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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권력 남용한 전제군주의 종말

등록 2021-01-07 07:59수정 2021-01-07 11:36

김태권 그림
김태권 그림

“펄펄 끓는 피의 강(이)…폭력으로 남을 해친 자들을 삶고 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12곡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핏물 밖으로 나오면 켄타우로스가 달려와 활을 쏜다. 절반은 말, 절반은 사람, 그리스 신화의 그 켄타우로스다. 그런데 이 처참한 곳에 낯익은 이름이 보인다. “여기 알렉산드로스가 있다.”

우리가 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일까? 동명이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맞는다고 볼 근거가 많다. 피로스 왕이랄지 훈족의 아틸라랄지, 다른 유명한 정복자들도 여기서 벌을 받는다.

권력을 잡기 전 멀쩡하던 사람이 권력을 잡은 다음 달라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본다. 국회 의석 몇 자리 더 얻었다고 뻔뻔하게 구는 것이 인간인데, 세계 제국을 손에 넣으면 오죽할까. 플루타르코스가 쓴 전기를 보면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전과 후의 알렉산드로스는 다른 사람 같다. 거지꼴을 한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무례하게 굴어도 유쾌하게 받아넘기던 초심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를 신의 아들이라 불러주는 아첨꾼들에 둘러싸여 옛 친구를 숙청한다. 전쟁터에서 자기 목숨을 구해준 장군 클레이토스를 술김에 쳐 죽였고, 입바른 소리를 하던 역사가 칼리스테네스는 죄를 만들어 얽어 넣었다. 전제군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구실을 댈 수는 있지만, 슬픈 변명이다.

고대 로마의 재기발랄한 작가 루키아노스는 <죽은 자들의 대화>라는 작품을 썼다. 그가 묘사한 저승은 지옥과 천국이 따로 구별되지 않지만, 어떤 이는 이승에서 누리던 부귀영화를 그리워하며 자기가 해친 사람에게 보복을 당한다. 스스로 벌을 받는 셈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저승에서 아버지 필립포스를 만나 ‘왜 멀쩡한 인간 아버지를 놔두고 신의 아들 행세를 했냐’며 핀잔을 듣고, 디오게네스를 만나 ‘저승에 와서도 이승의 명예에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웃음을 받으며, 자기가 죽인 클레이토스와 칼리스테네스의 원혼에 쫓겨 도망친다.

르네상스 시대의 작가 라블레가 쓴 <팡타그뤼엘>의 제30장에는 이승에서 잘 나가던 사람은 저승에서 초라하게 지낸다는 규칙이 나온다. 이승에서 영광을 누리던 알렉산드로스는 저승에서 “낡은 신발을 수선하며 어렵게 살아가고”, 임금님이 된 디오게네스에게 매질을 당하며, 동료 거지의 금화를 훔치는 신세다.(동료의 정체는 페르시아 제국을 세운 퀴로스 대제였다.)

조너선 스위프트가 쓴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거인국과 소인국 말고도 3부에 그럽덥드립이라는 작은 섬나라가 나온다. 저승 사람을 이승으로 불러 내 대화를 나누는 곳이다. ‘거꾸로 저승여행’이랄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걸리버를 만나 “자신이 독살당한 것이 아니라 술을 많이 마셔” 죽은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신랄한 풍자다.

전쟁을 싫어하는 현대인인 나는 알렉산드로스나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 <신곡> 지옥편 제32곡에는 한 얼음 구덩이에 갇혀 치고받는 형제가 나온다. 형제의 이름은 ‘알레산드로와 나폴레오네’, 즉 알렉산드로스와 나폴레옹이다. 물론 두 정복자와는 다른 사람이다.(단테가 <신곡>을 쓰고 5백 년이 지나서야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되었다.) 아버지의 유산을 놓고 정치적 파벌을 갈라 다투다가 서로 죽게 했고, 형제를 죽인 죄로 얼음 지옥에 갇혔다. 동명이인이라고는 해도 신기한 우연이다.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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