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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너럭바위를 바라보다

등록 2021-02-19 07:59수정 2021-02-19 09:11

데이터양이 중요한 디지털 지구로 이주한 인류
사용 빈도 적은 건 무엇이든 사라지는 세상

‘바위는 사라질 거야.’

나는 서랍을 뒤적이며 생각했다.

그건 한갓 바위일 뿐이니까. 바위는 가치가 없다. 돈도 안 되고 먹을 수도 없고, 농작물을 심거나 건물을 올릴 수도 없다. 그저 크고 파도가 철썩이고 조개가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바위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 CD는 사라진 듯했다.

서랍을 다 뒤집어 안에 있는 것을 늘어놓아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분명히 여기 넣어두었는데.’

낡은 종이상자에 쓰인 ‘내 보물, 중요, 건드리지 말 것’이란 글씨가 허망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였더라. 재작년이었던가. 그때 잘 놓아둔답시고 굳이 다른 데 놓았을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창밖에서 찌르릉 소리가 들렸다.

나는 먼지를 헤치며 일어나 밖을 내다보았다. 언덕 너머 사는 예지씨가 가벼운 옷차림에 배낭을 메고 자전거 안장에 앉아 벨을 찌르릉찌르릉 울리고 있었다.

“사라지셨나 싶어 불러봤어요. 어제오늘 도통 안 보이시길래.”

“예, 살아있어요. 물건이 없어져서 집 안을 뒤집어놓고 있었어요.”

“여느 때와 같네요.”

예지씨는 끈을 단단히 맨 운동화로 페달을 돌려 보고, 자전거 브레이크를 당겨보았다. 그 말을 들으니 자기 자전거 부품이 다 제자리에 있는지 걱정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어릴 때 산 인디 밴드 CD가 없어졌어요.”

내가 말했다.

“정말 좋아했는데 말이죠. 공연마다 쫓아다녔고 밤낮으로 들었죠. 팀도 해체되어서 다시 구할 수도 없는데.”

“그래도 없어졌다면 그렇게까지 소중하지 않은 물건일 거예요.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예지씨가 말했다.

“자주 꺼내 보지 않았다는 뜻이잖아요. 너무 아쉬워하지 마세요.”

“그도 그러네요.”

예지씨도 자기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지씨는 운동화로 돌을 탁탁 쳐서 흙을 떨구며 말을 이었다.

“제 옆집 할아버지는 요새 하도 물건을 잃어버려서, 중요한 물건을 침대맡에 늘어놓고 주무신대요. 아침에 일어나면 잘 있는지 하나하나 만져봐서 확인한 다음에야 하루를 시작한대요.”

“좋은 팁이네요. 앞으로 나도 그래야겠어요.”

아쉬웠다. 어쩌면 이제 그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에 나밖에 안 남았을지도 모르는데. 아마 그래서 없어졌겠지. 관리국에서는 쓰는 사람이 하나뿐인 물건에 소중한 바이트를 낭비하고 싶지 않을 테니까. 많이 쓰는 물건이 낭비가 적겠지. 복제만 하면 되니까.

예지씨가 자전거 페달을 빙글 돌리며 물었다.

“지우씨, 오늘 바위에서 집회가 있어요. 나오실 거죠?”

“아, 나가야지요….”

나는 말을 흐렸다.

“예지씨, 저는 솔직히 말해서 바위는….”

“못 지킬 것 같다고요?”

“네. 그렇잖아요. 바위는 쓸모가 없어요. 먹지도 못하고. 바위가 없으면 그 공간을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겠죠. 다른 동네에서 우리더러 이기적이라고 욕해요.”

“다 아는 이야기네요. 그래도 오실 거죠?”

“그래야지요.”

예지씨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언덕을 달려 올라갔다.

자전거가 지나간 경로를 따라 바큇자국이 이어졌다. 그 궤적을 따라 길이 생명을 얻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흐릿해 보였던 잡초가 싱싱하게 살아났다. 새파란 잎맥이며 맺힌 이슬이며, 그 이슬에 반사되는 햇빛까지도 선명해졌다. 지저분한 물감을 흩트린 듯했던 길가에 분명한 형체를 가진 돌멩이들이 나타났다.

예지씨는 아침이면 어김없이 마을길을 돈다. 골목을 돌고 샛길을 달리고, 밭두렁과 바닷가를 달린다. 마지막에는 산 아래에 자전거를 매어두고 등산로를 오른다. 정상에서 마을을 한참 내려다보다 온다. 그렇게 아침에 한 바퀴 돌고 저녁에 거꾸로 돈다.

예지씨 집이 없어졌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다. 어느 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와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예지씨는 하루 정도는 망연자실 빈터에 앉아 있었지만, 다음 날에는 다시 자전거를 끌고 마을길을 돌았다. 지금은 빈터에 천막 하나 치고 살고 있다고 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위로하면서도 뒤에서는 자업자득이라며 흠을 잡았다.

‘그렇게 밖을 싸돌아다니는데 집이 자리에 붙어 있겠나….’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예지씨 같은 사람이 없다면 여기처럼 사람 많이 안 사는 동네 길은 금방 사라질 텐데. 그러면 우리는 오도 가도 못하고 고립되고 말 텐데.

자기 다짐 같은 말이지 싶다. 나는 그 사람처럼 돌아다니지 않겠노라고. 나는 현명하니 집에 틀어박혀서 내 재산이나 지키겠다고.

*

세상의 용량이 부족해진 지는 오래되었다.

거리마다 전광판이 세워져 있고 실시간으로 데이터 잔량 주의보와 경보를 띄운다. 경보가 뜬 지역은 지자체에서 집에 붙어 있으라고 권유한다. 그런 날에는 뭐가 없어질지 모르니 자기 물건이나마 알아서 지키라는 뜻이다. 가족과 함께 있으라고도 한다. 잔량이 정말 부족하면 사람도 실종된다는 말도 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경고는 전부터 있었다. 인간의 활동은 늘 쓰레기와 엔트로피를 양산한다. 디지털 세계인 이곳이라고 다르지 않다.

데이터과학자들은 이미 회복할 수 있는 선은 넘어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종말의 시계를 늦추는 것뿐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도 대기업은 광고를 쏟아내고 신제품을 시장에 풀어놓는다.

현실에서는 이미 일어난 일이다. 쓰레기와 공해의 임계점을 넘어버린 인류는 마인드업로딩을 통해 이 가상현실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예정된 종말을 맞이하느니 다음 세대를 위해 한 세대만 지구를 비워놓자는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거부하던 사람들도 한번 물꼬를 트니 우르르 몰려와 정착했다. 가상현실은 자원과 재화로 넘쳐났고, 공해도 부동산 걱정도 없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도 쓰레기 데이터는 쌓였고, 무한해 보였던 서버 용량도 다 차고 말았다.

관리국에서는 결단을 내렸다. 합리적인 결단이었다. 민주적이기도 했다.

<쓰지 않는 것부터 줄여가겠습니다.>

듣지 않는 음반, 읽지 않는 책,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 가치 없는 것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까지. 우리의 세계는 이제 철저히 효율성의 원칙에 의해 재정비되고 있다.

쓰지 않는 물건은 사라진다. 인적이 드문 장소는 없어진다. 때로는 산이나 개울이 없어지고, 어느 날에는 마을 하나가 통째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계속 쓰거나 지켜보아야 한다. 양자역학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것이 불확정하여 관찰로 고정해야 하는 셈이려나.

*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에 나는 통장이며 도장이며 신분증이며, 없어지면 안 될 것들을 배낭에 쑤셔 넣고 너럭바위로 향했다.

너럭바위는 마을 근처 바닷가에 자리한, 길이 5㎞에 너비가 3㎞쯤 되는 큰 바위다. 처음 서버 열 때 지형을 무작위로 뿌리며 생겨난 명소 중 하나다. 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지형도 많다. 이곳은 외지인들이 돈을 내고 찾아오는 종류의 관광지가 아니다. 마을 사람들만 좋아했을 뿐, 이름도 없고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도 못했다.

바위에는 몇 사람들이 와서 앉아 있었다. 예지씨도 그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처음만 해도 쉬운 일이려니 했다. 이 큰 바위를 혼자 다 눈에 담기는 어렵지만,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쳐 같이 본다면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못 볼 것 같으면 뭐하러 힘들게 이주해왔겠느냐고 했다. 그때만 해도 다들 사이도 좋았다.

앉으려는데 구석에서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바위는 없어질 거야!”

우체국 옆에 사는 전씨 아저씨였다.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져서 고래고래 아우성을 치고 있다.

“바위는 공간 낭비만 되고 돈도 안 되어! 이거 없애고 관리국에 내면 그만큼 데이터 보상이 있다잖아!”

“데이터는 써버리면 그만이에요. 얼마를 받든 그게 얼마나 가겠어요.”

보호회 의장이 말리고 있었다. 전씨 아저씨 뒤와 보호회 의장 뒤에는 사람들이 패가 나뉘어 팔짱을 끼고 대치하고 있었다.

“어제는 우리 집 식탁이 날아갔다고! 식탁이 없으면 밥은 어디서 먹으라는 거야?”

“식탁은 또 어디서 구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바위는 사라지면 다시는 생겨나지 않아요.”

“식탁이 내 데이터야. 이 바위가 아니라!”

전씨 아저씨는 미워 죽겠다는 듯이 바위를 발로 콱콱 밟았다.

“이럴 시간에 자기 집 마당에 있는 돌멩이 하나라도 지키란 말여! 이렇게 나돌아다니는 동안 집 홀랑 날아가면, 누가 책임져줄 거야! 갑시다! 가요! 쓸데없는 짓들 말고 제 데이터나 지켜! 어차피 이놈의 바위! 결국 없어진다고!”

분위기가 심상찮아서 쭈뼛대는데 저 멀리 앉아 있던 예지씨가 나더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눈치를 보며 그 옆에 앉았다.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예지씨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프락치요?”

“관리국에서 보낸 사람이 숨어들어와서 몇 사람에게 데이터를 쥐여 주며 꼬신대요. 집회를 그만두게 하면 그 몇 배로 준다고요.”

나는 제자리에서 열심히 뜀뛰기 재주넘기를 하며 펄펄 뛰는 전씨 아저씨를 힐끗 보았다. 말끝마다 “내 데이터!” “내 데이터!” 하는데, 속내를 숨길 요령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겠지요. 관리국은 전문가인데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당해내겠어요.”

건넛마을에서도 우리처럼 마을 사람들이 큰 나무 하나 지켜보자고 한 적이 있다. 거기도 처음에는 다들 사이가 좋았다고 들었다.

몇 해 지나자 이상스레 다툼이 많아졌다. 사람들이 둘로 갈라져 서로 흉보기 시작하고, 그러다 점점 원수처럼 악다구니를 쓰고, 남은 사람도 싸움에 질리고 지쳐 하나둘 흩어지더니, 마지막에는 한 명만 남았다고 했다. 그 사람은 혼자 나무 앞에 천막을 치고 지켰다. 그러다 어느 날 몸에 데이터 교란이 와서 앓아누웠는데, 다음날 가보니 나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사람 거기서 그렇게 울었단다. 본인 잘못도 아닌데….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말마따나 뭐 손에 떨어지는 것도 없는 일인데, 얼굴 붉혀가며 자리 지키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나.

밤이 깊어지자 바위에는 예지씨와 나만 남았다. 나는 손을 비비며 바위를 바라보았다. 날이 으슬으슬했다. 관리국에서 집회 장소에 일부러 강풍이나 비바람을 내려보낸다는 소문도 있다.

“바위는 못 지킬 거예요.”

내가 예지씨에게 속삭였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네, 저도 그럴 것 같아요.”

예지씨가 답했다. 그 말을 듣자 반가웠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엉덩이를 움찔움찔하며 일어나려 했다. 돌아가는 길에 따듯한 커피라도 사서 예지씨와 나눠 먹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예지씨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바위를 바라볼 뿐이었다. 끼룩끼룩 울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며, 하얗게 부서지는 거품을.

“못 지킬 것 같다고 안 했어요?”

“네, 그럴 것 같아요.”

나는 다시 움찔움찔했고 예지씨는 그대로 있었다.

“못….”

“네.”

“모….”

“넵.”

그래서 나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예지씨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나는 잠시 뻣뻣해졌다가 슬근슬근 몸을 붙이며 같이 기대었다.

바람이 불었고 갈매기가 끼루룩 울었다. 파도가 부서져 우리 발치까지 부글거리는 거품을 흘려보냈다가 물러났다. 별은 보석처럼 반짝였고 구름이 달을 가리며 황금빛으로 빛났다. 바다에 비친 달이 물결에 금싸라기처럼 부서졌다. 나는 그 모두를 눈에 담았다. 옆에 기대앉은 예지씨와 함께.

아름다웠다. 내 말은, 풍경이 말이지. 뭐 어쨌든.

김보영(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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