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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알지 못한다

등록 2020-11-06 06:59수정 2020-11-06 18:48

식물 집사들 자주 하는 질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죽고 만 마오리 코로키아 추억해
발코니 식물들에게 ‘나’라는 변수
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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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집사들이 자조적으로 나누는 얘기가 있다. 식물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봤자 사실상 답은 없다는 것이다. 증상은 다양해도 답변은 언제나 적당한 물주기와 적당한 통풍, 그리고 알맞은 온도로 이어지니까. 잎이 처지거나 노랗게 되거나 마르거나 하는 문제들이 나타나면 나도 구입처에 사진을 보내 물어보곤 하는데 대개 그런 답변이 돌아왔다. 여러 번 살폈는데요, 하며 그것 말고 뭔가 더 특별한 처방이 없는지 내가 물으면 대화는 “그렇다면 기다려보세요!”라는 응원으로 끝났다. 아무리 여차저차 상황을 바꿔가며 물어도 빛, 바람, 물이라는 답이 돌아오는 것. 식물 집사들에게는 이만한 ‘답정너’가 없다.

드물게 다른 처방이 내려지는 경우는 해충이 나타났을 때다. 우리 발코니에는 응애가 자주 출몰해서 이번 여름에도 피해를 봤다. 아카시아 딜바타가 죽어버린 것이다. 그 아카시아 딜바타는 어느 늦은 봄, 좋아하는 통인동 화원에 가서 사 온 화분이었다. 화원 주인과 함께 아카시아를 들여다보면서 가을이면 잎 색이 더 아름다워지리라고 즐거워한 기억이 선하다. 그리고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화분을 보고 있을 때 화원의 개가 다가와 킁킁대며 내 냄새를 맡았던 기억도. 그날 화원 주인은 생장을 위해서라도 가지가 어느 정도 성장한 후에는 과감히 자르라고 했고 나는 아까워서 그건 도저히 못할 것 같다는 마음 약한 소리까지 했지만 하얀 장막을 치며 나타난 응애 떼에게 포위돼 아카시아 딜바타는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여름 내내 속앓이를 해야 했다.

여담이지만 해충의 경우 나는 살충제 이외에도 물 샤워를 여러 번 해주며 관리한다. 물을 잎 꼭대기부터 부어 씻는 것이다. 아무리 친환경적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살충제를 치고 나면 시들시들하거나 하룻밤 새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지는 일이 생기면서 선택하게 된 방법이다. 물론 살충제를 아예 안 쓸 수는 없지만 사실 물 샤워로 제거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을 가장 추천하고 싶다. 그러고 보니 여기에 대한 답 역시 물주기, 문제는 다양하고 발코니의 수난은 끝이 없는데 어찌 해답은 이렇게 정해져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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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발코니마다 쉬이 죽는 각자의 식물들이 있다. 내 발코니의 경우에는 마오리 코로키아라는 뉴질랜드 식물이 그렇다. 마오리 코로키아는 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은 식물로, 아주 가느다란 가지에 작은 잎들이 달려 세련된 느낌을 준다. 이 식물이 유독 시선을 사로잡는 건 가지의 수형이 어느 한 편으로 단순하게 뻗지 않고 섬세하게 방향을 틀어 자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식물들의 수형이 사인펜으로 그은 분명한 선이라면 코로키아의 수형은 붓으로 터치해낸 것처럼 촘촘하게 분화되어 있다.

식물을 기르면서 실감하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사람들이 화분을 실내로 들여 모방하고 싶은 대상은 단순한 자연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식물이되 미감의 차원에서는 자연에서 적절히 이탈된 오브제로 기능하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코로키아는 여러모로 자연보다는 물체에 가까운 면이 있다. 좁쌀만 한 작은 잎, 얇디얇은 가지, 잦은 물주기가 아니라 흙이 바싹 마를 정도의 건조함을 유지해야 하는 생장 환경마저도. 여기다 잎 색이 은빛인 코로키아마저 있어서 이 식물의 모던함은 더 특별해진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나는 코로키아 앞에서 매번 실패하고 말았다. 식물을 기르는 것은 사실상 그 식물과 대화를 하는 것과 같아서 코드가 잘 맞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그 식물에 접속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코로키아가 그랬다. 처음에 샀던 은빛 잎의 코로키아는 마치 구리로 된 가느다란 철사를 꽂아놓은 듯한 모양새로 와서 거실에 놓여 있었다. 대개는 식물 포트를 사서 직접 분갈이하지만 코로키아는 우드 스탠드가 있는 근사한 도자기 화분에 심어진 것을 인터넷으로 보고 반해 주문했다. 보는 사람마다 이거 조화야? 하고 물을 만큼 완벽한 모양새였다. “아니야, 살아 있는 거야”라고 하면 신기하다는 경탄이 돌아왔다.

그때까지 코로키아가 그렇게 예민한 식물인 줄 몰랐던 나는 특별한 주의 없이 물을 주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보니 정말 살아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게 상태가 이상했다. 하지만 원래도 잎은 매우 건조한 느낌이었고 가지 색 또한 그랬으니까 판단이 어려워 부랴부랴 발코니로 옮겨 물을 주고 햇볕도 쬐어주고 했지만 나는 받아들여야 했다. 사실상 이미 생장 활동을 하지 않는 그것에 물을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데도 코로키아는 손으로 만지면 잎이 다 부스러져 내린다는 점을 빼고는 정말 살아 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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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동안 코로키아를 버리지 못했다. 마른 식물을 가지고 부러 만드는 드라이플라워도 있으니까 잠시 두고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린 것’과 ‘말라버린 것’의 차이는 분명했다. 코로키아를 보면서 그것이 살아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지 않기란 불가능했고 무엇보다 그 뒤부터는 화분을 본 사람들의 질문에 “그래, 죽었어, 죽은 거야” 하는 대답을 반복해야 했기에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나는 화분에서 코로키아를 꺼내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바싹 마른 가지들이 우두둑 부서지면서 가시처럼 나를 찔렀다. 그렇게 욱여넣어 버리는 일에는 어떤 완력을 사용했다는 느낌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뒤로 코로키아를 다시 키워 봐도 결과는 같았다. 생장 상태를 알 수 있게 녹색 잎을 선택했지만 실패의 과정을 더 확연히 보여줄 뿐이었다. 마오리 코로키아라는 이름은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 마치 마오리족의 강인한 생명력을 닮은 듯하다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식물에게는 내 발코니가 사막이나 벼랑 끝보다 더 척박한 환경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진다. 왜냐면 나는 바로 그곳에서 매일매일을 갱신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어느 날 다 시들어버린 화분을 집에서 발견할 때 우리가 둔중한 충격 같은 것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며칠 전 발코니를 서성이던 나는 한때 식물이 담겼지만 지금은 텅 빈 화분들을 한데 모아놓았다. 거기에는 당연히 나를 뿌듯하게 했던 코로키아 화분도 있었다. 그 흰 도자기 화분에는 아무래도 그런 것, 코로키아처럼 그렇게 생긴 식물이어야 했기에 다른 무언가로 대체해 넣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실패의 빈 공간을 보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내가 제대로 키우지 못한 식물들이 떠오른다. 그러면 대체 왜 그 식물들이 그렇게 다 말라버렸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통풍을 좋게 하고 물주기를 잘하며 햇볕을 적당히 쬐어줘야 한다는, 누구나 누구에게 줄 수 있으나 사실상 그래서 때론 도움이 되지 않는 해답으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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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그랬는데, 갑자기 발코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지나치게 나 자신을 넣어서 판단하고 있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이 공간으로 오게 한 것이 나라는 이유로 발코니에서 일어나는 모든 실패와 성공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관여하고 있지 않은가. 그 관여라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와는 다른 인위적이고 어떻게 보면 좀 맹목적인 연연함처럼도 느껴졌다.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조건은 한정적이고 절대 살아 있는 것들의 완벽한 관장자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렇게 알 수 없는 공백 같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 그러고 보면 빛, 바람, 물이라는 답은 가드닝의 수많은 실패자를 북돋우고 자책에서 구해내는 만능의 말일지도 몰랐다.

며칠 전 근처의 서오릉화훼단지를 찾았을 때 한 화원의 사장이 내게 마오리 코로키아와 마오리 소포라(코로키아와 유사한 종)를 권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물이라고, 우리 가게에 그 식물을 몇 포트 들여왔다고. 봄만 해도 그 단지에는 사무실 등에 공급하는 공기정화 식물이 주를 이뤘지만, 올해 들어 플랜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면서 나 같은 개인 고객들을 겨냥한 상품들도 팔기로 한 것 같았다. 여전히 그 이국의 식물은 아름다웠고 식물 등과 서큘레이터까지 갖춘 내 발코니는 전보다 더 이 식물에게 나은 환경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또 실패할 것 같다는 걱정이나 이제 그 식물에 관심이 없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작 그 식물을 끝까지 키워내지 못했으므로 오히려 꽤 깊은 곳까지 이해하고만 듯한 나쁘지 않은 실패감이었다.

김금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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