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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규칙 벗어난 IT업계 야근이 ‘스포츠정신’이라고요?

등록 2021-07-02 08:59수정 2021-07-02 09:05

그림 잇문계
그림 잇문계

아이티 업종, 그중에서도 소프트웨어 개발이나 플랫폼 서비스를 주력으로 삼는 곳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는 야근일 겁니다. 새 제품을 기획하고 출시하는 단계에 유독 일이 몰리기 때문이죠. 때문에 동종 기업이 밀집한 곳에는 독특한 별명을 가진 회사들이 있습니다. ‘구로의 오징어잡이 배’, ‘선릉의 등대’ 같은 표현이 그것이죠. 해당 지역에서 야근자들이 켜 놓은 사무실 조명을 빗댄 말입니다. 작은 회사들의 오징어잡이 불이나 등대가 꺼지고 켜지는 시기가 뚜렷하다면, 큰 회사들은 건물의 층과 칸을 옮겨가며 불을 밝힙니다. 어느 시기든 간에 결전을 앞둔 신작들이 준비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판교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신제품 출시에 이르기까지 철야 근무를 하느라 몇 명이 이혼했는지 모르겠다며, “‘나쁜 남편, 나쁜 남자 친구’를 만들었다”는 발언을 당당하게 뱉은 한 소프트웨어 회사 창업자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이에 직원들은 “복통을 한 달 참다 쓰러졌다”, “일하다 앉아서 굳은 채로 자는 사람을 봤다”, “장발에 수염 기른 거지꼴이 회사에 차고 넘친다” 등의 반응을 내놨죠.

또 다른 아이티 대기업의 시이오(CEO)는 서비스 총괄 임원 시절 ‘야근은 스포츠’라는 지론을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어요. 이번 정부에서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장을 역임한 게임 회사 창업주도 공개석상에서 주 52시간제 일률 적용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을 정도니, 야근이 업계 전반에 낯설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대체로 본인의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법인 역시 마찬가지일 테죠. 판교나 선릉, 구로 등에서 일가를 이룬 아이티 회사들은 ‘스프린트’(초단기 프로젝트)·‘크런치 모드’(개인 생활 포기하는 장시간 노동) 등 속도감 있고 격한 업무 환경을 이겨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창업자나 초기 멤버들의 디엔에이(DNA)에 ‘야근의 맛’은 그렇게 아로새겨졌습니다. 고통의 순간을 지나 큰 성취를 이뤄낼 수 있었으니 주 52시간은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정도로 들릴 테죠.

“요즘 칼퇴근하는 직원이 많아졌다”는 창업자의 한마디에 정시 출발하는 통근버스가 사라졌다는 한 회사의 ‘웃픈’ 이야기는 9년이나 지났지만 강렬하게 기억됩니다. 이쯤 되면 야근 기록이 없는 직원은 ‘스포츠 정신’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마련이죠. 간결하게 끝낼 수 있는 일을 천천히 하면서 일부러 야근 기록을 남기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그 회사 직원의 말이 슬펐습니다. 계약된 연봉 외에 몸으로 때워 받는 인센티브라며 ‘몸센티브’라는 용어를 쓰더라고요. 인사 평가가 이뤄지는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전사적인 ‘야근 배틀’은 격해진대요.

한쪽에서는 몸센티브를 연봉으로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논쟁이 붙기도 해요. 주 40시간 이상 일하기 어렵도록 여러 장치를 해 둔 회사도 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근로시간제한이 꼭 일주일 단위여야 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저마다의 체력이나 의지에 맞게 좀 더 긴 기간을 두고 근로시간제한을 건다면,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의학적으로 주 52시간을 넘겨 일하면 건강에 해롭다는 연구 결과가 있으니, 다 같이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게다가 장시간 노동은 새로운 일자리 생성을 가로막기도 하니,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야근은 자제하는 게 좋겠죠.

이제는 시가총액 수십조원의 평가를 받는 아이티 기업 창업자들이,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와 혹독한 스타트업의 시간을 견디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안 해도 될 일을 하는 척하지 않고, 사람들이 필요로 한 것을 찾아내 즐겁게 파고든 것 아니었을까요.

지금의 우리가 훨씬 더 많이 고민하고 야근하더라도,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쟁취한 과실의 크기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낸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선망받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하죠. 내가 주인이 되어서 정당한 보상을 챙기겠다는 계산입니다.

반대로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건강이 나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각오하기 어려운 다른 누군가는 회사원의 길을 걷죠.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궁지에 몰리지 않도록 근로기준법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규칙 안에서 승리를 추구하는 게 스포츠 정신이니까요. 잇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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