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혼자 노는 모든 즐거움’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ESC가 찾아낸 작은 즐거움이 힘겨운 코로나 시대를 버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020년 한해 ESC 표지를 모았다. 일러스트 이임정 기자
‘그인가?’ 우연히 한국방송(KBS) 드라마 <한 번 다녀왔습니다>를 보다가 그를 발견했다. 악다구니 시장 상인. 그는 ‘발견’이 맞는다. 그에게 연락했다. “그 상인이 당신인가요?”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반가웠다. 그는 14년 차 배우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그동안 그는 영화나 드라마 대본에 ‘계산원’, ‘피해자 친구의 가족’, ‘주인공 전 직장 홍보실장’이었다. 화면에 몇 분 얼굴을 내밀다 사라졌다. <한 번 다녀왔습니다>에선 달랐다. 종방까지 ‘꽈배기’(그가 맡은 배역)를 볼 수 있었다.
너무 평범한 얼굴, 그래서 배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단역, 김가영(40). 그의 ‘발견’은 내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봄날 새순에 비치는 햇살 같았다. 코로나로 숨죽이며 납작해진 내 시간이 열기구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그와 인연을 맺은 때는 6년 전. 당시 토요일 편집국 당직자였던 나는 온라인용 기사 몇 건을 써야 했다. 당시 한국 사회를 강타한 건 드라마 <미생>. 주인공 흙수저 인턴 장그래의 생존기는 부의 편중, 낡은 조직 문화, 꼰대 상사로 대변되는 소통 부재, 청년들의 강퍅한 현실 등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촘촘하게 드러냈다. <미생>에서 눈에 띈 건 장그래 옆자리 ‘영업2팀 비정규직 장미라 사원’ 역을 맡은 김가영씨였다. 그는 ‘미생’에서도 ‘미생’이었다. 주인공 장그래 자리로 카메라가 줌인하면 살짝 걸쳤다가 사라졌다. 계산기를 두드리거나 서류를 장그래에게 넘겨주거나 전화 받는 게 다였다. 그는 소품이었고, 그저 배경이었다. 당시 인터뷰로 안 사실. 2006년부터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고, <변호인> <카트> 등에도 출연한 배우였다는 것이다.
<미생> 이후 그는 아이를 낳았다.(배우 진모가 남편이다.) 그 때문에 한 영화의 조연 자리를 포기해야 했다. 수학여행 지도사, 피자집 알바, 유아 연기 지도 등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그는 “운 좋게” ‘꽈배기’에 캐스팅됐다. “이제는 하루 한명은 알아보는 배우”가 되었다며 기뻐한다. 코로나 확산에도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대학 때 교수가 ‘너는 못생겨서 안 뽑힐 거야’라고 했지만, (내) 연기를 보고 ‘연기 절대 포기하지 마라. 버텨라. 좋은 일 생길 거야’ 했는데, 이젠 연기 말고 할 게 없다”며 웃는다.
우리가 버틴 2020년은 그의 14년과 닮았다. 암울했다. 무시무시했다. 절망이 엄습했다. 출구가 막힌 터널 같았다. 어디에도 답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버텨서 결국 웃는 날을 맞이한 것처럼 우리도 버티면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행복은 견디는 자에게 오는 법.
소설가 김훈은 인간에게 소중한 건, 변하는 것보다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인내하고 버티는 힘을 가졌다는 건 변할 수 없는 절대 명제다. 하지만 버티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유용한 기술이나 도구는 지금의 인류 문화를 만드는 데 공이 컸다. 그래서 ESC가 준비했다. 2020년 마지막 날, 1년간 ESC를 빛낸 필자들과 기자들이 2020년을 견디게 해준 위로의 기술들을 대방출한다. 누구는 집 안을 찍은 흑백사진이라고 했고, ‘산책단’을 꾸린 것이며, 숨이 턱턱 막힐 때까지 달린 것이라고 했다. 티티에스(TTS) 서비스, ‘댓글 북’ 등 상상도 못 한 위로의 기술들, 버팀의 기술들을 전한다. 2021년에도 코로나는 여전할 듯하다. 하지만 가다 보면 길이 생기고, 파고들다 보면 ‘선수’가 되는 것처럼 내년도 버티다 보면 배우 김가영의 웃음 같은, 햇살 냄새 가득한 날을 맞지 않을까.
“독자님들, 오늘 하루도 견디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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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2020년 ‘거의 모든’ 위로의 기술 알려드립니다
★위로 단어장 A~F
‘방과후 산책단’ 만들어 서로 토닥토닥
집 안 곳곳 스마트폰 카메라로 찰칵
중고 장터, 전자책에 ‘빠져 빠져~’
한해를 살아낸 것만 해도 수고했다고, 고생했다고, 그저 잘했다고 인사를 주고받는 2020년의 마지막 목요일. ESC와 함께한 필진과 기자들이 준비한 ‘위로 단어장’이 매일을 지탱하게 한 소소한 위안거리를 전한다. 올 한해를 돌아보는 서른한명의 짧은 글과 그림을 알파벳순으로 모았다. 걷거나 뛰는 기쁨, 달콤한 아이스크림이 빚은 소란, 떨어져 있어도 연결되는 방법과 새로 찾은 유대감 등 일상을 발견하고 탐험하는 저마다의 기술이 가득하다. 각자에게 힘이 되어준 무언가를 함께 떠올려 주시기를. 정리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After school walk club 방과후 산책단 역병이 창궐해 여행은커녕 생계가 막막했던 올해 봄. 어디에도 갈 수 없었던 나는 매일 동네 숲을 산책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걸었던 산책길의 풍경을 소셜 미디어에 올렸다. 그 산책으로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어보라는 지인의 조언에 미심쩍어하며 ‘방과후 산책단’을 꾸렸다. 평일에, 여자들끼리, 소규모로 하는 산책이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오래 걸어야 하고, 저마다 준비해온 시를 읽는 시간이 포함된 ‘불편한 산책’이었다. 동네 숲에서 시작한 산책단은 제법 인기를 끌어 경주로, 제주로 뻗어 나갔다. 캠핑 장비를 짊어지고 여자들만의 백패킹을 하기도 했다. 산책단에 온 여성들은 다정하게 서로를 챙기고 배려했다. 다양한 방식으로 내 삶을 지지하고, 산책단을 사랑해주었다. 산책단 덕분에 나는 빚을 내지 않고 올해를 건너왔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어 ‘방과후 산책단 송년 사은 대잔치’를 열어 부문별 수상자를 발표했다. 최다 참가상, 최고 개그우먼상, 최고의 뒷배상, 최소 배낭상 등. 시절이 이 모양이라 파티나 시상식은 없었다. 페이스북에 발표를 하고, 수상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택배로 보냈다. 지난주 늦은 밤, ‘최연소 최다 참가상’을 수상한 친구가 선물과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30대 초반의 비혼여성인 그녀는 “이렇게 살다가는 내 영혼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과후 산책단’을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만 타인을 환대할 수 있는 사람인데, 산책단에서 환대를 받으며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고 했다. 미래를 생각하며 현재를 돌보지 않는 삶을 오랫동안 살다 보니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법을 몰랐다고도 했다. 지금 이곳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즐길 수 있는 사람,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자신에게 올해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나를 선정해 나름의 시상식을 열어준 셈이었다.(부상은 딸기 네 상자와 쿠바 럼 한 병이었다.) 그날 밤 나는 자신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를 만난 백아가 된 기분이었다. ‘방과후 산책단’ 덕분에 2020년이 내게는 기적 같았다.
김남희(여행작가)
Animal Crossing 모여봐요 동물의 숲 코로나19가 나타나기 전까지 집순이를 자처하며 망설이다 미루고, 고민하다 말아버린 만남과 여행 그 모든 것들이 그리워진 2020년. 감염에 대한 불안과 물리적 만남의 단절로 우울감이 심해질 때, 나를 위로해준 건 게임 ‘동물의 숲’ 친구들이다. 아름다운 나만의 섬을 가꾸고 동물 주민들을 초대하고 나니, 막연하게 꿈꾸던 섬살이 기분을 본격적으로 내 볼 마음이 생겼다. 나뭇가지로 낚싯대를 만들어 물고기도 잡고, 나무를 심어 과수원을 가꾸니까 주렁주렁 과일이 열렸다. 물고기와 과일을 상점에 팔아 번 돈으로 집도 짓고, 돌과 점토 같은 자연물로 가구와 생활용품도 만들었다.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 하나하나 내 손으로 꾸려가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섬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이 의무가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점이야말로 좋았다. 어느 날은 해먹에 누워 종일 파도소리만 듣고, 밤이면 캠프파이어 앞에 앉아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밤하늘만 쳐다봤다. 현재와 동일한 시간이 흘러가는 이 세계의 사계절과 낮과 밤, 그리고 바다로 지는 노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놀라운 기술력에 여기가 혹시 내가 꿈꾸던 타이의 어느 작은 섬은 아닐까? 가장 좋은 건 동물 친구들이다. 생일파티도 열어주고, 선물도 준다. 말은 또 어쩜 그렇게 다정하게 하는지. 현생이 바빠 오랜만에 접속하면, 안부를 묻고 편지도 보내온다. 현실이 아닌 걸 알면서도 동물 친구들 덕분에 웃고, 일부러 옷을 차려입고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정이 들었다. 사람과의 접촉이 그리운 자가격리 시대에 나만의 섬에 들어가 동물친구들과 추억을 만든 거다. 그야말로 ‘흩어져요. 인간 세상! 모여봐요. 동물의 숲!’이다.
최고운 (에세이스트)
Black-and-white photos 흑백사진 집이라는 공간과 거기에 놓아둔 가구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문득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가구의 배치와 각도가 사뭇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책장 칸막이의 밑면이나 쌓아놓은 책의 틈새. 책상 모서리. 카펫의 무늬. 건조대에서 마르며 주름이 옅어지는 빨래 같은 거. 평소에는 그냥 몸을 담았다가 잠만 자고 빠져나오는 집이라는 풍경이 언젠가부터 신선하게 여겨졌다. 그런 발견을 할 때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다. 필터 기능을 이용해 흑백 모드로 가구의 모서리나 구석 같은 작은 부분을 확대해서 찍는다. 찍은 사진을 보면 책상이 사막처럼 보이고 책과 책 사이가 협곡처럼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수건을 확대해서 찍은 흑백 사진 속 질감은 낯선 짐승의 털가죽 같았다. 그렇게 집을 조금씩 돌아다니며 찍다 보면 마치 타국의 명소를 빠듯하게 돌아다니고 숙소로 돌아온 여행객처럼 기분 좋게 지친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면 정말 여행이라도 다녀온 듯하다. 내부라고 여겼던 곳에서 외부를 발견하는 일. 조금 이상하게 생각될 만한 놀이지만, 항상 똑같이 여겨지는 집과 시간을 버티는 나름의 궁여지책이다. 아주 쉽다. 지금 스마트폰을 들고 주위에 보이는 물건을 요리조리 돌려가며 찍어보라. 평소에 모르던 사물의 모양과 작고 낯선 풍경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최현우 (시인)
Companion 동반자 아내가 얼마 전 30여 년 몸담았던 언론사를 그만뒀다. 2020년은 내게 그런 해로 기억될 것이다. 아내는 1986년 처음 만난 이후 줄곧 내가 가장 많이 의지한 글동무이자 내 글의 산파였다. 내 글의 첫 독자는 늘 아내였고, ‘잘 썼다’, ‘좋다’, ‘이 정도면 됐다’는 아내의 말을 믿고 나는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2020년은 또한 코로나로 기억될 것이다. 나의 생업인 강의가 끊겼다. 1998년 아이엠에프(IMF) 위기 때 10년간 몸담았던 대우그룹이 문을 닫았고, 2008년 청와대에서 나왔을 때 맞은 금융위기로 인해 나는 상당 기간 쉬어야 했다. 그리고 맞은 세 번째 위기다. 글쓰기는 이런 내게 피난처였다. 2월부터 새 책 <나는 말하듯이 쓴다> 집필과 라디오 방송 <강원국의 말 같은 말>을 시작했다. 책은 지난 6월 말 출간됐고, 라디오 방송은 11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것 역시 아내였다. 코로나로 인해 밖으로 나갈 일이 뚜렷이 줄어든 반면 글을 쓰고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많아졌다. 아내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책과 방송의 소재가 되었다. 너나없이 힘들고 어려운 시절, 무언가를 할 수 있고 그 일을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이상의 위로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보니 없지 않다. 그건 바로 아내의 퇴직금, 그 돈이 얼마 전 통장에 들어왔다.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Daily life 일상 “아들, 핑크퐁 그만 보고 이리 와. 민트초코 먹자.” “문 앞에 아이스크림을 놓고 가주셨어. 헤에(‘좋다'는 뜻의 2살 언어)!” “딸, 너도 아빠처럼 민초 먹어볼래?” “싫어. 난 초코 아이스크림만 먹을래.” “그럴 거 같았어.” “힉힉힉.('말 그만하고 어서 아이스크림이나 먹자'는 2살 언어)” “신기하네. 숟가락 가득 민초 퍼먹는 것 좀 봐.” “으이그, 아빠와 아들, 민초파가 집안에 둘이나 있다니(절레절레). 유튜브에 ‘민초 먹는 아기’ 먹방 올리면 조회수는 나오겠다.” “오오, 그럴까. 하지만 반 민초파들이 몰려와. ‘아동 학대’라며 악플 달면 어떡해.” “나도 진짜로 하란 이야기는 아니었어.”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들이 민초를 혼자 긁어먹었다. 외출도 거의 하지 않는 요즘, 나를 버티게 해주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아이들, 아이들과 먹는 배달음식, 아이들과 보는 유튜브(특히 핑크퐁 상어가족), 한마디로 줄이니 ‘일상’이구나. 생활인의 일상을 우습게 보던 시절이 나도 있었다. 지금은 가슴에 사무친다. 이 정도라도 허락받은 일상이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감사한지. 물론 같은 이야기를 (조회수를 노리고) 나는 “민트초코 덕택에 버틴다”고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태권 (만화가)
Direct transaction 직거래 문제는 당근이었다. 그 당근 아니고 당○마켓이다. 어느새 네이○의 중고나○를 제쳐버린 당대 문제적 온라인 시장. 외국 나가면 늘 중고품 가게부터 가고, 옷도 중고로 사고, 중·고딩 때 학교보다 더 많이 간 곳이 황학동 중고시장이었으니 당○마켓은 당근, 나의 새로운 놀이터가 되었다. 처음엔 운동 삼아 시작했다. 만나서 현금 주고 사야 하니까. 1시 사당동-2시 동작동-3시 역삼동-4시 내방역. 이렇게 동선을 짜서 걸었다. 요리사가 뭘 사겠나. 그릇과 주방용품이다. 앤티크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낡으면 좋았다. 한창 유행을 타다가 사그라든 밀키웨어며 시대를 풍미했던 밀양도자기, 행남사 물건이 쫙 깔렸다. 국산은, 중고 그릇 시장에서도 천대받는다. 수거(?) 루트를 돌면 2만보 거뜬하다. 한번은, 행남사 낡은 그릇을 한 가방 사서 오는데, 군대 시절처럼 무릎이 아파 왔다. 아, 그래서 행보관이 행군을 안 했구나. 돌다 보면 딱 봐도 속상한 물건이 있다. 사업 망해서 죄다 내다 팔고 야반도주 낌새인 집(이민 간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하셨지만), 가게 망해서 잘 쓰던 칼자루를 내놓은 사람(반들거리게 날이 세워져 있다. 이런 분의 가게가 왜 안 되었을까), 친정어머니의 유품인 낡은 그릇 놓을 데가 없어서 넘긴다는 초로의 아낙(임자 제대로 만나신 거예요)…. 끔찍한 2020년은 어쨌든 당근으로 위로받았다. 이 사이트 이용자 중에는 악성도 꽤 있다. 취지에 안 맞게 시중가보다 더 비싸게 내놓는 이. 호구 하나만 걸려라 이건가. 통장 입금하라고 하고 탈퇴 후 날라버린 인간도 있다. 그나저나 건넌방을 가득 채운 저 그릇들을 어찌할 것인가. 악마가 속삭인다. “가게 차려, 가게 차려!” 정신 차려, 박찬일.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Dream 꿈 기묘한 꿈같은 한해였다. 연초 중국에서 전염병이 돈다길래 길어야 한두 달 조심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병이 전 세계를 휩쓸더니 전 지구인의 살아가는 방법을 바꿔버렸다. 이제 마스크는 일상의복이 되어버렸고, 산책과 외식은 위험하고 무모한 일이 되었다. 학생들은 수업을 원격으로 하고, 회사들은 부랴부랴 재택근무를 도입했으며, 명절 가족 간의 생사확인은 화상 통화로 대체하니 ‘실로 어릴 적 꿈꾸던 미래세계가 왔구나’ 싶어 놀라운 반면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싶어 좀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런 깨지 않는 꿈같은 한해를 방구석에 앉아 보내니 아무리 원래도 일하느라 방에만 있는 나로서도 때때로 우울해지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책상 위 모니터에 예전, 그러니까 정은경 당시 질병관리본부장이 올 초 4월12일 선언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렵다”고 한 그 ‘예전’의 사진을 띄워놓고 바라보곤 했다. 용감하게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인파 속을 거닐던, 배짱 좋게도 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놀러 가던, 놀랍게도 사람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어 먹던, 믿기지 않게도 만나고 헤어질 때 악수를 했던 그 날들의 사진을 보며 스스로 위로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고는 하나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 국민학생일 적 학교에 가지 않고 방에서 컴퓨터로 공부하고, 뭐가 됐든 시키면 척척 집까지 배달 오며, 전기로 가는 자동차가 거리를 오가는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워했듯, 이제는 다시 또 예전의 좋았던 것들이 가능해질 날이 오기를 꿈꾸는 꼴이 왠지 서글프지만 그래도 꿈꾸는 한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 싶다.
김보통(만화가)
E-book 전자책 2020년, 모두가 그러했듯 나 또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무던히 뛰어다녔다. 업무 외에는 어떠한 여유도 없었고, 일거리인 만화 말고는 책을 읽을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갈수록 멍청해지고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때마침 나는 꽤 자주 먼 거리를 운전해 이동해야 했다. ‘그렇다면 이동 시간을 활용해 보자.’ 그런 발상의 결과로 전자책을 구입해 리더 프로그램 티티에스(TTS·Text-To-Speech·글을 기계에 합성해 인간 목소리로 읽어주는 기능)로 들으며 운전했다. 한데 이 고육지책이 신의 한 수일 줄이야! 전자책으로라도 책을 접하는 빈도가 늘어나자 놀랍게도 종이책을 읽는 빈도도 덩달아 늘어났다. 급기야 운전할 때는 물론 책을 듣기 위해 일부러 운동시간을 내는 등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책 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느끼면서 스트레스와 우울을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직업으로 글 쓰는 사람이 이제 와 책 읽기가 재밌다 말하는 것도 꽤 기묘한 얘기지만, 재앙 같은 2020년을 ‘공부 시간’으로 바꾸어준 전자책과 티티에스가 위로이자 기쁨이었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
Forest & Flesh 숲과 살 내게 한동안 등산은 운동이었다. 좀처럼 안 쓰던 근육을 쓰며 땀을 뻘뻘 흘리다가 심호흡을 하면 개운했다. 그 맛에 산에 갔다. 올 한해 주야장천 비대면 여행지를 찾아다녔다. 루어 낚시, 카누 타기, 불편한 야영(식수대조차 없는 야영장!)도 해 봤다. 허나 마음은 늘 숲에 가 있었다. 경북 봉화군 청옥산 ‘명품 숲’(지난 7월 방문), 전남 장성군 축령산 ‘치유의 숲’(8월), 서울 여의도 샛강 샛숲(10월·강에도 숲이 있다!)은 긴 여운을 남겼다. 난 이제 뼛속까지 스며드는 공기 한 모금, 은은한 흙 향기, 촉촉한 초록빛이 그리워 숲에 간다. 그건 명상이나 숨쉬기에 가깝다.(운동이 아니라) 덕분에 숨 막히는 한해 그나마 숨 쉬며 살았다. 올해 나를 숨 쉬게 한 것 또 하나. ‘살’이다. 아이(6)의 살에서 위로받았다. 토실토실한 뱃살도 좋지만, 통통한 볼, 팔뚝, 무엇보다 손등과 발등 살이 좋다! 아이의 살에서 숲을 보았다. 매일매일 새살 오르는 아이의 몸은 새순 돋는 봄날의 숲을 닮았다. 싱그럽다. 아이의 살에 너무 탐닉한 걸까. ‘집콕’하는 동안 삼겹살이며 과자며 아이스크림이며 보이는 족족 아이에게 권했다. 포동포동했던 아이는 어느새 피둥피둥해졌다. 아이를 데리고 주말마다 산에라도 갈까? 코로나가 좀 잠잠해지길 기다려볼까? 망설이는 사이 한해가 저물어갔다. 드디어 지난 29일 아침 7시 아이와 함께 숲을 달렸다. 아파트, 상점이 빼곡한 건물 ‘숲’을 지나 52개짜리 계단 아래 섰다. 우린 손 잡고 계단을 다섯 차례 오르내렸다. 역시 난 운동보다 숨쉬기가 좋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