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ESC

[ESC] 기억의 방식

등록 2020-10-23 08:04수정 2020-10-26 15:41

[10월 손가락 소설-천선란]
그것이 독립하자 울기 시작한 나
내 몸을 학대하는 기억, 다치는 내 소중한 사람들
기억은 육체가 있어야 존재, 하지만 점차 사라지는 몸
몸이 사라지면 기억도 흐릿해질 것
몸의 기억장치는 수십 년 전 그 등과 몸 감싼 이불로 이동
그것이 너를 낯설게 할지라도…. 그것은….
일러스트 백승영
일러스트 백승영

그것이 나로부터 독립하려고 했을 때, 나는 악을 쓰며 울었다. 내 울음은 퍼지지 않았다. 이미 그것이 나에게서 소리까지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울음을 빼앗겨 울 수 없게 되자, 나는 곧장 슬픈 것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울고 싶다는 욕망은 존재했지만, 그것을 실현해야겠다는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헛헛함이 그것 어딘가에 들어찼다. 빵빵하게 부풀어 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그래서 기대했지만, 이 역시도 그러지 않았다. 소망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허탈감을 안긴다. 기대했던 몫의 몇 배의 크기로. 무기력은 발밑에서부터 조금씩 퍼져 올라왔다. 내게 남은 것은 그런 식의 감각뿐이었다. 차갑고, 날카롭고, 딱딱하고, 따갑고, 미끄러운 것이 아닌 무섭고, 슬프고, 두려운 감정들. 감정의 감촉은 얼어있는 쇠붙이를 살에 붙였다가 떼어내는 것과 비슷했다. 언젠가 한 번 드라이아이스를 만졌을 때 이와 비슷한 고통을 느꼈다. 그게 정확히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다는 것과 고통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환희와 기쁨, 평안함, 활기참, 벅차오름의 감촉은 어떤 형태일까. 궁금증이 생겼지만, 어쩐지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런 것들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그것의 것일 테니까.

나는 어둠의 심연으로, 그리고 끝없는 길로 내몰렸다. 공간과 시간을 느낄 수 없는 곳이다. 공간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공간과 다르다. 내가 걸음을 내딛는 곳이 곧 바닥이다. 내가 허공을 디디면 그 허공은 이제 길이 된다. 방향성과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내가 있던 세상과 전혀 다른 곳. 처음에는 어지럼증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조금씩 익숙해졌다. 나는 공간을 마음껏 휘고, 뭉개고, 접고, 무너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나는 종종 내가 살던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잊고는 했다. 나는 어떻게 놓여있는 길만을 걸었던가. 왜 그것을 한 번도 이상하다 생각한 적이 없었던가. 나는 왜 다른 길을 걸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내 잘못은 아닐 것이다. 길을 걷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걸었다.’ 그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걷다 보면 멀어진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공간을 휘고, 뭉개고, 접고, 무너트리며 걸었지만, 신기하게도 내가 걸어왔던 길을 곧장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한 본능일까. 가끔은 이대로 영원히 멀어져서 되찾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나아가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뤄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나는 아직, 그것과 연결되어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어둠에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손상된 곳은 그런 것들을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것과 아주 천천히 분리되었다. 단절을 바랐던 적도 있었다. 나는 그것과 희미하게 연결되어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느끼는 답답함이 내게도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몸이었던 것들은 그것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것은 그 사실에 분노하며 몇 날 며칠 동안 주변에 있는 모든 이를 괴롭혔다. 몸은 단자가 맞지 않는 것처럼 튀어 올랐다. 거부하고 싶어도 그것은 이미 내 몸과 연결되어, 마치 몸을 항복시키려는 것처럼 무자비하게 굴었다. 몸은 어쩔 수 없이 함께 튀어 올랐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토록 어렵다. 아주 오랜 시간을 쏟고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다른 것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그것은 내 몸을 학대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다치는 것은 내가 소중하게 여겼던 사람들. 그것이 여전히 나인 줄 아는 나의 사람들. 나는 그때 또 울었다. 그것을 말리고 싶었다. 기적적으로 울음소리가 새어나갔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것은 말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내 몸을 버렸으면 했다. 욕창이 나더라도 그것은 나의 문제이지 너희의 문제가 아니다. 굶주려 앙상하게 말라가도 그건 나의 문제지 너희의 문제가 아니다. 한데 그것은 홀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너희의 손길을 원했다. 그것은 갑자기 생긴 삶을 악착같이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밤마다 울음을 들었다. 그것이 내는 소리.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울음이었다. 그래서 울음을 기괴하고 징그러웠다. 울음에도 시기가 있다. 시기가 지나버린 울음은 처절하다. 눅눅하고 끈적하다. 몸에 닿으면 물집이 생길 것 같다.

그 울음에서 벗어나고 싶어, 나는 또 걸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공간의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그냥 걷는 것은 심심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아마 앞으로 점점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생각의 밑거름은 기억이다. 기억은 육체가 있어야만 존재했다. 그런데 내게 몸이 없으므로 나는 희미하게 연결된 감각이 완전히 분리되면 기억도 내게서 분리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생각을 많이 해둬야 했다. 살아가며 한 번도 멈춘 적 없던 생각을 의식하기란 역시나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즈음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그때 역시도 나와 내 몸이 완벽히 합일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필요했으므로 지금과 비슷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은 내게 없다. 몸에 기억의 흔적이 남아있겠지만, 몸에 깃든 것을 뺏어 올 수 없었다. 뺏어지지도 않는다. 그때의 일들은 기억보다 어떤 본능으로, 어떤 욕구로 형태를 바뀌었다. 그러니 몸이 형성되기 이전의 기억은 기억이 아니다. 나는 조금 더 뒤로 가본다. 내 최초의 기억. 최초는 너무 신기하다. 마치 전구에 불이 켜지듯 캄캄한 터널을 지나다 어느 한순간 아주 선명한 빛을 마주하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등에 있다. 그 등은 단단하고 넓다. 나는 여물지 않은 손바닥으로 등을 어루만진다. 소리는 등을 통해 전해진다. 한 알, 한 알. 단단한 목소리가 알맹이처럼 올라와 손바닥에 터졌다. 그 소리는 내 귀가 아니라 몸이 들었다. 몸은 원체 무언가를 잊는 법이 없다.

몸의 기억장치는 뇌의 방식과 다르다. 몸은 기억에 순위를 두지 않는다. 기억은 강한 것, 비교적 가까운 것, 잊고 싶은 것들을 언제나 전면에 내세워 불현듯 떠오르게 했지만 몸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두었다가 적재적소에, 알맞은 상황에 끄집어낸다. 몸은 공평하다. 몸은, 잊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수십 년도 지난 그 등, 그리고 그 등을 어루만졌던 손바닥의 감촉을 기억할 수 있다. 내 몸을 뒤덮은 커다란 이불은 동굴이 된다. 움직이는 땅을 짚고 있는 나. 그 단단하고 억센 땅의 울림. 나는 곧 서러워졌다. 몸과 분리되고 있으므로 이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나밖에 없다. 내가 잊으면 그것은 없던 일이 된다. 대물림되지 못한 기억이었으므로 완전히 소멸하고 만다. 내가 가장 사랑하던 순간이 나와 함께 죽는다. 내게 남는 것이 있을까. 아무것도 남지 못하면 내가 여기 있음을, 나는 무엇으로 내게 증명할 수 있을까.

내게 남은 마지막 기억은 지금 이 순간이겠지만, 내 몸이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빛이다. 붙잡고 있는 손이다. 누구의 손인지는 벌써 확실하지 않다. 아마 내가 사랑하는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던가. 얼굴들이 떠오르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이름. 나는 곧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하지만 이제 슬프지 않다. 이름을 기억한다고 다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부르고 싶어도 부르지 못한다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어쨌거나 내 손을 잡고 있던 그 작고 따뜻한 손. 그 감촉은 잊고 싶지 않다.

나는 또다시 걸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걷고 있는 이곳이 궁금해진다. 내 안에 이다지도 넓은 세계가 있었던가. 어쩌면 내 안이 아닌 저 밖, 이 행성의 밖일지도 모른다. 혹은 몸이 가지 못한 다른 차원의 경계일 수도 있다. 몸과 분리된 사람들은 전부 이곳에 오게 되는 것일까. 독립된 곳이 아니라면 다른 이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컴컴해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다.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분명 울었다. 그렇지만 울었다는 기억만 난다. 나는 울고 싶지 않다. 울고 싶다는 마음 자체가 들지 않는다. 울고 싶다는 것이 무엇일까. 운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눈을 통해 분비물이 빠져나올까. 왜 나는 한 번도 이런 식의 이상한 현상을 겪으면서, 숱하게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눈물은 이상하다. 감정에 의해 신경이 자극되어 왜 하필 많은 반응 중 눈물이 흐르게 설계되었는지 이곳에 온 나는 끝내 알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이유를 알고 있는 어떤 존재에게.

문득 걷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자리에 멈춘다. 그것이 내게서 다리를 완전히 빼앗아 갔구나.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서히 사라지는 감각들을 느끼며,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던가를 떠올린다.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조금 전 무엇을 생각했던가? 이 역시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내는 소리도, 그리고 그것이 내는 소리도 아니다. 저 바깥에서, 혹은 저 밑에서 아득하게 들려오고 있다. 나는 익숙하지만 내 몸은 이제 거의 분리됐고 내게는 저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없다. 그렇지만 편안하다. 하염없이 듣고 싶다. 내가 들을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이 내게서 완전히 독립하기 바로 직전의 순간까지 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며 알 수 있다. 울고 있다. 목소리의 주인은 울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너에게 울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에게는 너를 위로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 세상 너머에는 이 세상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 세상은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다. 너머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에 오지 않는 이상. 그것이 ‘그 세상’이 가진 비극이다.

너는 나를 그리워하겠지만 ‘그것’이 내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억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 몸의 것이다. 나에게 남은 몸의 조각이 네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그걸 잊지 않고 있는 이 사실처럼, 내 몸은 너에게 그 말을 해줄 것이다. 나를 만져라. 나를 안아라. 내가 그리울 때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 몸을 찾아와라. 설령 그것이 너를 낯설게 할지라도 그것은 몸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전부 가져갈 수 없다. 그리고 끝내 그것도 몸의 기억을 조금씩 흡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너를 기억하는 내 몸이, 언제나처럼 너를 따뜻하게 안아줄 것이다.

그것이 몸의 기억이란다.

천선란(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ESC 많이 보는 기사

밸런타인데이, 한 커플 뽑아 에버랜드 ‘하룻밤 무료 전세’ 준다 1.

밸런타인데이, 한 커플 뽑아 에버랜드 ‘하룻밤 무료 전세’ 준다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2.

결혼을 약속한 남친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고 싶어요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3.

[ESC] 사랑·섹스…‘초딩’이라고 무시하지 마세요

물만 먹고 살 찌진 않듯, 성적 부진엔 원인이 있다 [ESC] 4.

물만 먹고 살 찌진 않듯, 성적 부진엔 원인이 있다 [ESC]

이 정도는 괜찮아, 호텔은 안 알려주는 ‘슬기로운 이용팁’ 5.

이 정도는 괜찮아, 호텔은 안 알려주는 ‘슬기로운 이용팁’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