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길을 걷는데 달콤하고 강렬한 치자꽃 향기가 바람 속에 만발하다. 잠시 마스크를 벗고, 이 화려한 향수병 관목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치자꽃이 떨구고 있는 미필적 순수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웨딩드레스를 연상하게 하는 겹겹이 벨벳 질감의 새하얀 꽃잎은 끝도 없이 연약하다. 불현듯 오래된 결혼식의 추억 한 조각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때가 되니 앞뒤 없이 피어버린 순진함과 결혼은 꽤 닮은 구석이 있다. 어쨌든 초여름에 결혼하는 신랑 신부라면 치자꽃으로 꾸며진 예식 공간을 주문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치자는 학명이 가드니아(Gardenia)일 정도로 정원을 꾸미는 사람에겐 필수 아이템에 속하지만,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은 아니다. 원래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라 바깥에서 월동이 힘들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길 가다 잘 키운 치자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다. 베란다에서 치자를 키우는 경우도 많은데, 새시를 살짝 열어두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 행복감을 줄 수 있을 법하다. 향기가 좋은 꽃 화분을 내어놓거나, 화단을 가꾸는 일은 한 개인이 불특정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어릴 적 살던 집에는 할아버지가 키우시던 오래된 천리향이 있었는데, 그 향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좀 과장 섞어 말하자면 하굣길에 그 향기를 맡으며 집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주소 대신, 천리향 향기 나는 집을 찾아오면 된다고 전화로 일러주시던 할아버지의 익살스러운 ‘식물부심’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래서 우리 식구의 ‘최애’ 자리는 정원 쪽으로 깊숙이 뻗어있는 대청마루였다. 수박 따위의 과일을 먹으면서 감상하는 천리향과 돌배나무꽃, 목련과 동백과 모과꽃과 석류꽃은 우리 가족의 보물 같은 순간이자 손님에게 내어놓는 최고의 대접이었다.
회상은 그쯤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달빛에 잠긴 이화(배나무의 꽃) 정원이 있는 남부지방 주택에서의 추억은 다시 사기엔 좀 비싸다. 기껏해야 다 먹지 못한 고구마 덩굴을 창가에 키우며 히죽대고 있는 내 모습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좀 측은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 탓은 아니고, 시대가 축소사회라 어쩔 수 없는 현상인데도. 할아버지가 가지고 누리셨던 공간적, 시간적, 마음의 부유함을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사회 탓이다. 마당은 고사하고, 테라스는 고사하고, 60㎝ 창틀이 내가 쓸 수 있는 나의 정원이다.
여건이 좀 나은 분들은 베란다를 정원으로 꾸미기도 한다. 다용도실을 터서 만든 멋진 정원도 본 적이 있다. 자연지반을 곁에 두고 살 수 없는 우리 대부분이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옵션이 화분이라는 의미겠다. 좀 비싸긴 하지만 에어플랜트도 포함된다. 아파트에는 베란다에 새시를 치고 거실과 연결한 경우가 흔한데, 거기서 심각하게 화분 정원을 가꾸시는 분이 많다. 요즘의 집단 주택에서 거실은 정원을 갖지 못한 자들의 ‘그나마’라고 할지는 몰라도, 원래 거실과 정원은 공간의 쓰임새로 볼 때 하나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합쳐진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가 거실이라고 부르는 리빙룸, 그리고 리빙룸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원은 오래전부터 주인의 여가 시간과 비례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리빙룸과 정원은 최상위 계층의 집에만 존재했으며, 농민들의 집에는 없었다. 농민들에겐 여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어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나무를 해야 했고, 나물을 말려야 했으며, 옷감을 짜거나 호롱불을 밝힐 기름을 짜야 했다. 그들에게 거실은 곧 작업장, 일하는 공간이었으며, 정원이나 마당 또한 생산을 위한 공간이었다.
이에 반해 부유한 여성들의 여가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거실이나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담소였다. 무역과 상업에 종사했던 신흥 부르주아 중산층에 속하는 부인들은 그만큼의 재력과 여유 시간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리빙룸의 등장은 농업사회가 상업사회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람들 간의 정보 교환이 일상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집은 가족 규모의 삶을 위한 공간을 벗어나 남에게 보여주는 쇼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쇼룸은 단순히 자랑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리빙룸의 개념이 태동한 네덜란드에서는 실제 물건을 파는 곳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엔 마치 상점의 쇼윈도 같은 창문을 달기도 했다. 리빙룸은 온갖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으로 치장한 곳이었다. 즉 이러한 집의 형태는 제국주의의 시작을 보여주며, 자본주의의 정점이고, 물건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을 나타내는 공간이다. 대개 취향이라는 것도 ‘물건’에 기반을 둔 멘탈리티(사고방식)에 불과하다. 흔히 관엽식물이라고 부르는 열대우림의 하층 식생을 가져다 리빙룸을 꾸미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었다.
따지고 보면, 요즘 보편화된 1인 가구는 농업사회의 농민들과 비슷하다. 항상 일을 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리빙룸이라는 공간을 둘 여유나 재간이 없다. 거실은 오피스이고 작업실이다. 사실 큰 화분을 여럿 들여놓고 잘 키우기가 쉽지 않다. 정원은 더 비현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할아버지가 가지셨던 화려한 숲 정원에 대한 로망을 갖고 살듯이, 많은 사람이 식물에 대한 아쉬움을 안고 산다. 가능하다면 거실 전체를 정원으로 바꿔서 작은 식물원에 살고 싶다는 상상을 해 본 건 나뿐일까?
앞으로 자율주행차의 공유 시대가 오고, 자동차의 개인적 소유가 줄어들게 되면 우리 골목의 모습도 많이 바뀔 것이다. 지금처럼 차들이 주차장처럼 꽉꽉 들어찬 모습이 차차 여유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주차 공간으로 쓰이던 포장면을 벗겨버린다면 차 한 대가 차지하는 2.5×5.0m 면적의 정원은 1인 가구들의 훌륭한 거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몽상도 덧붙인다.
화초 가꾸기의 가장 큰 일은 단연 물주기다. 식물을 건강하고 풍성하게 쑥쑥 잘 키우시는 분들을 보면 통기성 좋은 토양을 채운 후, 자주 물을 주기 때문에 물 빠짐이 상당히 중요하다. 펄라이트나 마사, 유기물을 섞어 작은 구멍이 많은 흙은 수분을 잘 머금기도 하지만, 한꺼번에 많은 양을 관수하면 영양분이나 토양 입자가 빠져나가 버리므로 마치 드립 커피를 내리듯 천천히 조심스럽게 주어야 하는데, 이것 말고도 빛이나 온도, 습도, 통풍 등 실내에서 식물 키우기는 여간 신경 쓰이는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보태닉(생태, 식물)이 미래 트렌드라고 하지만, 지금의 집은 여전히 식물과의 공생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지어진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원하는 식물에 대한 다양한 욕구를 소비할 수 있는 건축적 시도는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관여하고 있는 대구의 비산동정원미술관에서 작은 실험을 해보는 중이다. 작가들이 작업과 생활을 겸하는 스튜디오 공간에 베란다처럼 방마다 배수구를 설치했다. 입주자가 원한다면 좀 더 많은 식물을 키우기에 편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식물이 가득한 정원에서 깨어나는 상상, 멋지지 않은가.
글·사진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