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죠. 드라마 ‘응팔’에서 덕선네가 이사 가던 깡시골 판교는 ‘한국의 실리콘밸리’가 됐습니다. 시대의 필요보다 한발 앞서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고, 창업이라는 모험에 참여해 부를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실대죠. 이 동네는 상속형 부자가 드물고, 자수성가한 주식 부자가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갖은 고생을 딛고 재계의 스타가 된 의장님들에게선 왠지 모를 ‘쿨 내’가 나는 듯합니다. 2018년 기준 주중 하루 13만여명이 오간다는 아이티(IT)특별시 판교의 대략적 설명이에요.
스타 개발자들과 기획자, 혹은 디자이너들이 이끌어 나갈 것 같은 이곳 기업 생태계에도 ‘문과’는 있습니다. (여기 사람 있어요!) 네, 저는 순도 100% ‘문돌이’에요. 가끔 ‘잇(IT)문계’인 제가 일상과 주변을 관찰해 판교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세상만사가 0과 1로만 이뤄지지 않았고, 유아이(UI·User Interface·사람과 기계 사이에서 소통을 이끌어주는 매개체. 스마트폰 화면이 대표적입니다) 밖에서도 생활은 계속되니까요.
연재를 결정하고 판교 밖 사람의 시선으로 일상을 바라봤더니 평소 당연하게 지나치던 모습들이 새롭게 다가왔어요. 더운 여름 반바지 차림에 비치 샌들이나 슬리퍼를 신고 출퇴근하는 사람들, 그런 게 있다는 기사는 많이 봤는데 왜 나와는 무관한 일인지 궁금한 스톡옵션 대박 이야기, 고지식한 문화가 여전히 유지되는 기업에서는 아직 언감생심인 육아휴직, “~님” 호칭이나 영어 이름으로 상징되는 수평 문화 같은 것들 말이죠. 나에겐 일상이지만 판교 밖에서 보기엔 흥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잡(Job) 코스모스가 선정한 취준생 선호 기업 1위’ 회사에 다니면 설렐까? 이런 소소한 ARABOJA(알아보자) 식의 글도 적어볼까 합니다.
첫 글이고 하니, 가벼운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꼬장꼬장한 임원들이 포진한 소위 전통 산업군 종사자들이 봤을 때 깜놀할 판교인들의 겉모습에 관한 관찰기입니다. 저 또한 이른바 ‘사대문 안’ 회사원이던 시절이 있었어요. 캐주얼데이를 전격 도입한다는 사실이 굉장한 관용이자 자랑거리인 그런 곳의 ‘직딩’이었단 말이죠. 앞서 언급했듯이 판교에서는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는 여름철에 너무 흔해서 유니폼 같아요. 밝은색 머리카락이나 귀걸이, 심지어 눈에 보이는 문신조차도 눈길을 끌지 못하죠. 상당수 회사가 복장 규정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범죄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옷을 ‘입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죠. 간혹 반려동물을 동반해 출근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그 정도면 살짝 눈길을 줄 만할 것 같습니다. 먹이를 주거나 배변을 치우는 모습은 흔치 않을 테니까요.
문득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어요. ‘노타이’ 선언에 이어 ‘비즈니스 캐주얼’로의 전환을 공표했을 때 저는 조금 설렜어요. 주니어 시절에 구입한 슈트들은 하나같이 스키니진 차림이 돼 있었고, 타이슨처럼 두꺼워진 목 때문에 넥타이는 역류성식도염을 유발할 지경이었거든요. 하지만 총무팀이 한 땀 한 땀 고민해 내놓은 비즈니스 캐주얼 가이드라인은 캐주얼하지 않았어요. 라운드티는 지양하라, 장식이 많거나 원색이 화려한 겉옷은 삼가 달라 따위의 ‘고나리질’(지적질)이 가득했답니다. 저는 어느 날 찢어진 청바지에 깃이 달린 티셔츠와 재킷을 걸치고 출근했어요. 팀장은 커피 한잔하자며 저를 불러 ‘찢청’(찢어진 청바지)이 왜 불경한 것인지에 관해 20분 정도 썰을 푸셨죠. 들으면서도 ‘저 사람 참 영이 안 선다’ 싶었는데, 재킷과 구두 사이에 자리한 그의 바지가 검은색 등산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고, 내 ‘찢청’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복장이었지만 그 동네에선 그게 ‘예의’에 가까웠어요.
몇 주 전, 전통 산업군에 종사하는 분이 판교로 면접을 보러 가게 됐는데 아무렇게나 입고 오라는 안내 메일을 받고 고민하는 글을 봤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댓글을 잘 달지 않는 저지만, 위에 말한 우스운 기억 한 토막이 있기에 성심껏 조언을 드렸어요. “자율복이라는 거, 낚시 아닙니다. 마음가짐 테스트인 줄 알고 슈트 입고 가면 굉장히 머쓱할걸요. 저는 찢청에 라운드티, 그리고 편해 보이는 재킷 정도의 조합을 추천해요. 스니커즈나 로퍼를 신는 게 좋겠어요. 드레스 슈즈 신지 마세요.”
연재를 잘 이끌어나가고 싶어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눈팅’할 계획입니다. 무플보다 악플이 나을 것 같아요. 관심 1비트 부탁드립니다. (공손)
글·그림 잇(IT)문계(판교 아이티기업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