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세비야에서 만난 오렌지나무 정원. 사진 최이규 제공
반가운 봄비가 내린다. 모처럼 창문을 활짝 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본다. 정원의 풀들도 신난 표정이다. 봄비는 사람만 반가운 것이 아니다. 봄비 오는 날은 식물도 쉬는 날이다. 열심히 일한 후 시원한 물 한 잔을 들이켜듯, 식물도 그동안 조였던 긴장을 풀고 느긋해진 기색이 역력하다. 햇빛과 이산화탄소는 거의 무한정 공급되지만, 물은 부족하기 마련인데 빗물이 차곡차곡 땅속에 쌓여가니 식물 입장에선 여유로울 수밖에 없다.
봄도 되었으니 정원 얘기를 해보자. 정원을 얘기하려면, 식물을 말해야 하는데, 식물을 이해하려면 기후, 특히 강수량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된다. 한반도에는 봄비가 귀하다. 봄은 식물이 한창 성장할 시기다. 이 시기엔 식물은 물을 왕성히 빨아들여야 하는데, 미국 동부에 견주면 4분지 1 내지 절반밖에 안 된다. 우리나라 녹지나 공원, 아파트 단지 정원이 종종 형편없는 모양새인 이유도 상당 부분 여기에 있다. 그저 나무만 심는다고 뉴욕의 센트럴파크가 되진 않는다.
정원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아름답고 생명력 넘치는 정원은 만들기 어렵다. 센트럴파크의 가장 큰 볼거리는 우람한 나무의 쭉쭉 뻗은 가지와 풍성한 그늘인데, 서울은 애초 기대하기 어렵다. 실상 나무가 제공하는 가장 좋은 공간은 나무 아래인데, 거기에 들어가 본 기억은 별로 없다. 그런 그늘을 제공하는 키 큰 나무도 찾아보기 어렵고, 어쩌다 만나더라도 화단에 싸여있기 십상이다. 산보하는 이들이 우스꽝스러운 선 캡을 써야 하는 이유다. 센트럴파크에선 1시간을 걸어도 뙤약볕을 쬘 일이 없다. 수만개의 이파리가 선 캡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 도시의 공원은 과도한 양의 콘크리트가 바닥을 덮고 있는 삭막한 곳과 다름이 없다.
스토우 정원의 그로토(작은 동굴). 사진 최이규 제공
정원은 본래 사막이 흔한 중동의 문화다. 정원 문화의 번성과 전 세계 전파를 따라가다 보면, 와인 루트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만큼 건조한 기후와 정원이 깊은 관계에 있다는 걸 방증한다. 중동은 물이 귀한 지역이다. 그곳에선 정원을 파라다이스니 이상세계니 하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추상적 표현이 아니라 실제 귀한 물이 있는 장소를 뜻한다. 중동의 정원은 물이 있는 곳에 담을 높게 치고 뜨거운 모래바람을 막는 데서 시작했다. 그러니 정원은 생명의 표현이고, 생명은 곧 그늘로 측정된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중동 정원의 가장 극적인 사례는 모로코 마라케시의 아그달 정원이다. 이곳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정원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북아프리카 최고봉 투브칼과 아틀라스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수를 모아 만든 저수지를 중심으로 무화과, 대추, 석류, 아몬드, 올리브, 살구 그리고 각종 시트러스(감귤류) 나무가 끝없이 펼쳐진다. 과수원에 가깝다. 물은 잎과 그늘을 만들고, 꽃과 열매의 형태로 바뀐다. 목이 타들어 가는 사막의 순례자를 상상해 보자. 모래색과 구분되지 않는 적황색 담을 지나자마자 녹색 그늘과 오렌지 꽃향기가 가득한 세상이 펼쳐진다면 그곳이 파라다이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반도에 정원 문화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자연이 그만큼 혹독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중동에 거주했던 이들은 정성껏 물을 모으고 때로 독점해야만 생존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물을 ‘물 쓰듯 쓸 수 있는 곳’에 살았다. 유럽 땅으로 넘어간 정원 문화가 꽃을 피운 곳도 여름이 가혹하리만큼 덥고 건조한 곳이었다. 로마 근처 티볼리에 남아있는 추기경의 정원들,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등이 대표적이다. 이탈리아의 에스테 정원이나 란테 정원은 그야말로 물을 숭배하는 곳이다. 물은 곧 하느님의 축복이다.
피에트 우돌프가 조성한 뉴욕의 하이라인 정원.
사실 서구에서 본격적으로 퍼진 정원이란 개념은 조금만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끼워 맞추기다. 담양의 소쇄원도 정원이고, 일본 사찰의 자갈밭도 정원이고, 아그달 정원의 과수원도 정원이고, 타지마할도 정원이고, 영국의 장미밭도 모두 정원이라고 부른다. 성격이 다른 공간들을 모두 정원이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베르사유 정원은 오히려 건축에 가까운 조경이다. 정원 자체가 프랑스의 축소판이었고, 진정한 궁궐이다. 루이 14세는 자신을 프랑스 영토와 동일시했다. 무늬를 수놓은 듯한 화단은 그가 입었던 옷을 표현한 것이다. 치열한 전쟁을 치렀던 루이 14세는 왕이기 전에 장군이었다. 궁 건설에 막대한 노력을 들인 이유다. 베르사유 정원의 장대한 숲과 물은 막강한 프랑스 육군·해군이 정렬한 모습을 상징한다. 대계단 아래 라토나 분수에서 물을 뿜는 개구리와 도마뱀 조각은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정적들과 민중의 울음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쉽게 느끼기 힘들다. 멋진 사진을 보고 막상 가면, 생각보다 밋밋하다고 느낀다. 왜 그럴까? 실제 자연은 매우 불규칙하고 복잡해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원은 자연의 복잡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면서도 감각적인 혼란을 방지하는 장치들을 탑재해야 한다. 단위 면적당 식물 종의 수를 제한하고, 그룹으로 묶거나, 뚜렷이 경계를 나눠야 한다. 튤립의 원산지는 카자흐스탄 톈산산맥의 산비탈이지만, 튤립 본연의 화려한 아름다움은 캐나다 부차트 가든에서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원리다. 일본의 자갈 정원은 흰 자갈만을 남기고, 흙과 낙엽과 잡초와 다른 색깔의 돌을 골라내 정체성을 획득했다.
화훼류를 중심에 둔 장식적인 정원이 영국에서 유행하고, 영어권 문화가 세계 표준이 되면서 ‘정원=꽃밭’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중산층이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타샤 튜더류의 농가 정원은 인기 높은 취미였다. 물론 스토우나 로샴 같은 영국의 대표적 풍경식 정원에도 이탈리아 정원 같은 분수가 있고 그로토(grotto·작은 동굴)도 있다. 그러나 건축은 베낄 수 있었지만, 식물은 옮겨올 수 없었다. 아그달 정원에서 볼 수 있었던 지중해 연안의 수목들은 북쪽일수록 키우기가 어렵다.
피에트 우돌프가 조성한 뉴욕의 하이라인 정원. 사진 최이규 제공
우리는 종종 화훼 정원에 낭비가 많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가한다. 과거 술탄의 정원은 나무 위주였다. 오색찬란한 멋진 과일들이 주렁주렁 열린 감귤류 정원은 사막 생활에선 실용적인 풍경이었다. 깨끗한 수분을 공급하는 필수불가결한 역할을 했다. 꽃나무 아래서 양탄자를 펼쳐놓고 즐기는 멋진 여유는 덤이다. 참나무 같은 낙엽수가 주종을 이루는 온대 지방에서 장미꽃이 그런 생명력을 대신했다. 차가운 습기에 몸을 떨었던 영국 귀족에게 지중해의 오렌지 향기는 노스탤지어였다. 장미 꽃밭을 술탄의 오렌지나무를 그리워하며 심은 것이다.
영국식 정원에 반기를 든 인물이 네덜란드의 정원 디자이너, 피에트 우돌프다. 그의 정원은 꽃뿐만이 아니라 식물 전체를 이해하고, 그 진가를 인정하라고 한다. 줄기와 잎, 가시와 잔털, 씨앗 주머니 등 식물의 뿌리부터 꼭대기까지 다양한 감각 요소들이 주는 질감과 향기, 색을 알아보라고 한다.
피에트 우돌프와 함께 찾은 몇 년 전 가을 뉴욕 하이라인 정원에는 키 큰 풀에서 나는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계절적인 변화와 시간에 따른 변신이 우돌프가 만든 하이라인 정원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식물들의 독특한 잎 모양과 색이 야릇하고도 이국적인 풍취를 자아낸다. 죽은 식물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겨울정원의 매력은 절정기에 달한 생명력 넘치는 꽃들을 보는 것처럼 아름답다.
아직도 많은 지자체가 ‘정원’이란 문패를 달고 행사용 대규모 꽃밭을 조성하고, 갈아엎는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거기에 사용된 흙과 거름은 행사가 끝나면 유실되어 강과 개울을 오염시킨다. 공모전이라는 포장 아래 한두 해도 못 넘길 조잡한 시설물도 다반사로 지어진다. 단기간 소모하는 게 아니라 땅을 돕고, 거기에 깃드는 동물들과 공존할 수 있을 때 정원은 완성된다. 우리나라의 봄은 비가 귀한 계절이다. 식물에도 그렇고, 곤충과 새들에게도 그렇다. 나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목마른 한 생명을 위해서 작은 그릇에 물을 담아두는 정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