품어봐야겠죠.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볼까요.

사실 저도 어떻게 유럽 스카우트의 관심을 처음 끌게 됐는지 잘 모르겠어요. 2008년 K리그 FC서울에서 뛰면서 국가대표에 선발돼 몇차례 A매치에 나서기도 했지만,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특출난 기량을 뽐내지는 않았거든요. 그랬는데 해를 넘기고 2009년 봄부터 유럽 에이전트들로부터 잇따라 연락이 오는 거예요. 나중에 저를 스카우트한 에이전트를 통해 알아보니 당시 한 영국 일간지에서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축구 스타 50명을 선정하면서 저를 40위에 올렸다고 하더군요. 이 기사를 보고 볼턴 구단이 저한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그해 5, 6월 한국에 와서 FC서울 경기와 A매치를 보고 제 기량을 체크한 뒤 영입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당시 볼턴은 재정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적료로 45억원을 지급했으니 나름 모험을 한 거였죠.

저의 역사적(?)인 프리미어리그 데뷔 무대도 벼락같았습니다. 2009년 8월16일 선덜랜드와의 2009~2010 시즌 개막전을 통해 데뷔전을 치렀는데요. 한국에서 13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영국에 도착한 지 48시간도 지나기 전에 그라운드에 섰죠. 시합 중에 볼을 다뤄보지 못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죠. 정말이지 졸음이 밀려왔고, 어떻게 경기를 치렀는지도 모를 정도였답니다. 장거리 비행 탓에 경기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출전을 지시해 깜짝 놀랐죠.

볼턴에 갓 입단했을 때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의외로 적응이 빨리 되더군요. 영어 공부도 꾸준히 하면서 동료들의 신뢰를 쌓으려 노력했죠. 라커룸 분위기는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 더 괜찮았어요. 이곳 선수들은 묘한 특성이 있어요. 경기 때는 죽을힘을 다해 뛰지만 한번 승패가 결정나면 더이상 결과에 개의치 않는 분위기예요. 처음에는 이런 분위기가 어색하긴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이게 더 편하더라고요. 생각보다 적응이 빨리 되면서 고대하던 데뷔골도 잉글랜드 진출 5경기 만에 터졌죠. 버밍엄시티전이었는데요. 제 골로 팀이 2-1로 이겨 기쁨이 두배였죠.

무엇보다 먼저 프리미어리그에 정착한 한국 선배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풀럼에서 뛰었던 (설)기현이 형이 조언을 많이 해줬지요. 그때 당시 기현이 형의 말 하나하나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몰라요. 첫 골을 넣었을 때도 주변에선 축하해주기 바빴지만 기현이 형은 “이제부터 고생길이 열렸다”며 걱정을 많이 해줬어요.

데뷔 첫해는 몸상태도 최고조였고 골운도 많이 따랐던 거 같아요. 그해는 대표팀에서도 활약이 좋았어요.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14경기(7승7무)를 치르는 동안 10경기를 뛰었죠. 다행히 좋은 컨디션을 계속 유지해 본선에도 주전으로 뛸 수 있었죠. 항상 텔레비전으로만 월드컵을 봤는데 이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눈앞에 닥치니 실감이 안 났죠. 한편으론 부담감도 컸고요. 그런데 첫 경기인 그리스전을 뛰어보니까 긴장이 저도 모르게 싹 풀리는 거예요. 제가 볼턴 데뷔전 때도 그랬고 A매치 데뷔전 때도 그랬고, 큰 경기일수록 더 편하고 재밌게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첫 월드컵 출전에 아르헨티나전과 16강 우루과이전에서 골을 넣을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시합에 임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16강전에서 우루과이에 아깝게 져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래도 남아공에서 보낸 시간이 여태껏 제 축구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축구가 그렇듯이 인생도 늘 순탄치만은 못한 것인가 봅니다. 작년 7월 말 잉글랜드 4부리그 팀인 뉴포트카운티와의 프리시즌 경기 날이었죠. 그날은 유독 컨디션이 좋았어요. 그래도 프리시즌 경기인 만큼 무리를 하지 않고 플레이를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대편은 거칠게 나왔죠.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한 선수가 등 뒤에서 거칠게 태클을 걸었죠. 발을 부여잡고 쓰러지면서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뭔가 큰일이 나겠구나’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죠. 곧바로 의식을 잃었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장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고 나서였어요. 수술이 끝난 뒤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진통제로 버텨냈지만, 그때도 사실 실감은 안 났어요. 이튿날 코일 감독이 찾아와 위로를 해주고, 곧바로 폴 로빈슨, 케빈 데이비스, 무암바 등이 병문안을 오고 난 뒤에야 제정신이 들었어요. 너무도 끔찍했지만 곧바로 마음을 추스르고 재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과 동료들의 응원 덕분이었답니다.

그날 부상으로 한 시즌을 송두리째 결장했지만 부상을 안긴 톰 밀러에게 원망 같은 건 없습니다. 그냥 축구를 하다 보면 일어나는 일로 받아들이는 게 이후 재활하는 데도 도움이 되거든요. 수술을 마치고 퇴원을 한 뒤 집에 돌아온 다음날 어머니께서 오셨죠. 그때 어머니께서 해주신 김치찌개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이후 한국과 영국을 오가며 피나는 재활 끝에 지난 2월 축구화를 신고 처음 공을 만지작거렸죠. 그리고 팀이 강등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시즌 마지막 2경기에 나섰지만 결국 강등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곧 있을 스페인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뽑히지 못했지만, 괜찮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아직 스물넷밖에 안 됐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독자 여러분에게 드리는 편지도 이번이 마지막이네요. 그동안 순전히 제 자랑뿐인 편지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준 여러분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 전하고요. 이제는 편지가 아닌 시원한 골로 조만간 여러분에게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이청용 드림.

국가대표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볼턴 소속

정리 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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