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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지구는 위험하다!’…가장 저렴한 도피처 SF

등록 2020-12-18 07:59수정 2020-12-18 08:33

올해 서점계 강타한 SF 붐
막상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부터 시작하길
김도훈 작가가 추천하는 SF 시리즈
최근 몇 년 붐인 에스에프(SF) 장르는 코로나19 등 지금의 세상을 반영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최근 몇 년 붐인 에스에프(SF) 장르는 코로나19 등 지금의 세상을 반영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재앙이다. 1년 전 누군가가 ‘전 세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확산해 수백만명이 죽고 모두가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시대’에 대한 책을 썼다면 그건 분명히 에스에프(SF·과학소설) 장르의 서가에 꽂혔을 것이다. 2020년은 묵시록적 에스에프가 현실화된 해였다. 그러니 올해 한국 출판계의 가장 거대한 키워드 중 하나가 에스에프였던 것도 꽤 흥미로운 사실이다. 김초엽, 정세랑 등 여성 작가들이 이끈 ‘에스에프 붐’은 이 장르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던 한국 독서가들에게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장르 소설에 그다지 애정을 품고 있지 않던 당신도 ‘이제는 에스에프를 한 번 읽어볼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에스에프는 진입 장벽이 꽤 높은 장르다. 과학적인 법칙 안에서 논리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장르의 특성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어떤 책으로부터 에스에프를 시작하면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쉽고 명확한 대답은 ‘스페이스 오페라’일 것이다. 스페이스 오페라는 에스에프의 하위 장르다. 멜로드라마 연속극을 의미하는 ‘소프 오페라’(Soap Opera)에서 차용한 이름이니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는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에스에프가 과학적인 법칙 안에서 상상력을 펼치는 장르라면,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적인 정합성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장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는 진중한 장르 소설 팬들로부터 약간은 멸시받아온 경향이 있다. 하지만 최근의 몇몇 작가들은 ‘미국적이고 남성적인’ 이 장르에 생생하고 독특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지금 현실의 이야기들을 반영하면서 장르의 진화를 이끌어왔다.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작품은 <다섯 번째 계절>, <오벨리스크의 문>, <석조 하늘>로 구성된 N.K. 제미신의 <부서진 대지> 3부작(황금가지)이다. 에스에프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인 ‘휴고상’을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연속 수상한 시리즈다. 먼 미래의 지구에는 ‘오로진’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있다. 오로진은 대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파괴적인 능력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다. 살기 위해서는 능력을 숨겨야만 한다. 책의 주인공은 ‘에쑨’이라는 오로진 여성이다. 능력을 감추면서 살아온 그에게 비극이 닥친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초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편이 아들을 죽인 뒤 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에쑨은 이제 대륙을 가로지르며 남편과 딸을 찾는 고통스러운 모험에 몸을 던진다.

‘초인’은 에스에프장르가 오랫동안 사랑해 온 소재다. A.E. 밴 보그트의 <슬랜>(불새), 올라프 스테이플던의 <이상한 존>(오멜라스) 그리고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시공사)는 월등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로부터 핍박받는 초인들을 주인공으로 ‘차별’과 ‘인간성’에 대한 사유를 펼치는 고전들이다. 흑인 여성 작가인 N.K. 제미신은 초인이라는 전통적인 에스에프의 소재에 여성주의적인 시선과 인종주의적인 함의를 덧붙인다. 덕분에 <부서진 대지> 3부작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2020년 현재의 세계에 대한 우화로서 멋지게 기능한다. 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숨겨진 능력을 마침내 인정하고 보다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하는가에 대한 에스에프장르의 대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대표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 사진 각 출판사 제공
대표적인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 사진 각 출판사 제공

이 장르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시리즈라면 총 16권이 출간된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씨앗을 뿌리는 사람)를 빼놓을 수 없다. 여성 작가인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가 1986년부터 27년에 걸쳐 완결한 대하소설이다. 그런데 이 시리즈가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다시 썼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지점 중 하나는 주인공인 ‘마일즈 보르코시건’에게 있다. 그는 우주 제국의 최상층 귀족이다. 돈도 권력도 모두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마일즈는 장애인이다. 뼈는 유리처럼 자주 부러진다. 키는 보통 사람들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등뼈는 완전히 휘었다. 사람들은 그를 돌연변이라고 부른다. 그는 내면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자부심과 열등감과 질투심이 마구 뒤섞여 그를 괴롭힌다. ‘마일즈 보르코시건’ 시리즈는 이토록 불완전한 주인공이 여러 우주적 모험을 겪으면서 점점 영웅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삼국지>’라고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는 이 시리즈는 장르 입문자들조차도 단숨에 16권의 시리즈를 독파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재미있다.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 시리즈(아작)는 굉장한 아이디어가 출발점이다. 달에서 5만 년 전 우주비행사의 시체가 발견된다. 게다가 그 우주비행사는 인류와 비슷한 호모사피엔스다. 시체에 남겨진 언어는 단 한 번도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다. 지구의 수많은 전문가가 모여서 이 놀라운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첫 번째 책인 <별의 계승자>는 스페이스 오페라보다는 ‘하드 에스에프’(과학적인 논리와 정합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에스에프) 외피를 둘러쓴 추리 소설이다. 그런데 제임스 P. 호건은 <별의 계승자>의 주인공들을 데리고 굳이 과학적 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모험을 계속 이어나간다. <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거인의 별>, <내부우주>와 마지막 권 <미네르바의 임무>로 이어지는 이 시리즈는 매 후속편마다 장르가 휙휙 변한다. 훌륭한 과학적 추리극으로 시작한 시리즈는 전형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는 일종의 사이버 펑크 장르로까지 발전한다. ‘기동전사 건담’ 같은 일본 에스에프애니메이션에 큰 영향을 끼친 이 시리즈는 장르의 오랜 팬들과 입문자들이 각기 다른 이유로 즐길 수 있는 우주적 모험담이다.

이 시리즈들조차 장르 문외한인 당신에게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면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은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샘터사)다. 수백년 후의 미래. 인류는 다른 은하로 진출해 여러 행성을 개척하며 뻗어 나가고 있다. 인류는 (놀랍지 않게도!) 여전히 호전적인 존재다. 그들은 우주로 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계 생명체들과 전쟁을 벌인다. 주인공들은 75살 이상인 노인들이다. 미래의 군대는 노인들만 뽑아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체’를 준다. 이제 주인공들은 보다 젊고 강력한 신체를 무기로 전장에 뛰어든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스타쉽 트루퍼스>(황금가지)와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황금가지) 같은 고전적 밀리터리 에스에프장르를 현대적으로 다시 풀어낸 <노인의 전쟁>은 속편인 <유령여단>과 <마지막 행성>, 외전인 <조이 이야기>까지 단 한 번도 ‘말초적인’ 즐거움을 잊지 않고 뻗어 나간다. 이 시리즈를 읽기 위해 딱히 과학적인 지식을 갖출 필요도 없다.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에스에프의 외피를 둘러쓴 전쟁 소설에 금세 적응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놀랄 정도로 책장이 빨리 넘어가는 간결하고 경쾌한 문체와 꽤 못돼먹은 유머 감각도 커다란 장점이다.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도피’다. 정치는 불안하고 경제는 불운하고 팬데믹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 거리두기 2.5단계든 3단계든 당신은 집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멋진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크리스마스 만찬은 없을 것이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러 외출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동해로 훌쩍 자동차를 몰고 가서 새해의 첫 태양을 바라보는 일도 벌어질 리 없다. 당신이 에스에프 장르 광이든 아니든 괜찮다.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들은 이 기묘한 해를 넘어서 더욱 기묘해질 해를 살아가야 할 당신을 위한 가장 저렴하고 즐거운 도피처를 제공해줄 것이다. 지구는 위험하다. 잠시 우주로 떠나자.

김도훈(작가·전 <허핑턴포스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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