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여행
비록 용암동굴 천장에선 물 떨어졌지만
편백 숲으로, 오름 호수로, 그림 속으로
비록 용암동굴 천장에선 물 떨어졌지만
편백 숲으로, 오름 호수로, 그림 속으로
지난달 26일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에 있는 사라오름 산정호수. 며칠 내린 비로 호수에 물이 가득 찼다. 김선식 기자
여긴 더운 날 와야겠어 ‘집중호우로 인하여 동굴 내부가 물이 많이 떨어지고 군데군데 고여 있기도 하므로 우비, 모자, 우산 등을 준비하시고 조심해서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만장굴 들머리 안내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행지에서 또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실제로 동굴 천장에선 산발적으로 물이 떨어졌다. 바닥 곳곳엔 물이 고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미끄러웠다. 여행객 대부분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들었다. 비 오는 평일 오후인데도 만장굴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끊이질 않았다.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만장굴 내부. 김선식 기자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만장굴 내부. 김선식 기자
비를 잊는 시간, 빛의 향연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미천굴과 협재굴·쌍용굴까지 완주하려던 계획은 만장굴 초입에서 애당초 접었다. 안락한 공간이 그리웠다. 불현듯 떠오른 곳은 ‘인공 벙커’. 2018년 11월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문 연 프랑스 미디어아트 상설전시관 ‘빛의 벙커’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훈데르트바서 작품에 이어 지난해 12월부터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다. 대로에서 약 500m 외진 길로 들어갔다. ‘빛의 벙커’는 옛 국가 기간 통신시설이던 비밀 벙커를 개조한 곳이다.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5.5m 단층 건물이다. 전시관 문을 열자 휘황찬란한 그림이 벽과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외부 소음이 차단된 공간엔 90대 프로젝터와 69대 스피커가 설치돼 관람객들이 눈과 귀로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서귀포시 성산읍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 오는 10월까지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한다. 김선식 기자
서귀포시 성산읍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 오는 10월까지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한다. 김선식 기자
며칠 비 내리다 그치면 밤사이 날이 갰다. 이틀 연속 꽤 많은 비(서귀포 기준 24, 25일 각각 123.2㎜, 27㎜)가 내린 터였다. 새벽부터 맘이 들떴다. 비가 많이 온 뒤에라야 물이 차오른다는 사라오름 산정호수에 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산정호수가 있는 오름은 물장오리오름, 물영아리오름, 물찻오름, 사라오름이다. 그중 사라오름 산정호수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해발 1338m) ‘양말 벗고 맨발로 걸어야지.’ 사라오름은 비가 많이 내린 뒤엔 호수 둘레길(나무 데크)까지 살짝 물에 잠길 때가 있다. 맨발로 호수를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운이 좋으면 호수에 물 마시러 오는 노루 떼도 만날 수 있다. ‘어제 내린 비는 바로 오늘을 위한 비였으리라’ 생각했다. 새벽 6시30분 한라산 성판악 탐방로를 걷기 시작했다. 성판악~백록담 코스 약 3분의 2 지점에 사라오름 들머리가 있다.(성판악~사라오름 전망대 6.4㎞)
지난달 26일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에 있는 사라오름 산정호수. 김선식 기자
성판악 탐방로에서 만난 서현수씨 가족. 김선식 기자
서귀포시 남원읍 고이오름은 편백 약 7만 그루가 있다. 김선식 기자
가랑비 오면 다시 가 볼까 비 온 뒤 온통 편백 숲으로 뒤덮인 오름에 가보는 건 어떨까. 사라오름에서 내려와 고이오름(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으로 향했다. 약 4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이 오름에 편백 7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권송덕(61) 제주도 토종흑염소협회 회장은 “당시 오름 소유자가 골프장을 조성하려고 마을 주민들에게 일당 400원씩 주고 편백 7만 그루를 심게 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2015년 고이오름을 포함해 주변 총 3만9800평가량을 매입했다. 고이오름 들머리에서 흑염소 13마리를 키우기 시작해 현재 3000마리를 키운다. 지난해 7월부터는 ‘토종흑염소목장’과 고이오름을 외부에 개방했다. 오전 10시~오후 5시 매시 정각 흑염소 먹이 주기 체험을 한다. 고이오름 둘레길도 만들었다. 짧은 길은 20~30분, 긴 길은 35~40분 코스다. 편백을 다듬고 남은 가지와 껍질을 잘게 잘라 숲길에 깔았다고 한다.
사라오름으로 가는 성팍안 탐방로. 김선식 기자
제주 우중 여행 수첩
만장굴 제주시 구좌읍 만장굴길 182(전화 064-710-7903). 매달 첫째 수요일 휴관한다. 입장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10분. 입장료 4000원.(성인 기준)
빛의 벙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전화 1522-2653). 입장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4~9월 기준) 입장료 1만5000원(성인 기준)
사라오름 성판악 탐방로 들머리 주소는 제주시 516로 1865.(전화 064-725-9950). 성판악 탐방로 입산 시간은 새벽 5시~오후 1시.(5~8월 기준) 성판악 매표소에서 입장료는 무료, 주차비는 1800원(일반 승용차 기준)이다.
고이오름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산 14.(전화 064-805-5099) 입장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료 8000원.(성인 기준)
식당 구좌읍과 조천읍 일대에 제주도 거주민이 추천하는 갈 만한 식당으로는 비자림길(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2682/064-782-5118/흑돼지 정식 8000원), 금보가든(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639/064-782-7158/흑돼지 두루치기 8000원), 원조교래칼국수(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645/064-782-9870/보말 전복 칼국수 9000원) 등이 있다. 성산읍에는 고성장터국밥(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동서로45번길 19/064-783-3233/몸국 7000원), 가시아방국수(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528/064-783-0987/고기국수7000원) 등이 있다. 남원읍에는 뙤미(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86/064-764-4588/제주산 찹쌀 순대국밥 8000원), 동선제면가(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3/064-764-5555/재료 소진 시 조기 마감/흑돼지 고기국수 8000원) 등이 있다. 서귀포 시내 화정식당(서귀포시 중앙로 47번길 24/064-762-1001)은 갈치·향토 음식 전문점이다. 갈칫국 1만3000원, 갈치조림(2인분 이상) 2만원. 한동네(서귀포시 동부로 4/064-732-4573)는 메밀 뼈국 8000원, 보말 성게 칼국수 1만1000원. 바당국수(서귀포시 중앙로48번길 43/064-733-9259)는 고기국수 7000원, 돔베고기 1만5000원.
숙소 인근 숙소는 빨간풍차펜션(제주시 구좌읍 김녕남2길 36/010-6425-1645), 라마다함덕호텔(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470/064-793-5500), 브라운 스위트 제주 호텔앤리조트(서귀포시 성산읍 고성오조로 94/064-786-6200), 예이츠산장(서귀포시 남원읍 516로 918/064-767-3746) 등이 있다.
다른 여행지 제주도 공식 관광정보 포털 사이트 ‘비짓 제주’(visitjeju.net)는 제주 문화와 역사, 관광지, 음식점, 숙박, 쇼핑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누리집에선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제주 명소로 ‘절물자연휴양림’(제주시 명림로 584/064-728-1510), ‘비자림’(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55/064-710-7912), ‘북촌 돌하르방공원’(제주시 조천읍 북촌서1길 70/064-782-0570), ‘사려니숲길’(제주시 봉개동 산 64-1/064-900-8800), ‘김영갑 갤러리’(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064-784-9907)를 제안한다.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