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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벤처기업’이 ‘스타트업’으로 변신한 이유

등록 2021-03-12 05:00수정 2021-03-12 09:29

잇(IT)문계 그림
잇(IT)문계 그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아이티(IT) 버블이 전 지구를 휩쓸었습니다. 한국은 아이엠에프(IMF) 구제금융이 들어온 때였기에 차세대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죠. 신기술인 인터넷과 결합하면 모든 게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날 것 같은 기대감이, 지친 나라에 당분을 공급했습니다. 박세리 선수가 쳐낸 벙커에 빠진 골프공처럼 여러 인터넷 기업의 주가도 치솟았죠. 지금 판교 테크노밸리 역할을 하던 강남구 테헤란로에는 ‘묻지 마’ 벤처 자금이 넘쳐났다고 합니다. ‘인터넷’이나 ‘닷컴’, 심지어 알파벳 e나 i만 적절히 버무려놓으면 서너장짜리 파워포인트 문서로 투자를 몇십억 받기도 했대요. 오죽했으면 그 유명한 비비케이(BBK) 사건에도 ‘LKe뱅크’라는 당시 최신식 작명법을 적용한 회사가 끼어있었겠어요.

거품은 이내 꺼졌고, 미국과 한국, 독일은 특히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이 중 독일에서는 2003년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독일 정부가 고기술·고성장 창업 기업에 자금 제공을 위해 설립한 첨단 기술주 시장. 한국의 코스닥에 해당. 1997년 발족)가 사라질 만큼 후폭풍이 대단했다죠. 모두 아는 것처럼 당시 명맥을 지금까지 이어온 기업은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죠. 벤처기업이라는 가슴 설레던 용어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품게 됐습니다. 육성 정책은 상당수 폐기됐고, 알아서 잘 자란 몇몇 기업 외에는 빛 볼 일 없는 시간이 수년간 계속됐습니다.

2010년 들어 철옹성 같은 한국 휴대전화 시장에 아이폰3Gs가 도입된 이후 세상은 다시 한 번 요동치기 시작했어요. 모바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판이 깔리고 벤처 업계에도 오랜만에 훈풍이 불었죠. 과거와 단절이라도 하려는 듯, 벤처기업이라는 용어는 이내 스타트업으로 잽싼 환승을 하더라고요. 과거의 닷컴 버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킨 몇몇 새로운 개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 하나로 ‘오투오’(O2O·Online to Offline)를 꼽고 싶어요. 온라인의 이용자를 오프라인의 무언가와 이어준다는 개념인데, 너무 광범위한 이야기다 보니 스타트업들은 말도 안 되는 예상 시장 규모를 내지르면서 오투오 사업을 한다고 했습니다. 2013~2016년도의 기사를 찾아보면 큰 아이티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오투오라는 말은 아이티판에서 성공을 부르는 부적처럼 쓰였습니다. 물론 배달앱이나 택시앱처럼 청사진을 현실로 만든 사례도 있지만, 과거의 거품 낀 닷컴 기업들처럼 소멸해버린 오투오 기대주들이 적지 않죠.

실리콘밸리와 판교에 있는 기업들이 부채질해 유행한 이런 개념들은 산업 전반으로 퍼집니다. 특히 디지털 전환이 필수로 여겨지는 요즘은 그 위력이 더 대단하죠. 아이티와 상관없는 업종에서도 인공지능, 빅데이터, 블록체인, 클라우드 같은 용어가 붙지 않은 기획안은 결재가 나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특히 고도의 수학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에이아이(AI) 머신러닝이나 빅데이터를 속성으로 가르친다는 학원까지 생기는 건 어불성설 같습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된 개념은 채용 시장에도 있대요. 본래 웹 환경에서 시제품 출시를 위해 필요한 지식을 고루 갖춘 사람을 의미하는 ‘풀 스택(Full Stack) 개발자’라는 표현인데요, 한국에서는 서버 기술부터 서비스 화면까지 모든 것을 다 다루는 전지전능한 개발자라는 뜻으로 왜곡됐죠. 아마도 인사 담당자들이 하나둘 쓰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채용 공고문 대부분에 붙은 관용어가 돼버린 것 같은데, 전문 영역이 확고한 개발자들은 이 표현을 굉장히 허황한 것으로 여기더라고요.

격동기에 많은 도전자가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타깝게 실패한 기업이나 서비스를 욕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칠 솜씨가 뛰어난 속 빈 강정들이 내실 있는 도전자들에게 흘러갈 자금과 관심을 가로채는 건 슬픈 일이죠. 짧은 역사를 돌아보며 확신할 수 있는 건 이용자들의 불편을 집요하게 탐구한 쪽이 마지막 승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유행의 한가운데에 섰던 개념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죠. 거품을 향유하는 사람은 소수였고, 뒷감당을 하는 쪽에 다수가 있었습니다. 유행하는 아이티 업계 용어들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도 좋을 이유입니다.

잇(IT)문계(아이티 기업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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