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잡’이라는 표현이 흔해진 시대입니다. 본업 이외 수익원이 더 있다는 뜻이죠. 언제부턴가 ‘부업’이라는 우리식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것 같아요.
영화 <기생충>에서 온 가족이 모여 피자 박스를 조립하는 식의 전통적인 부업 말고도 여러 형태의 일감이 등장해서일까요. 직장인 30%가량이 ‘N잡러’(두 가지 이상 일을 하는 사람)’라는 조사 결과도 있더군요. 쇼핑몰을 연다거나 대리운전, 배달 대행 등 ‘긱(Geek) 경제’에 참여하는 모습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죠. 급여가 부족해서, 혹은 자아실현을 위해서, 누군가는 조기 은퇴를 꿈꾸며 바쁘게 움직입니다.
판교 사람들은 ‘N잡’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더라고요. 대신 대부분 ‘사이드 프로젝트’ ‘사이드 잡’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N’이 본업과 무관한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면 ‘사이드’는 본질과 결이 비슷한 무언가를 뜻하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들이 퇴근 후 소일거리 삼아 스타트업들이 필요로하는 그래픽들을 만들어 준다든가, 개발자들이 개인적으로 출시하고 싶은 서비스를 제작하는 등의 활동이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른바 ‘재능 마켓’으로 불리는 곳에는 지금도 아이티(IT)업계 종사자들이 용돈 혹은 그 이상을 벌 만한 일감들이 넘쳐납니다. 사회 곳곳에서 디지털 전환 수요는 커지는데, 검증된 실력자들은 부족한 현실 때문이죠.
직장인 커뮤니티나 메신저의 오픈 채팅방을 살펴보면 한결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갑니다. 창업에 준하는 각오로 ‘사이드 프로젝트 같이 하실 분’을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죠. 아이디어를 도식화해 둔 기획자가 디자이너와 개발자를 구한다거나, 두세명이 모여 어느 정도 진도를 빼놓은 프로젝트를 화룡점정 하려고 추가 팀원을 구하는 식입니다.
이들은 완성된 제품을 출시해보고 반응이 시원찮으면 ‘없던 일’로 하는 걸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당연히 한동안 수익은 기대하지 않죠. 대신 반응이 좋거나 대박이 터질 경우를 대비해 지분 관계나 수익 배분을 명문화해 둡니다. 한동안 밤잠을 줄여 어엿한 기업의 공동 창업자가 될 가능성에 투자하는 거죠.
저 같은 ‘잇(IT)문계’는 그저 부럽기만 합니다. 창업을 염두에 둔 초기 단계 팀 구성은 대부분 개발자와 기획자, 디자이너 정도로 정리되기 때문이죠. 일부 능력자들은 1인 기업이 되어 제품을 출시하기도 하는데, 코딩이나 서비스 도식화 능력이 필수라는 점은 변함없습니다. 모든 게 완성된 뒤 진행되는 경영 활동이 본업인 비개발자들에게 선순위 번호표는 오지 않죠. 판교 밖 회사원 시절엔 한 번도 고민한 적 없던 사실인데, 오랜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제품 제작 과정에 참여해본 적 없다는 점이 원통하더라고요.
몇 달 전 스타트업을 창업해 6년 차에 접어든 지인을 만났습니다. 어려운 고비도 여러 번 넘기고 몇 번의 투자 유치도 경험한 그는 “요즘은 창업하기 너무 좋은 시기”라고 했어요. 여론 감시망이 촘촘해져서 대기업들이 옛날처럼 무턱대고 소기업을 모방하기도 쉽지 않고, 벤처 투자 자금이나 창업 지원 제도도 많이 생겨서라고 합니다.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팀을 규합하고 실행해 보라더군요. 집에 와서 컴퓨터를 켜고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서비스 기획안을 적자니 몇 분 지나지 않아 가슴 한쪽이 답답해졌습니다. 스태프 업무에 십수년 젖어버린 나의 몸뚱이와 두뇌가 원망스러웠어요. ‘공부 어설프게 할 것 같으면 기술을 야무지게 배워라’라고 했던 어른들 이야기가 문득 떠오릅니다.
그래도 꿈은 버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둔 아이디어 수십개 중 점점 뾰족해지는 생각을 오랫동안 구체화한 게 두어개 되거든요. 신선한 아이디어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개발자와 기획자, 세상에 없던 유아이(UI)를 그려보고 싶은 디자이너를 조심스럽게 찾아보려고 해요. 제 생각에 공감한 사람들이 고스란히 이사회 구성원이 될 수도 있잖아요. 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는 게 요즘 의장님들 사이에서 유행인 것 같던데, 저도 잘 풀리면 그렇게 하려고요. 허언이라도 질러놔야 팀이 구성될 것 같습니다. 하하.
잇(IT)문계(판교 아이티 기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