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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엄마의 노동이 느껴지는 그 맛

등록 2021-04-30 10:59수정 2021-04-30 19:19

‘직장인들은 왜 점심시간마다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백반집을 전전하는가’ 진지하게 고민했던 적도 있다. 나이 먹은 직장인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직접 끓인 국, 갓 지은 따뜻한 밥, 당연한 듯 깔리는 각종 나물 반찬에 ‘메인 반찬’ 한 가지 정도의 밥상을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 밥이나 국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엄마의 주방 업무 파업은 생각보다 더 빠르게 찾아왔다. “너희들 먹을 것은 각자 알아서 해 먹도록 하라”는 말에 반항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다. 매일 술이나 마시고 새벽이슬 맞으며 귀가하는 것이 일상인 군식구에게까지 밥상의 은총이 내려올 리 없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생선구이 같은 음식은 어쨌든 엄마의 맛과 비슷하다고 우겨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기본으로 들어가는 김치가 아직까진 엄마 음식이니 아주 생경하게 다른 맛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청국장만은 달랐다. 청국장을 얼마나 떠서 넣어야 하는지, 된장을 섞어야 하는지, 김치를 넣어야 하는지 감도 서지 않았다. 그렇게 좋아했던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눈앞에 없으니 허전한 음식이 청국장이었다. 인터넷 레시피도, 허름한 백반집에서 사 먹는 것도 뭔가 영 시원찮았다.

이런 나의 징징댐을 듣던 직장 동료가 이끈 곳이 양재 ‘토속 청국장’이었다. 이미 양재천 인근 직장인 사이에서는 점심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다. 점심 메뉴는 청국장 정식 한 가지다. 인원수만 얘기하면 앉자마자 6~7종의 나물 찬이 깔리는, 전형적인 백반집이다. 청국장 먹기 좋은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커다란 대접에 밥, 부추 무침, 콩나물과 열무김치를 넣고 신나게 비볐다. 팔팔 끓는 청국장도 한 국자 가득 부어 넣으니 ‘아 이 맛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소주도, 맥주도 아닌 막걸리였다. 함께 나온 보쌈 수육에 김치를 싸서 먹었다. 청국장, 고기, 김치, 나물에 술까지 나무랄 데 없는 조합이다. ‘한국인으로 태어나서 이런 맛을 보는구나’ 과장을 보태면 쓸데없는 ‘국뽕’까지 차올랐다.

떨어져 봐야 알게 되는 것이 있고, 헤어져 봐야 소중함을 느낀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던, 냄새나는 찌개 정도로 생각했던 청국장을 사실은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30년 넘는 세월이 걸렸다. 엄마가 만들어 주는 정확한 그 맛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주방 노동에서 엄마가 헤어나올 수 있다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백문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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