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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송년의 식물, 야자 크리스마스트리

등록 2020-12-04 07:59수정 2020-12-04 20:02

저와 크리스마스 보낼 식물은 아라우카리아
당신만의 송년 식물, 준비하셨나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려서 우리 집은 야자나무 화분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야자나무를 왜 기르게 되었을까 궁금해지는데 초등학생이던 내 키만 했고 가지가 사방으로 좍좍 벌어져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반짝거리는 비닐장식과 솜과 전구를 야자나무에 걸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야자와 크리스마스라니, 불협화음 같은 장면이지만 그 앞에 선 나와 언니의 표정은 정말 성탄을 기뻐하는 것처럼 밝았다. 케이크가 놓여 있는 사진도 있는데 그런 해에는 더 근사한 크리스마스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기념일이면 흔하게 놓이는 케이크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건 정말 특별한 기념이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크리스마스트리가 그 정도로 비쌌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진짜 나무가 아니라 모형이라면 아이들을 위해 하나쯤 사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사진은 크리스마스 하면 사람들이 흔히 떠올릴 수 있을 만한 이미지가 되었을 것이다. 뭔가 맞지 않는다거나 일종의 아이러니가 있네 하는 지점 없이 매끈하게. 하지만 부모님은 검소했고 불필요한 지출에는 무척 단호했다. 발코니에 있다가도 겨울이면 실내로 들어오는 그 커다란 야자나무로도 크리스마스 장식은 충분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야자 크리스마스트리는 내 유년의 많은 지점을 보여주는 특별한 존재다. 매사에 성실하고 살림이 넉넉지 않았던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송년을 기념하고 싶어 선택한 집 안의 야자 크리스마스트리. 부모님은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한 선물을 사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머리맡에 쪽지와 함께 용돈을 놓아두곤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산타할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현찰 선물을 한다는 것 역시 이상하기는 했으나 그 또한 부모님이 선택한 방식이었다. 지금도 무슨 날이면 부모님은 내게 물건 대신 현찰을 선물로 주신다. 무심하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쩌면 무언가를 기념해 주고받는 순간조차 그것이 호의의 ‘표현’을 넘어선 ‘도움’으로 상대방에게 가닿아야 한다는 마음이 작동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미래를 무심히 낙관하기 어려운 시절을 통과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선물에 대한 입장이 아닐까 하고.

지금 창밖은 초겨울치고도 매서운 날씨이지만 집 발코니는 15도 안팎으로 유지되고 있다. 가을이 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이 온습도계였다. 집 안에서도 쓰지 않았던 그것을 발코니에 놓고 수시로 온도를 확인 중이다. 날짜를 헤아려가며 11월이면 식물을 들여야겠다고 계획했는데, 실제로 11월이 되자 발코니에는 되레 꽃이 만개하고 다른 관엽식물들도 순하게 성장을 지속했다. 좀 건조하기는 했지만, 다른 계절보다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그때보다 온도가 좀 떨어진 지금도 발코니에는 게발선인장과 제라늄들이 풍성한 꽃을 피운다. 베고니아 타마야라는 목베고니아 역시 잘 짠 편물처럼 질서 있게 꽃줄기를 내려뜨리고 있다. 12월의 식물들이 건네는 이 환한 풍경, 줄어든 빛으로 일구어내는 여전한 생장은 요즘 나에게 큰 힘이다.

겨울을 맞이하기 전 나는 식물들의 월동 온도를 조사해 표로 정리했다. 그런데 막상 겨울이 되고 보니 식물들에는 날짜가 지난다고 해서 거기에 기계적으로 맞춰야 하는 주기란 없었다. 환경에 예민하게 순응하면서 자기 성장을 조정해가는 식물들의 ‘감각’을 지켜보며 적절한 순간까지 기다려주면 되는 일이었다. 발코니에 있는 식물 가운데 가장 월동 온도가 높은 것은 알로카시아로 15도였지만 아직은 상한 기색 없이 싱싱하다. 추운 날 밤이면 온도가 더 떨어질 텐데 어떤가 싶어 들여다보면 새로이 낸 잎이 점점 자라며 괜찮다고 말해준다.

올해부터 키운 알로카시아는 애착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식물이기도 하다. ‘방망이’ 상태로 와서 70㎝ 넘는 잎들을 내기까지 지켜봤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으로 상품을 잘못 주문할 때가 잦고 그것은 변명할 여지 없이 상세 정보를 제대로 읽지 않기 때문인데, 알로카시아를 살 때도 그랬다. 상품 사진으로 걸려 있는 넓적한 잎에 매혹당해 구입 버튼을 누르면서도 선택란의 ‘잎 채로’와 ‘잎 자름’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 말이 서로 엉겨 붙어 나는 잎들을 적절히 손봐서 보내준다는 의미라고 오해했다. 그리고 이후 신문지에 둘둘 말려온 알로카시아 ‘몸통’을 받아들고는 깜짝 놀랐다. 그건 배송 과정에서 잎이 상할 수 있으니 아주 야트막한 줄기만 남기고 모두 잘라낸다는 의미였다.

알로카시아를 흙에 심고 정말 잎이 날까 노심초사하는 내 모습은 그 봄의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다. 날이 따뜻해지자 알로카시아는 조금씩 잎을 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몸통에 ‘칼로 벤 듯’ 일정한 틈이 나면서 마치 마술처럼 줄기를 ‘꺼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는 동안 알로카시아는 여러 번 맑은 물을 흘려서 나는 또 혹시 물러진 것은 아닌가 하고 전전긍긍해야 했다. 다행히 식물이 아주 건강한 상태일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앞으로 며칠 더 지나면 알로카시아부터 실내로 들여야 할 것이다. 무조건 따뜻하다고 식물들에게 좋은 환경은 아니다. 겨울철 실내는 보일러 때문에 건조하고 빛도 부족하며 더구나 그런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식물들에게 ‘몸살’을 일으킨다. 그러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 옮겨와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겨울의 입김을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이제 정말 우리가 겨울의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할 때.

올해 크리스마스 장식은 작년처럼 아라우카리아 화분에 할 예정이다. 아라우카리아는 내가 가져본 가장 크리스마스트리를 닮은 트리다. 촘촘한 바늘 같은 잎들이 침엽수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가지 또한 적당히 늘어져서 멋스럽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3대 조경수로 뽑힐 만큼 유명한 나무라고 한다. 실내에서도 잘 자라고 과습에도 강한 아라우카리아는 기르기 까다롭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 무심히 기를 수는 또 없는 식물이었다. 초여름쯤 잎이 타들어 가기 시작해서 두 개의 가지 중 하나를 완전히 잘라낸 뒤에야 상태가 좋아질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직사광선을 조심해야 하는 식물이었다. 아라우카리아가 잘 자라기를 바란 건 당연하게도 크리스마스 때문이다. 연말마다 새롭게 들이는 나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일년을 살아온 식물과 송년의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특히나 올해는 정말 버틴다는 감각으로 보내온 시간들이니까 더더욱. 다행히 아라우카리아는 기운을 차렸고 지금도 발코니에서 짙은 녹색의 잎들을 차분하게 내보이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내가 의기양양하게 들인 이 크리스마스트리조차 남반구에서 온 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습에 강한 건 열대우림이 서식지이기 때문이라고. 그때 나는 북반구의 겨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한 가족의 집으로 들어와 크리스마스 장식까지 너끈히 감당해냈던 또 하나의 열대식물, 어린 시절의 야자나무를 떠올렸다. 본래 어디서 왔든, 낭만과 이상 속의 크리스마스트리와 얼마나 닮았던 상관없이 그저 한 해를 무사히 보낸 가족들을 격려했던 그 야자 크리스마스트리를. 그렇게 생각하면 부모님은 아주 적절하고도 당연한, 진정한 송년의 의미를 담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선사해준 셈이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누구에게나 특별할 것이다. 세상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긴 팬데믹의 상황, 하지만 우리가 벌써 이렇게 일년을 버텼다. 아직 이 겨울을 넘어야 한다는 숙제가 남아 있으나 그래도 한해의 마지막 달에는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도 무방할 것이다. 굳이 특별한 무언가를 찾지 않아도 당신 옆에는 이미 그럴 만한 공간쯤은 마련되어 있다. 친구, 가족, 어떤 이름으로든 부를 수 있는 다양한 관계들이 그렇고, 동네 화원에 잠깐 들르는 일만으로도 동행이 시작되는 당신만의 송년 식물들이 기꺼이 그런 존재가 되어줄 것이다.

김금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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