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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돈 몰리는 판교에 부족한 것들

등록 2021-05-07 04:59수정 2021-05-07 14:55

판교에서 일한다고 하면 “좋겠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저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만, 최근에 회사 주가가 크게 올랐으니 목돈을 쥐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들(우리 엄마 포함)이 그런 반응을 보이죠. 연봉이 웬만한 대기업 이상일 거라는 오해 아닌 오해도 많이 삽니다. 그때마다 ‘그거 개발자들 이야기예요. 저 같은 잇문계에겐 남의 이야기나 다름없다고요!’라고 설명하고 싶지만, 한두 번이 아니니 어색하게 웃고 맙니다. 종전에는 전형적인 한국 기업들에 비해 자유로운 기업 문화를 부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코로나19 시대에 접어들며 많은 자본이 기술기업에 유입된 후로는 풍족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졌죠. 풍요로울 것 같은 이미지가 ‘디폴트’이다 보니 판교로 처음 출근하시는 분들은 생각지도 못한 결핍을 느끼기도 합니다. 와보면 비로소 보이는 구멍이랄까요.

저는 우선 주차장 문제를 꼽고 싶습니다. 경기도 각지나 서울, 멀게는 인천에서 출근하는 판교의 회사원들은 지하철이나 버스, 자가운전 등의 교통수단을 택합니다. 일부 회사가 셔틀버스를 운영하기도 하지만, 수송량이 많지 않으니 논외로 둡니다. 사무실이 지하철에 인접해 있거나 적절한 버스 노선이 닿지 않는다면 부득이 자가운전을 해야 하는데요. 판교에 있는 건물들은 주차면 수가 매우 적습니다. 일대 지반이 암석층이라 깊게 파기 어려웠다고 해요. 덕택에 정기적으로 주차장 추첨을 할 때면 희비가 교차합니다. 많은 회사가 유연 근무제를 도입하면서 조금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출퇴근 시간대 판교의 지하철과 버스는 콩나물시루거든요. 판교역 근처에 새 빌딩들이 완공되는 올해 말, 그리고 성남시가 2만 5천㎡ 규모의 임시 공영주차장으로 운영하던 땅에 N게임사가 새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면 주차난과 출퇴근길의 고통은 한결 가중될 것 같습니다.

어린이집 복지는 판교를 좋아 보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 시간까지 최고의 교육 환경을 제공하니 두말할 나위가 없죠. 다만, 전제가 붙습니다. 당첨이 돼야 좋은 겁니다. 대체로 수십 대 일의 경쟁률은 기본이거든요. 게다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 입소한 아이들은 유치원에 갈 때까지 쭉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사설 어린이집을 이용한다고 가정하면, 판교에서 회사 어린이집에 당첨되는 것만으로도 천만 원 이상의 연봉 인상 효과가 있거든요. 하지만 어린이집 혜택을 받는 쪽이 그렇지 못한 쪽보다 훨씬 적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죠. 한 꺼풀 더 들춰보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기업은 많지만 자녀 학자금 복지를 운영하는 곳은 거의 없다는 사실도 마주하게 됩니다. 중장년 재직자가 드물다 보니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아요. 풍요 속 빈곤입니다.

유연해 보이는 기업 문화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잦은 조직개편도 살펴볼 만합니다. 오랫동안 한 영역에서 사업을 해 온 전통 기업들은 인사 발령이 연례행사입니다. 보통 연말연시에 대규모 승진과 퇴직을 겸한 조직개편을 하죠. 변동성이 적으니 자칫 ‘고인 물’이 되기도 쉽지만, 안정감을 갖고 일 할 토대가 되기도 합니다. 판교의 상당수 기업은 짧게는 일주일 단위, 길게는 한 달 단위로 크고 작은 조직개편을 단행합니다. 한 회사의 간판 아래서 수십 가지 서비스를 개발하고 운영하기 때문인데요. 어느 순간 팀 하나가 휙 사라지는 경우는 무척 흔합니다. 게임 업계에서는 제품 출시 후 흥행에 실패한 조직이 사내에서 전환 배치받지 못하고 퇴사를 종용받은 사례도 여럿 있었죠. ‘트래픽’이 존재 이유이자 인격인 셈입니다.

특정 집단에 관한 고정관념은 의외로 소소한 것들이 강화 과정을 거쳐 형성됩니다. 아이티 서비스 업계를 통칭하는 판교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위적으로 설계된 산업 단지에 속해 있고, 개발자들이 과반이 넘는 곳이다 보니 ‘~카더라’에 힘입은 고정관념이 더 쉽게 생기는 것 같습니다. 주식 부자들이 많다지만, 비율로 따지면 스톡옵션은 구경도 못 해본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고액 연봉자보다 보통의 직장인과 별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대다수예요.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풍요로움을 무작정 부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잇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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