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키트 ‘고추 지릉장 냉국수’. 사진 백문영 제공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도 놓칠 수 없는 게 음주다. 밥 먹을 때마다 샘솟는 반주 욕구를 무시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식사를 앞에 두고 술 한 잔 곁들이지 않는 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음주가 아니라 단지 식사하러 갈 뿐’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종로구 필운동 ‘주반’으로 향했다. 상호조차 예사롭지 않다. 술과 밥, 인생에서 떨어뜨릴 수 없는 필연적인 두 글자를 합쳤다.
고즈넉한 한옥인 주반은 소담한 툇마루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들이 친구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메뉴도, 주류 목록도 그렇다. 한식도, 프렌치도, 베트남식도, 타이 푸드도 아닌 이국적인 메뉴가 가득하다. ‘모로칸 살사를 곁들인 통영 삼배체 석화’, ‘그릴한 항정살과 타이풍 통영 굴무침’ 같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음식에 맥주, 와인은 물론 다양한 우리 술까지 마실 수 있게 한 김태윤 오너셰프의 센스는 깜찍한 재간이다. ‘향신료 향이 강해서 먹다가 금방 혀가 지쳐버리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고수, 타이바질, 레몬그라스 같은 다양한 향을 내는 향채를 한 접시에 조화롭게 담아냈다. 샴페인으로 시작해 맥주로, 독주로 가는 여정 내내 입안에서는 천 가지, 만 가지의 향이 감돌았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렇게 먹고 마셨는데도 허기가 돌았다. 뼛속까지 한국인인 걸 확인했다.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이 떠올랐다. 라면은 부담스럽고, 육수 끓여 분주하게 만들어야 하는 잔치국수는 만들려니 몸도 정신도 마뜩잖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밀키트가 대세’라는 생각에 쟁여놓은 밀키트 브랜드 ‘계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민영 음식 콘텐츠 기획자를 믿고 구매했던 ‘계절의 기억’ 제품이 떠올랐다. 경남 거창 향토 음식 ‘고추 지릉장 냉국수’와 유명 샤르퀴트리 업체 ‘사실주의 베이컨’의 소시지를 가득 넣은 ‘나폴리탄 스파게티’ 사이에서 고민하다 ‘고추 지릉장 냉국수’ 포장지를 뜯었다. 육수 티백을 냄비에 넣어 우린 국물에 삶은 면을 넣었다. 잘게 다진 고추 지릉장(조선간장)을 마저 넣었다. 맵고 칼칼하고 시원한 국물을 들이켜고 서둘러 면을 입에 집어넣으니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해장하는데, 왜 소주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또 한 잔을 털어 넣었다. 따뜻한 밥과 찬술을 함께 나누며 왁자지껄 떠들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술자리가 사실은 꽤 의미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백문영(전 <럭셔리> 리빙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