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608m
코스: 고흥 팔영산 자동차 야영장 주차장-흔들바위-유영봉-성주봉-생황봉-사자봉-오로봉-두류봉-탑재-원점회귀
거리/총소요시간/이동시간: 약 3km / 4시간 / 2시간
난이도 ★★★☆
등산 성수기가 왔다. 사계절마다 제각기 산의 매력이 다르지만, 요즘은 산으로 피크닉 가기 최고의 계절! 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시원한, 봄이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짧아져 가는 듯한 계절이기에 서둘러 채비를 해야 한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한 후 산을 찾는 이들이 많아져 방문객이 적고 ‘등산적 거리두기’가 가능한 코스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수년 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곳을 떠올렸다. 본래 도립공원이었다가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성기리에 있는 팔영산으로 떠난다.
고흥군에 들어서니 차창 밖에 비치는 봉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비등비등한 봉우리들이 뭉쳐있는 것이 마치 주먹을 꽉 쥔 것 같은 모양새다. 직감이 말했다. ‘오늘은 저곳을 오르는 거야.’ 세숫대야에 비친 여덟 봉우리의 그림자를 보고 감탄한 중국의 위왕이 이산을 찾으라는 어명을 내렸고 신하들이 조선의 고흥 땅에서 이 산을 발견했다고 ‘팔영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중국의 왕도 감탄할 만한 단단한 모양새다.
팔영산 자동차 야영장 주차장에서 등로를 찾아 들어갔다. 몇 걸음 뗐을 뿐인데 초록의 터널에 둘러싸였다. 깊은 숲에서나 들어볼 법한 새 소리가 귀를 간지럽히고 계곡물의 연주소리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숲이 먼 곳에서 온 도시여행자를 환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길이 부드러워서일까. 남쪽 나라 산의 포근한 기운 때문일까.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뿐사뿐 보드라운 흙길과 계단을 걸어 흔들바위 쉼터를 지났다. 한 시간 정도 걸으니 첫 번째 봉우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점점 팔영산은 ‘돌산’의 본색을 드러냈다. 야트막하지만 결코 만만찮은 돌산의 본모습을.
‘이거, 보통이 아니겠는데’ 생각하며 가파른 돌길을 올라 첫 번째 봉우리 유영봉에 올라섰다. 그러자 초록빛 융단이 펼쳐졌다. 초록색이라기보다는 형광색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은 쨍하고 반짝이는 초록! 이때만 볼 수 있는 신록의 색이다. 세상에 모든 새 생명이 귀엽듯, 새순이 돋아난 세상은 어여쁘고 찬란했다. 파스텔톤의 연둣빛 초록과 노랑에 가까운 신록, 짙은 소나무색과 올리브색이 한데 어우러진 정경을 보고 봄도 화려할 수 있구나 깨달았다. 초록 융단 뒤로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푸른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봄의 축제였다.
더 대단한 것은 그다음에 있었다. 제1봉인 유영봉 다음으로 성주봉, 생황봉, 사자봉, 오로봉, 두류봉, 칠성봉, 적취봉까지 8개의 연봉까지 가파른 암벽이 이어졌다. 안전장비가 설치되어 있지만 아찔한 길이다. 봉우리들을 오르내릴 때마다 시시각각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해남의 달마산의 암릉이 거대한 공룡의 등껍질 같다면, 고흥 팔영산의 암릉은 수억만개의 공룡 발톱을 레고처럼 끼워 맞춰 쌓아 올린 듯했다.
쫄깃한 심장을 부여잡고 5봉을 넘어 6봉 두류봉에 도달했다. 배낭 한 쪽에 깊숙이 자리했던 종이와 팔레트를 꺼냈다. 눈앞에 성큼 다가온 거대한 7봉 칠성봉과 하늘, 바다와 신록을 종이에 담았다. 봄빛에 영감을 받아 평소에 쓰지 않는 초록색으로 화폭을 채웠다.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산이 다가오는 감도가 다르다. 건조해진 스펀지에 물이 순식간에 스며들 듯 팔영산의 모든 것이 마음속에 쏙 흡수되었다. 마주친 산객이 단 한명도 없었지만 고독하기보다는 느릿한 세상 속 홀로 숨 쉬는 기분이었다.
남도의 야트막한 산인 줄 알았더니 제법 험하고 단단한 돌산, 걸음걸음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 봉우리마다 비석 인증샷을 모으는 재미도 있었지만 화려한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팔영산의 빛깔이 2021년의 봄의 모습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다.
하이킹 아티스트·벽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