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쓴 옛 시인이다. 나이 들어서 그 뒷이야기에 해당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썼다. 이때 욕심 많은 아들들이 소포클레스의 재산을 탐냈다. ‘아버지가 치매인 것 같다, 아버지의 재산권 행사를 금지해달라’며 그를 법정에 세웠다. 늙은 시인은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의 원고를 들고 나가 배심원들 앞에서 소리 내 읽고는 “이것이 치매에 걸린 사람의 작품이라 생각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소포클레스는 재판에서 이겼다. 키케로의 책 〈노년에 대하여〉에 소개된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제는 뚜렷하다. 창의력은 나이가 들어도 쇠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로마 사람 키케로는 정치인으로는 실패했고 철학자로는 그저 그랬지만 작가로서 오래 기억되는 인물인데, 〈노년에 대하여〉에서 ‘나이가 들어도 창조력을 잃지 않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 노익장의 기나긴 명단’을 나열한다. 이런 사례는 예나 지금이나 차고 넘치게 많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기법을 널리 알린 미국의 알렉스 오스번 역시 “독창적 상상력은 연령과 관계가 없다”며, 나이 들어 창조력을 과시한 현대 미국 사람의 이름을 늘어놓는다.
나도 여기에 작가들의 이름 목록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더 좋은 작품을 내놓은 대가들의 사례 말이다. 그런데 이런 글을 쓰려니, 창의력에 대해 쓰는 글이 썩 창의적이지 않은 느낌이다. 나이 지긋한 위대한 작가들의 이름을 대는 일 대신 나는 질문을 던진다. 나이 든 사람의 창조성이 가지는 특징은 어떠한 것일까?
“좋은 아이디어란 오래된 요소의 새로운 결합.” 우리가 즐겨 인용하는 웹 영의 금언이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짜내는 작업이란 속이 안 보이는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구슬을 두어 개 집어내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이가 든다고 창의력이 떨어지지는 않을 터이다. 나이 든 사람의 구슬 주머니에 젊은 사람의 주머니보다 더 많은 구슬, 즉 낱말과 사연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슬이 많을수록 조합할 수 있는 결합의 가짓수는 많아진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의 아이디어는 참신한데 나이 든 사람은 그렇지 않은 듯 종종 느끼는 이유는 뭘까? 여러 설명 가운데 오스번의 지적이 내 눈길을 끈다. “사람은 높은 지위와 충분한 보수로 마음을 놓게 되면 과거와 같은 노력은 하지 않게 된다”고 했다. 이 주장이 흥미로운 이유는 오스번이 “나이 들고 성공한 사람은 ‘노오력’이 부족하기 마련”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동안 ‘나이 들고 성공한 사람’이 젊은 사람을 향해 “노오력이 부족하다”고 큰소리치는 일을 지긋지긋하게 보아왔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노오력’이라는 오래된 요소를 반대 방향으로 결합한 오스번의 지적이 신선해 보이는 것이다. 정작 오스번은 우리보다 두어 세대 앞서 활동하던 사람인데 말이다. 다만 젊은 사람이 ‘노오력 타령’을 들으며 억울함을 느끼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이 든 사람도 자신이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에 선뜻 동의하지는 않을 터이다.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의 창조성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소포클레스의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보면 나이 든 영웅이 마침내 신성함과 해답을 얻은 것으로 나온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글이다. 평론가이자 사상가로 유명한 사이드는 예술가의 말년작에 대한 글을 자신의 말년에 썼다. 사이드가 관심을 기울이는 쪽은 소포클레스와 반대되는 쪽의 창조성이다. “베토벤의 말년의 작품들은 미완성이라는 인상을 줄 때가 많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는 “조화와 성숙함, 평온함”이 깃든 반면, 베토벤의 말기 현악사중주와 피아노 소나타에는 “조화롭지 못하고 평온하지 않은 긴장”이 드러났다고 했다. 소포클레스나 베토벤이나 양쪽 모두, 젊은 나이에 쓰기 어려운 위대한 말년작을 남겼다.
김태권(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