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김태균의 편지
세계청소년대회, 야구클래식
그리고 2010년 아시안게임
공통의 운명을 짊어진 ‘짱’들
처음의 경계심은 사라졌어 올림픽과 아빤 인연이 없나봐
정식 종목에서 빠졌거든
그래도 한국선수들 잘하세요~ 효린아 안녕? 두번째 편지를 쓰는구나. 1주일 뒤면 2012 런던올림픽 개막이네. 스포츠 선수에게 태극마크는 참 특별한 경험이지.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된 게 참 아쉽구나. 오늘은 아빠의 국가대표 시절 얘기를 해줄까? 아빠가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것은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 때였어.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처음 비행기를 타봤네. 중학교 때도 일본으로 건너가 교류전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때는 배를 탔거든. 함께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쟁쟁했어.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정상호, 이동현, 송산, 이정호, 김동건 등등. 흠, 그러고 보니 1982년생들이 지금 한·미·일 야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네. 당시에는 3학년 동갑내기가 많아서 정말 재미있었어.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는 있었지. 전국에서 야구 좀 한다는 녀석들은 다 모였으니까. 대호는 그때 처음 봤어. 소속 고교인 경남고가 부산고에 밀려 전국대회에 잘 나오지 못했거든. 직접 보니 참 듬직하게 생겼더라. 그때도 이대호 아저씨는 몸무게가 90㎏이 넘었어. 키도 또래보다 얼굴 하나는 컸던 것 같고. 지금 미국 프로야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번 타자로 뛰고 있는 추신수 아저씨는 또렷이 기억한단다. 아빠가 천안북일고등학교 2학년 때 대통령기 16강전에서 맞붙은 적이 있거든. 그때 천안북일고는 구성원이 좋아서 우승후보로 꼽혔어. 물론 아빠도 1학년 때부터 주전 4번타자였기 때문에 방망이를 아주 잘 돌리고 있었지. 그런데 16강전에서 부산고 2학년 선발투수 추신수한테 절절맸어. 상대팀을 너무 얕본 게 컸지. 그때 부산고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거든. 아마 2학년들이 주축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 경기는 홈런을 주고받은 끝에 3-4, 천안북일고의 패배였지. 추신수는 공 137개를 던지면서 9이닝 6피안타(2피홈런) 10탈삼진 3실점 완투승을 거뒀고. 아빠는 4타석 동안 2볼넷 무안타에 그쳤지. 정말 충격이 컸어. 앞선 대회에서 우승도 해봤고, 4강도 두번이나 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팀한테 덜미가 잡혔으니 말이야. 결국 부산고가 우승하더라. 아무튼 그때부터 ‘추신수’라는 이름은 아빠 가슴에 콕콕 박혔단다. 다시 세계청소년야구대회 얘기를 해볼까. 국가대표에 뽑히니까 좋았어. 학교에서보다 훈련을 덜할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때만 해도 천안북일고는 합숙소 방 8개에 땀에 전 야구부원들이 나눠 잤고, 푸세식 화장실이었어. 빨래도 1학년 애들이 많이 하기는 했지만 손빨래를 해야 했고. 거기에서 잠시나마 해방된다고 하니 좋았던 거지. 대표팀은 원래 컨디션 조절 정도로만 훈련하거든. 그런데 이게 웬걸. 그때 대표팀을 이끄신 분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조성옥 부산고 감독님이셨거든. 두달 남짓 대표팀과 함께 있었는데 달리기를 포함해 훈련을 엄청 시키시는 거야. 마치 부산고 애들 운동시키듯 대표팀도 훈련시키신 거지. 당시 북일고도 훈련량은 만만찮았는데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더라. 하루 9시간 정도 훈련했어. 운동이 힘드니까 서로 끈끈해지더라. 그런 거 있잖아, 힘든 일을 같이 겪으면 똘똘 뭉치게 되는 거.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던 ‘전국 야구짱’들이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니 벽이 없어지더라. 외출 허락 받은 날은 같이 추억을 만들면서 그렇게 친해졌지. 청소년대회 결과? 알잖아, 우승한 거. 처음에는 라인업에서 3번 추신수, 4번 이대호, 5번이 나였는데 중간에 추신수가 투수로 가고 내가 3번을 쳤지. 결승전에서는 미국과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국이 9-7로 승리해서 역대 3번째 우승을 차지했어. 결승전 후에 상대팀 선수들하고 유니폼을 바꿔 입었지. 대회 뒤 남은 장비나 운동화는 쿠바 선수들한테 주고 왔어. 그때 성적? 대호는 타율 0.500(30타수 15안타) 3홈런 10타점, 나는 타율 0.433(30타수 13안타) 3홈런 11타점을 기록했지. 신수는 공격에서는 타율 0.263으로 안 좋았지만 투수로는 21이닝 7실점(평균자책 3.00), 33탈삼진으로 좋았어. 최우수선수도 신수가 됐고. 2000년 청소년대회 우승 주역들이 다시 뭉친 곳이 바로 2009년 세계야구클래식(WBC) 무대였어. 2006년 1차 대회 때는 아빠 혼자 나갔거든. 벤치에 앉아서 이승엽 선배가 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도움이 돼야지’ 다짐했단다. 그리고 2009년에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와 합심해서 준우승을 일궈냈고. 당시를 돌아보면 다른 대회와 비교해 대표팀 대우가 참 좋았던 것 같아. 비행기도 별도의 수속절차 없이 활주로로 그냥 들어갔고, 호텔도 1인1실을 사용했으니까. 나중에 듣고 보니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구나. 효린아, 아빠는 올림픽 경험이 없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2004년에는 한국이 올림픽 본선에 못 나갔으니까.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기회가 있었지만 포지션 중복, 병역 혜택 등의 이유로 막판에 제외됐거든. 그래도 전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열심히 응원은 했지. 앞으로도 올림픽 무대는 못 뛸 것 같네. 런던올림픽은 물론이고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때도 야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됐고, 2020년 올림픽 때 다시 야구가 정식종목이 되더라도 아빠는 그때 은퇴를 앞둔 나이일 테니까. 아쉬울 것 같다고? 딱히 그렇지도 않아.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는 게 올림픽뿐만은 아니잖아. 그리고 내년 3월에 3회 세계야구클래식이 열리니까 그때 열심히 뛰어야지. 돌이켜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대회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야. 그때 잘했냐고? 아니. 아빠는 겨우 안타 1개(11타수)를 쳤단다. 한국 야구는 금메달을 따냈는데 말이지. 일본시리즈 출전하고 나고야→지바→한국→중국으로 이어지는 살인적 스케줄 때문에 몸살에 걸린 게 컸어. 도핑 때문에 약도 못 먹은데다 컨디션은 엉망이고, 주위 기대치는 높고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단다. ‘안타 1개’가 너무 부끄러워서 결승전 직후 조범현 감독님과 포옹하면서 “감독님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드렸지. 감독님은 괜찮다고 등 두들겨 주시더라.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가 울리는 내내 얼굴을 들지 못했어. 정말 창피했거든. 잘했던 대회보다 못했던 대회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아쉬움이 더 많이 남기 때문이겠지?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도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으면 해. 올림픽 무대라는 게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까. 정말 모두모두 잘했으면 좋겠다. ㅎㅎㅎ 정리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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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년 아시안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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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종목에서 빠졌거든
그래도 한국선수들 잘하세요~ 효린아 안녕? 두번째 편지를 쓰는구나. 1주일 뒤면 2012 런던올림픽 개막이네. 스포츠 선수에게 태극마크는 참 특별한 경험이지. 야구가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된 게 참 아쉽구나. 오늘은 아빠의 국가대표 시절 얘기를 해줄까? 아빠가 처음 태극마크를 단 것은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대회 때였어.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했는데, 생각해보니 그때 처음 비행기를 타봤네. 중학교 때도 일본으로 건너가 교류전을 치르기는 했지만 그때는 배를 탔거든. 함께 대회에 참가한 선수들이 쟁쟁했어.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 정상호, 이동현, 송산, 이정호, 김동건 등등. 흠, 그러고 보니 1982년생들이 지금 한·미·일 야구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네. 당시에는 3학년 동갑내기가 많아서 정말 재미있었어. 그래도 보이지 않는 경쟁심리는 있었지. 전국에서 야구 좀 한다는 녀석들은 다 모였으니까. 대호는 그때 처음 봤어. 소속 고교인 경남고가 부산고에 밀려 전국대회에 잘 나오지 못했거든. 직접 보니 참 듬직하게 생겼더라. 그때도 이대호 아저씨는 몸무게가 90㎏이 넘었어. 키도 또래보다 얼굴 하나는 컸던 것 같고. 지금 미국 프로야구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번 타자로 뛰고 있는 추신수 아저씨는 또렷이 기억한단다. 아빠가 천안북일고등학교 2학년 때 대통령기 16강전에서 맞붙은 적이 있거든. 그때 천안북일고는 구성원이 좋아서 우승후보로 꼽혔어. 물론 아빠도 1학년 때부터 주전 4번타자였기 때문에 방망이를 아주 잘 돌리고 있었지. 그런데 16강전에서 부산고 2학년 선발투수 추신수한테 절절맸어. 상대팀을 너무 얕본 게 컸지. 그때 부산고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거든. 아마 2학년들이 주축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 경기는 홈런을 주고받은 끝에 3-4, 천안북일고의 패배였지. 추신수는 공 137개를 던지면서 9이닝 6피안타(2피홈런) 10탈삼진 3실점 완투승을 거뒀고. 아빠는 4타석 동안 2볼넷 무안타에 그쳤지. 정말 충격이 컸어. 앞선 대회에서 우승도 해봤고, 4강도 두번이나 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팀한테 덜미가 잡혔으니 말이야. 결국 부산고가 우승하더라. 아무튼 그때부터 ‘추신수’라는 이름은 아빠 가슴에 콕콕 박혔단다. 다시 세계청소년야구대회 얘기를 해볼까. 국가대표에 뽑히니까 좋았어. 학교에서보다 훈련을 덜할 것 같았거든. 그리고 그때만 해도 천안북일고는 합숙소 방 8개에 땀에 전 야구부원들이 나눠 잤고, 푸세식 화장실이었어. 빨래도 1학년 애들이 많이 하기는 했지만 손빨래를 해야 했고. 거기에서 잠시나마 해방된다고 하니 좋았던 거지. 대표팀은 원래 컨디션 조절 정도로만 훈련하거든. 그런데 이게 웬걸. 그때 대표팀을 이끄신 분이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조성옥 부산고 감독님이셨거든. 두달 남짓 대표팀과 함께 있었는데 달리기를 포함해 훈련을 엄청 시키시는 거야. 마치 부산고 애들 운동시키듯 대표팀도 훈련시키신 거지. 당시 북일고도 훈련량은 만만찮았는데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나더라. 하루 9시간 정도 훈련했어. 운동이 힘드니까 서로 끈끈해지더라. 그런 거 있잖아, 힘든 일을 같이 겪으면 똘똘 뭉치게 되는 거. 처음에는 서로 경계하던 ‘전국 야구짱’들이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니 벽이 없어지더라. 외출 허락 받은 날은 같이 추억을 만들면서 그렇게 친해졌지. 청소년대회 결과? 알잖아, 우승한 거. 처음에는 라인업에서 3번 추신수, 4번 이대호, 5번이 나였는데 중간에 추신수가 투수로 가고 내가 3번을 쳤지. 결승전에서는 미국과 연장 13회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국이 9-7로 승리해서 역대 3번째 우승을 차지했어. 결승전 후에 상대팀 선수들하고 유니폼을 바꿔 입었지. 대회 뒤 남은 장비나 운동화는 쿠바 선수들한테 주고 왔어. 그때 성적? 대호는 타율 0.500(30타수 15안타) 3홈런 10타점, 나는 타율 0.433(30타수 13안타) 3홈런 11타점을 기록했지. 신수는 공격에서는 타율 0.263으로 안 좋았지만 투수로는 21이닝 7실점(평균자책 3.00), 33탈삼진으로 좋았어. 최우수선수도 신수가 됐고. 2000년 청소년대회 우승 주역들이 다시 뭉친 곳이 바로 2009년 세계야구클래식(WBC) 무대였어. 2006년 1차 대회 때는 아빠 혼자 나갔거든. 벤치에 앉아서 이승엽 선배가 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언젠간 도움이 돼야지’ 다짐했단다. 그리고 2009년에 추신수, 이대호, 정근우와 합심해서 준우승을 일궈냈고. 당시를 돌아보면 다른 대회와 비교해 대표팀 대우가 참 좋았던 것 같아. 비행기도 별도의 수속절차 없이 활주로로 그냥 들어갔고, 호텔도 1인1실을 사용했으니까. 나중에 듣고 보니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런 대우를 받는다고 하더구나. 효린아, 아빠는 올림픽 경험이 없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2004년에는 한국이 올림픽 본선에 못 나갔으니까.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기회가 있었지만 포지션 중복, 병역 혜택 등의 이유로 막판에 제외됐거든. 그래도 전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열심히 응원은 했지. 앞으로도 올림픽 무대는 못 뛸 것 같네. 런던올림픽은 물론이고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때도 야구가 정식종목에서 제외됐고, 2020년 올림픽 때 다시 야구가 정식종목이 되더라도 아빠는 그때 은퇴를 앞둔 나이일 테니까. 아쉬울 것 같다고? 딱히 그렇지도 않아. 태극마크를 달고 나가는 게 올림픽뿐만은 아니잖아. 그리고 내년 3월에 3회 세계야구클래식이 열리니까 그때 열심히 뛰어야지. 돌이켜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대회는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대회야. 그때 잘했냐고? 아니. 아빠는 겨우 안타 1개(11타수)를 쳤단다. 한국 야구는 금메달을 따냈는데 말이지. 일본시리즈 출전하고 나고야→지바→한국→중국으로 이어지는 살인적 스케줄 때문에 몸살에 걸린 게 컸어. 도핑 때문에 약도 못 먹은데다 컨디션은 엉망이고, 주위 기대치는 높고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단다. ‘안타 1개’가 너무 부끄러워서 결승전 직후 조범현 감독님과 포옹하면서 “감독님 죄송합니다” 하고 말씀드렸지. 감독님은 괜찮다고 등 두들겨 주시더라. 시상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애국가가 울리는 내내 얼굴을 들지 못했어. 정말 창피했거든. 잘했던 대회보다 못했던 대회가 더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아쉬움이 더 많이 남기 때문이겠지?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모든 선수들도 후회 없는 경기를 펼쳤으면 해. 올림픽 무대라는 게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까. 정말 모두모두 잘했으면 좋겠다. ㅎㅎㅎ 정리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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