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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전학가서 축구할래”

등록 2012-02-03 20:50수정 2012-04-18 10:17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왼쪽 둘째가 이청용. 갓 돌을 지났을 때의 이청용.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왼쪽 둘째가 이청용. 갓 돌을 지났을 때의 이청용.
[토요판] 이청용의 편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2년의 시작을 이렇게 편지로 처음 여러분께 인사 올립니다. 저는 작년 7월 정강이 골절 부상을 당한 뒤 치료와 재활에만 전념해 이제 어느 정도 회복 단계에 있습니다. 비록 아직은 그라운드에서 팬 여러분들을 만나지 못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통해 제가 여태껏 걸어온 축구인생을 전할 수 있게 돼 영광입니다. 어릴 때부터 축구공만 쫓아다니고 글쓰기에는 영 서툴러서 제가 보내는 편지가 지루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제 속마음을 솔직히 털어 전달할 테니 부디 읽는 도중에 페이지를 넘기지는 말아 주세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네요. 제가 5학년 때이니까 1999년 초여름 저녁이었을 거예요. 땅거미가 드리우고 어스름해질 무렵이었는데 저랑 몇몇 친구들은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지해 공을 차고 놀았죠. 골대도 없이 적당히 막대기로 줄 그어놓고, 바람 빠진 공으로 놀고 있었을 거예요. 그때 우연히 옆을 지나가던 창동초등학교(서울) 축구부 코치님 눈에 들었어요. 한참 신나게 놀고 있는데 저한테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어느 학교에 다니냐고 묻더군요. 근처 월천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하니까 “정식으로 축구를 배워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왔어요. 당시 저희 학교에는 축구부가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에이, 그냥 친구들이랑 놀면서 하면 됐지’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밤 이불에 누웠더니 잠이 안 오는 거예요. 머릿속에서는 근사한 유니폼에 축구화를 신고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누비는 제 모습이 자꾸 그려졌어요.

그렇게 며칠을 혼자 끙끙 고민하다가 2학기가 막 시작할 무렵 아버지에게 불쑥 말을 꺼냈지요. “저, 창동초등학교로 전학 가서 축구 할래요.” 아버지(이장근씨)는 처음엔 심하게 반대를 하셨죠. 중·고교까지 육상선수로 뛰다 부상으로 도중에 접었던 아버지는 운동선수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계셨던 거죠. 어머니도 “그냥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아버지 편이셨어요. 쑥스러운 얘기지만 제가 그래도 공부를 곧잘 했거든요. 반장은 못해도 부반장은 했다구요. 그래도 축구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꼭 지금 하지 못하면 영영 못할 거 같은 기분 있잖아요. 그래서 부모님한테는 공부도 열심히 할 테니 꼭 축구부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지요.

그때 제가 매일 머릿속에 떠올린 한국 대표팀 경기가 있었어요. 1997년 9월에 있었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한·일전 경기였는데요. 오후에 집에서 가족들이랑 떡볶이를 먹으면서 봤어요. 그때 우리가 0-1로 지다가 후반에 서정원 선수와 이민성 선수가 역전골을 넣어 2-1로 이겼던 경기예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본 경기였는데, 이상하게도 당시엔 이 시합이 계속 떠올랐어요. 어쩌면 그때부터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멋진 골을 터뜨리는 제 자신을 상상했는지도 모르죠.

다른 초등교 코치에 찍혀
그 뒤로 공만 품고 다녔죠

안 배운 헛다리짚기도 척척
너무 제 자랑만 했나요^^

몇날 며칠 조르고 또 졸랐더니 아버지도 결국 제 의지에 굴복하고 마셨죠. 그때 아버지께서는 “운동을 하다 보면 잘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다. 다만 후회가 남도록 하지는 말아라”고 말씀해 주신 뒤 허락해 주셨어요. 그리고 곧바로 창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이때부터 제 축구인생이 시작된 거죠. 수줍음 많은 성격 탓에 처음에는 단체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혼자서 외톨이처럼 지내기도 했지만, 그래도 축구에 대한 사랑만큼은 놓지 않았죠. 내성적이긴 해도 공을 차면서 차츰 친구들과도 어울릴 수 있었구요. 그때는 정말이지 공을 늘 품고 다녔어요. 수업 때도 발밑에 축구공을 놓았고, 수업 끝나는 종이 땡 치면 10분의 쉬는 시간에도 운동장에 나가 축구공을 쫓아다녔어요.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전부 까먹고 점심 시간 때는 아예 공만 차고 놀았죠. 여름엔 뽀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으로 오후 수업을 듣곤 했던 게 생각나네요.

지금 생각해보면 수줍음 많고 내성적 성격이지만, 이상하게도 승부욕만큼은 컸던 거 같아요. 시합에 지면 또래 친구들은 그냥 그렇게 넘겼지만, 저는 좌절하는 수준이었죠. 집에 가면서도 생각나고, 잠자려고 누우면 또 생각나고, 아무튼 지고는 못 살았던 거 같아요. 집에서는 야단 한번 맞지 않은 착한 아들이었지만 운동장에서는 엄청 대찼거든요. 어른들이 장래 희망을 물어오면 누구는 의사, 누구는 변호사, 누구는 장군이라고 답했지만 전 늘 축구선수가 꿈이었어요. 아 그러고 보니까 하나 더 있었네요. 사실 축구선수가 안 됐으면 저는 파티시에(빵 굽는 사람)가 됐을 겁니다. 어릴 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게 빵이었거든요^^. 나중에 취미로라도 한번쯤 배워보고 싶어요.

창동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뒤엔 곧바로 주전으로 뛰었어요. 키가 또래들보다 한뼘 정도 컸고 육상선수 출신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스피드도 빨랐거든요. 한번은 당시 배우지도 않은 헛다리 짚기를 했더니 은사셨던 김용운 선생님이 깜짝 놀라더군요. 당시 선생님께서 “야, 너 그거 어디서 보고 배웠냐”고 물어오시길래 그냥 티브이에서 하는 거 보고 따라했어요 했더니, 또 놀라시더라구요. 그때 고종수(현 수원 삼성 코치) 선수와 윤정환(현 일본 프로축구 사간 도스 감독) 선수를 가장 존경했어요. 고종수 선수는 프리킥이 너무 멋있었고, 윤정환 선수는 패스 하나하나가 너무 일품이었어요. 둘을 보면서 10년 뒤 나의 모습을 꿈꾸곤 했죠. 공식 훈련이 끝나고 나면 꼭 혼자 남아 연습을 하곤 했죠.

한창 놀고 싶은 나이에 주변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저를 보면서 친구들이 더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당시 또래 아이들이 막 이성 친구에게 관심을 기울일 때였는데 저는 지금 딱히 기억에 남는 여자 동창이 없을 정도로 축구에만 푹 빠져 살았죠. 아이고, 쓰다 보니 온통 제 자랑만 된 것 같네요.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는 여기에서 접구요. 다음번엔 선수로 본격적으로 성장했던 중학교 시절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국가대표 축구선수, 프리미어리그 볼턴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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