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영국의 에드 쿤은 2005년 미국 기억력 대회에서 “252자리의 무작위 숫자를 전화번호처럼” 줄줄 외웠다. 대회를 취재하던 기자 조슈아 포어와 맥주를 마시다 쿤은 흥미로운 제안을 한다. “기억의 기술을 알려줄 테니, 내년에 미국 기억력 대회에 나가보라.” 포어는 2006년 대회에서 "마구 섞은 포커 카드 한 벌의 순서를 1분40초 만에 기억”해 미국 신기록을 세우고 우승했다.
포어는 자기 경험을 〈아인슈타인과 문워킹〉이라는 책으로 썼다.(한국에서는 〈1년 만에 기억력 천재가 된 남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번역되었다) “책을 읽고 ‘지은이는 평범한 미국 사람이잖아?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얀자 윈터소울의 말이다. 2018년 세계 기억술 대회에서 그는 무작위로 뽑은 145개의 단어를 5분 만에 순서대로 외웠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자기 지능은 보통이며 자기 기억력도 평범하다는 것이다. 믿기지 않는다. 나처럼 아둔한 사람은 기술을 쓰지 않고는 100개는커녕 10개의 단어도 순서대로 못 외우기 때문이다. 이전 칼럼을 쓰며 나는 윤동주의 시어 120여개를 추린 일이 있다. 컴퓨터를 이용해 무작위로 열 단어를 뽑아본다. “터널, 하늘, 꽃밭, 저녁, 전차, 손가락, 햇빛, 얼굴, 거리, 꽃.” 한번 소리 내어 읽고, 순서대로 외워보자. 독자 여러분처럼 똑똑한 사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머리는 일곱 가지 이상의 사물을 기억하기 어렵다고 하니 말이다.
사실은 외우는 방법이 따로 있다. 간단한 ‘못걸이 기억술’을 소개한다. 숫자의 모양을 이용해 기억을 돕는 기술이다. 숫자 1은 촛불, 2는 백조, 3은 엉덩이, 4는 부엌칼, 5는 갈고리, 6은 골프채, 7은 벼랑 끝, 8은 눈사람, 9는 풍선, 10은 포크와 접시를 닮았다. 이것이 열 개의 못걸이다.
외워야 할 열 개의 단어가 옷가지다. 못걸이에 하나씩 걸어보자. 다음 열 개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터널을 촛불(1)로 밝힌다. 하늘에 백조(2)가 떠 있다. 엉덩방아(3)를 찧어 꽃밭이 망가졌다. 부엌칼(4)이 저녁 불빛에 번뜩인다. 전차에 후크선장(5)이 탔다. 골프채(6)를 휘두르다 손가락이 맞아 아프다. 햇빛이 벼랑 끝(7)에 반짝인다. 눈사람(8)이 징그럽게도 사람 얼굴을 했다. 거리에 풍선(9) 든 사람들이 흥성거린다. 식당에 갔는데 접시(10) 위에 꽃이 놓여있어 당황했다.” 이제 촛불, 백조, 엉덩이 등 숫자를 모양대로 떠올려보자. 열 개의 단어가 순서대로 기억날 것이다.
여러 가지 못걸이를 사용할 수 있다. 숫자의 소리도 좋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원, 투, 스리” 등 숫자와 라임이 같은 단어인 “선(해님), 슈(신발), 트리(나무), 도어(문), 스틱스(북채), 헤븐(극락), 게이트(큰 문), 와인, 펜” 등을 자주 쓴다. 한국 사람은 어릴 때 부르던 〈잘잘잘〉이라는 노래를 이용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 하면 할머니가 지팡이 짚고서 잘잘잘”이라는 노래다. “둘 하면 두부 장수, 셋 하면 생선장수, 넷 하면 냇가에서, 다섯 하면 다람쥐가, 여섯 하면 여우가, 일곱 하면 일꾼들이, 여덟 하면 엿장수가, 아홉 하면 아버지가, 열 하면 열무장수.”
이렇게 우리는 서른 개의 못걸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런 방법으로 누구나 수십 가지 일을 한번 보면 순서대로 외울 수 있다. 독자님이 기억술을 시험해보실 수 있게 나는 간단한 게임을 만들어 두었다. 큐알(QR)코드를 찍으면 연결되니, 틈틈이 연습해보시길. “꽃밭과 엉덩방아”처럼 기억해야 할 단어(‘꽃밭’)를 준비된 못걸이(‘3’)에 연결하는 상상력이 중요하다. 기억을 잘 하는 일에도 창의력이 필요하다. 창의력을 이야기하던 칼럼에서 기억술을 다루는 이유다.
김태권(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