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업트럭 시장이 심상찮다. 메르세데스 벤츠가 엑스(X) 클래스를 출시하고 폴크스바겐은 픽업트럭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포드와 손을 잡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테슬라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입은 사이버트럭을 공개하고 지엠시(GMC) 허머는 내연기관을 얹은 에스유브이(SUV)가 아닌 전기모터와 배터리로 움직이는 픽업트럭으로 돌아온다.
사실 픽업트럭 시장은 그리 크지 않다. 북미 시장을 제외하면 판매량도 많지 않고, 시장이 탄탄한 국가도 별로 없다. 참고로 미국은 2020년도 신차 판매 1~3위 모두 픽업트럭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불고 있는 SUV 바람이 픽업트럭 시장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다. 크고 높은 차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들고, 픽업트럭을 짐차가 아닌 SUV의 변종쯤으로 여기는 소비자가 늘었다. 주 5일제 정착에 따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캠핑 같은 레저 활동 인구가 많아지면서 픽업트럭 수요가 늘고, 편의성과 승차감을 고루 갖춘 제품들이 등장한 덕분이다. 물론 디자인도 좋아졌다.
게다가 세금 혜택도 무시할 수 없다. 픽업트럭은 국내법상 화물차로 분류되기 때문에 배기량과 관계없이 연간 자동차세가 2만8500원에 불과하다. 40만~60만원의 일반 승용 모델 세금에 비하면 부담이 적고, 취득세 역시 차 가격의 5%로 산정돼 7%인 일반 승용 모델보다 낮다. 또한 개별 소비세 3.5~5%와 교육세 1.5%가 면제된다. 개인 사업자가 픽업트럭을 살 땐 부가세 10%를 환급받을 수 있어 매출 규모에 따라서는 부가세를 털어낼 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잘 팔리는 픽업트럭은 쌍용 렉스턴 스포츠다. 2020년 4월 렉스턴 스포츠는 출시 2년 3개월 만에 누적 판매 대수 10만대를 찍었다. 지난해 렉스턴 스포츠의 판매 대수는 3만3068대, 국내 픽업트럭 전체 판매 대수는 3만8464대로 렉스턴 스포츠가 차지하는 비중이 85.9%나 된다. 렉스턴의 인기가 이렇게까지 좋은 이유는 레저와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9년 7월까지 국내에서 만날 수 있는 픽업트럭은 렉스턴 스포츠뿐이었다.
그런데 8월 쉐보레 콜로라도가 국내 픽업트럭 시장에 뛰어들면서 수입 픽업트럭의 국내 유입이 시작됐다. 물론 가격에서는 렉스턴 스포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렉스턴 스포츠가 2439만~3525만원인 것에 비하면 콜로라도는 1000만원이나 비싼 수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잘나가는 중형 픽업트럭을 내세워 콜로라도만의 시장을 넓혀가고 있다. 첫해 5개월 동안 1289대를 팔았으며 2020년에는 5000대를 넘게 판매했다. 렉스턴 스포츠에 비하면 판매 대수가 그리 높지 않지만 ‘진짜’ 레저용 픽업트럭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
콜로라도는 보닛 아래 V6 3.6 가솔린 엔진이 들어간다. 이렇게 넉넉한 힘을 내는 엔진을 집어넣은 건 견인력 때문이다. 콜로라도의 견인력은 3.2t에 달하며 이는 렉스턴 스포츠 칸의 견인력 2.2t보다 1톤이나 높은 수치다. 무거운 트레일러나 카라반을 끌기에도 문제없다. 트레일러의 하중에 따라 브레이크 압력을 조정할 수 있는 통합형 트레일러 브레이크 시스템이 네 바퀴 굴림 시스템에 들어가며 쉽게 트레일러를 걸 수 있도록 센터 디스플레이에 가이드라인을 보여주는 등 다양한 트레일링 특화 기술이 적용됐다.
지난해엔 지프가 1992년 코만치 이후 27년 만에 픽업트럭을 출시했다. 바로 글래디에이터다. 콜로라도가 트레일러에 특화된 픽업트럭이라면 글래디에이터는 오프로드가 주 무대다. 지프에서 오프로드를 가장 잘 달리는 랭글러를 베이스로 하기 때문이다. 생긴 것도 영락없는 랭글러다. 33인치나 되는 머드 타이어를 끼웠고, 이 큰 타이어를 끼우기 위해 펜더도 넓혔다. 하지만 뒤는 생경하다. 차체 길이가 5600㎜나 된다. 일반 랭글러보다 715㎜나 길다. 휠베이스를 480㎜ 늘리고 오버행(바퀴 축과 차 끝단 사이 거리)도 더 늘리면서 승객석을 그대로 두고 적재 공간을 만들었다. 지프는 글래디에이터의 다양한 활용성을 보여주기 위해 캠핑, 오프로드, 바이크 등 다양한 아웃도어 라이프를 더한 글래디에이터 콘셉트를 함께 공개하기도 했다.
승차감은 랭글러와 차이가 크다. 적재 공간에 짐을 많이 실을 것을 고려해 승용차에 쓰이는 서스펜션이 아닌 화물용에 가까운 리어 서스펜션으로 교체했다. 랭글러보다 차체가 부드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덕분에 노면에서 발생하는 충격을 서스펜션이 잘 받아내며 부드럽게 달린다. 하지만 빠른 속도에서 차체 안정성이 떨어진다. 오프로드 타이어는 접지력이 약하고 높은 지상고 때문에 바람이 차체 아래로 들이치기 때문이다. 해외에는 온로드 타이어를 끼우고 뒤쪽 서스펜션이 더 단단한 오버랜드 모델도 출시됐지만 국내엔 루비콘만 들어온다.
올해도 픽업트럭 출시 소식은 계속된다. 지난 4월 12일 포드 레인저가 국내에 상륙했는데 글래디에이터 루비콘만 들여오는 지프와는 달리 포드는 온로드 모델인 와일드트랙과 오프로드 모델인 랩터를 함께 선보였다. 와일드트랙은 부품 보강이 없어 차가 랩터보다 가볍고, 리어 서스펜션도 리프 스프링으로 구성된다. 랩터보다 1000kg 더 무거운 3500kg의 견인력을 가지며 같은 무게라도 더 안정적으로 트레일러 등을 끌 수 있다. 랩터는 조금 특별한 기능인 바하(Baja) 모드가 들어간다. 오프로드 고속 주행 모드로 노면 상황에 따라 토크와 변속기를 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지형관리시스템에 포함된 기능이다. 과거 바하(Baja) 1000과 같은 오프로드 레이싱에서 실력을 인정받는 포드다운 선택이다.
국내에 판매되고 있는 픽업트럭의 판매 대수와 종류를 보면 태동기에 불과하다.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다변화하면 판매 대수와 종류는 자연스럽게 늘어날 거다. 지금은 중형 픽업트럭 위주로 시장이 형성됐지만 곧 포드 브롱코와 같은 소형 픽업트럭도 만날 수 있을 거다. 쉐보레 실버라도와 포드 F-150 같은 대형 픽업트럭의 국내 출시를 기대하는 소비자도 많다.
현재 우리나라의 주차장의 최소 기준은 길이×너비 5.0×2.5m(확장형 5.2×2.6)다. 대형 픽업트럭의 길이는 5300~5780mm, 너비는 2m가 넘는다. 국내 주차장에 대형 픽업트럭을 주차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최근 대형 SUV와 픽업트럭의 인기가 많아지면서 주차장 규격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아보인다. 주차장의 규격을 늘리면 그만큼 주차대수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대형 픽업트럭을 국내에서 보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다.
김선관(<모터트렌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