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토랑 ‘갈리나 데이지’를 운영하는 박누리 셰프가 만든 ‘어란 파스타’와 ’어란 카르파초’. 박미향 기자
소설가 김훈은 한때 울진에 거주하면서 글을 썼다. 바다를 바라보며 글감을 생각했지만, 복잡하게 얽힌 내면은 그를 결국 도망치듯 울진을 떠나게 했다. 하지만 울진 죽변항에서 그가 만난 가자미와 곰칫국은 2014년께 수려한 문장이 되어 우리 곁에 나타났다. <라면을 끓이며>에 등장한 가자미는 김훈의 예리한 레이다에 걸려 발가벗겨졌다. 탱탱한 가자미는 위로가 되었으리라. 만약 그가 가자미를 포함한 생선 알의 매력도 알았다면 그의 글은 어찌 되었을까. 어란 전도사도 만났다면?
지난 9일께 지리산에서 식품제조업체 찬해원을 운영하며 어란을 만드는 양재중(47) 요리사가 상경했다. 서울 종로구 인왕산로에 있는 공유주방 위쿡 사직지점에서 열린 ‘양재중 어란 원데이 클래스’를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어란은 특이하다. 조선시대 방식으로 만드는 전남 영암의 ‘김광자 어란’과도 다르고, 일본 가라스미나 이탈리아 보타르가, 대만의 유우즈와도 차이가 있다.
“복잡하진 않는데, 섬세한 작업이다. 어란용 생선 알은 4월 말 구한 게 가장 좋다. 가을 어란, 봄 어란, 햇어란 등은 맛이 다 다르다. 지난해 숙성한 어란은 묵직한 맛이 난다.” 양재중 요리사의 설명에 눈보다 흰 마스크를 쓴 20여명이 귀를 쫑긋 세웠다.
어란은 숭어나 민어 알 등을 소금이나 간장에 절이거나 재운 다음 참기름 등을 발라가며 말리는 고급 음식이다. 얇게 썬 어란 한 조각은 조선시대 귀한 술안주였다. 임금에게 바치는 대표적인 진상품이었다. 당시 생선 알은 구하기도 어려웠지만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 걸 걸리는 건조 시간 때문에 ‘어란〓귀한 음식’이란 공식이 성립하기에 충분했다. 이런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양재중 어란’은 마켓컬리에서 5만9900원(140~160g)에 판매하고 있다. 국내 명인이 만든 어란 중엔 수십만원이 넘는 것도 많다.
양재중 요리사가 숭어에서 알을 빼고 있다. 박미향 기자
양재중 요리사가 숭어알의 피를 제거하고 있다. 박미향 기자
양 요리사가 팔뚝만 한 숭어를 도마에 얹었다. “알을 구하기 위해 생선을 잡는 건 안 된다. 생선 먹고 남은 알마저 제대로 조리해 먹자는 게 어란의 시작이다.” 이날은 그가 시연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예리한 칼을 뽑았다. 배를 갈라 알을 꺼냈다. 누군가 물었다. “반드시 숭어알로만 만들어야 하나?” 양 요리사가 답했다. “대구, 민어, 광어 등 생선이면 다 가능하다. 다만 생선에 따라 알 입자의 굵기가 다르고, 알 막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역시 어란은 숭어알이어야 고유의 풍미가 제대로 난다. “서해에서 잡히는 참숭어는 갯벌 지렁이가 먹이라서 알에서도 갯냄새가 난다. 남해 보리숭어는 갯벌 냄새는 안 나지만, 잡기가 힘들다.” 그는 서해 참숭어로 어란을 만든다. 우리 전통 어란 생산자인 김광자 명인도 갯벌에서 잡은 숭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열심히 피를 제거하고 있는 수강생. 박미향 기자
알의 피를 제거할 때 쓰는 도구. 박미향 기자
그는 숭어알을 납작한 스테인리스 그릇에 넣은 다음 숟가락으로 뭔가를 살살 밀어냈다. 손가락 세 마디 길이의 작은 핀셋으로 뭔가를 뽑았다. 자세히 보니 알에 맺힌 핏방울이었다. “피를 빼지 않으면 비린내가 난다. 잡은 지 24시간 안에 작업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알 막이 얇아져서 찢어지기 쉽다.” 찢어지면 어렵게 구한 알은 버려야 하나? “실로 묶으면 된다. 명주실은 자칫 베일 수 있으니, 무명실이 가장 좋다.” 그가 실로 봉합하는 법까지 시연하는데, 얼핏 보면 수술대 위 집도의다. 그가 농을 한다. “전생에 외과 의사였을 거다.” 웃음꽃이 폈다.
이날엔 요리사, ‘살롱 드 쿡’ 같은 쿡킹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요리 연구가, 조리학과 교수, 해산물 판매 플랫폼 ‘인어교주해적단’ 상품기획자, 전통주 ‘풍정사계’ 양조장 직원 등 직업도, 하는 일도 다른 이들이 모였다. 소박한 한식당 ‘요수정’을 운영하는 요리사 신창현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2년 전부터 병어, 방어, 광어, 숭어, 삼치 등의 알로 만들어봤다. 쉽지 않더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난해 열린 이 수업을 놓쳐서 아쉬웠다.”
신 요리사가 전문가라고 치켜세운 양 요리사는 어떤 이일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타워호텔(지금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에 입사했다. 1997년 “기타오지 로산진(일본의 유명한 도예가이자 음식 전문가)처럼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일본에 건너가 2005년께 귀국 전까지 도쿄, 오사카 등의 식당에서 실력을 키웠다. 일본의 유명한 요리학교 ‘핫토리 영양 전문학교’에서 수학도 했다. 매일유업에서 운영한 ‘타츠미스시’의 총책임자로 일하다가 모친의 병환 때문에 지리산 자락에 가 된장, 간장, 어란 등을 제조하는 식품업체 찬해원을 열었다. 지금 그는 장안대 호텔조리과에 출강하고 식당 컨설팅 등을 겸업하고 있다.
수강생들은 알 한 덩이씩 받아 들고는 양 요리사처럼 피를 뽑기 시작했다. 하지만 좀처럼 티끌조차 없는, 눈부시게 깨끗한 알로 만들지 못했다. 그들은 몇 번이나 검사를 맡았지만, “다시”란 말을 들었다. 강의실은 고요한 지리산 자락이 됐다. 비릿한 바다 향이 떠돌았다. 어란 특유의 단순하고 고고한 짠맛이 코를 후벼팠다. 수강생들은 부끄럼도 없이, 체면은 던져버린 채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자, 맛보시라.” 양 요리사가 지리산에서 가져온 어란을 잘라 대접하기 시작했다. “어란에 기름기가 있어 담백한 무와 잘 어울린다.” 강의실 천장 등 쪽으로 어란을 들어 올려 살피니 어란의 색은 선명한 황금빛이었다. 맛보기도 전에 황홀하다. 어란은 얇아도 힘이 세다. 이에 쩍쩍 붙는다. 말랑말랑한 혀를 이리저리 돌려 힘껏 떼어내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다. 그럴수록 침이 흐른다. 짠 내 밴 맛있는 침이다. “무를 씹어 봐라. 떨어진다.” 양재중 요리사가 말했다.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주문을 받는 시대에 혀를 굴리는 것과 무를 씹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니,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다.
“어란에 소금을 왕창 뿌려 덮어라. 천일염은 막을 찢는다. 그냥 꽃소금을 뿌려라. 2시간 정도 절여라.”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절인 어란을 간장과 청주를 섞은 물에 재운 다음 향 없는 곡주로 씻고 말리면 완성이다. 양 요리사는 23도 문배주를 사용한다. “술로 닦는 이유는 알에서 나오는 기름이 막의 미세한 구멍들을 막아 빵빵해지는 걸 방지하는 거다. 수분 보충과 소독 효과도 있다.” 어란은 3개월간 숙성한 게 가장 맛있다고 한다. “햇볕 들지 않은 곳에서 상온보관하면 1년간 먹을 수 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매서운 질문이 터져 나왔다. “결국 ‘양재중 어란’은 일본식이 아닌가?” 그가 말했다. “그냥 ‘양재중식’이다.” 우리 어란은 소금물로 피를 뺀 다음 간장에 재운 후 참기름을 바르면서 말린다. 무거운 것으로 눌러 딱딱하게 한다. 일본식은 알을 소금에 절인 후 간장과 청주를 섞은 물에 재운다. 그런 다음 건조한다. 건조기를 사용해 완성 시간을 줄이거나 발색제 등을 사용한다. 양재중 요리사의 어란은 참기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것과 다르고, 문배주로 닦는다는 면에서 일본식과 다르다.
박누리 셰프가 만든 ‘어란 카르파초’. 박미향 기자
크림 바른 바케트 위에 얹은 어란. 박미향 기자
이날 행사는 배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종로구 통인동에서 이탈리아 레스토랑 ‘갈리나 데이지’를 운영하는 박누리 셰프가 어란 파스타와 어란 카르파초를 만들어 잔칫상을 차렸다. 전통주 풍정사계를 제조하는 농업회사법인 유한회사 화양의 이옥주씨는 “파스타 면과 먹으니 그리 짜지 않다. 심심한 바게트와도 잘 어울리는 듯하다”고 말하면서 양조장이 있는 충북 청주에 가면 자신의 어란을 완성할 거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산후 복통의 치료제이기도 했다는 어란은 염도를 고려해서 술안주로 소량 먹는 게 좋다. 정성을 다하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어란, 폭우 치는 여름밤 소일거리로 이만 것도 없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다진 잣과 어란으로 만든 다식. 양재중 요리사 제자들인 장안대 학생들이 만들었다. 박미향 기자
[ESC] 박누리 셰프가 알려주는 어란 파스타 조리법
양재중 요리사는 “어란 파스타는 박 셰프가 최고”라고 평한다. 박 셰프는 최근 향신료 고수 요리책 <모두의 고수>을 펴내기도 했다. 박 셰프는 ”피시 스톡 만드는 게 어란 파스타에선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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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란 파스타
재료 : 스파게티면 130g, 피시 스톡 230㎖, 버터 1T, 올리브오일 50㎖, 주키니 호박 20g, 간 마늘 ⅓t, 소금 약간, 자른 어란 조각, 어란 파우더 조금
만들기 ① 팬에 버터와 마늘 볶다가 피시 스톡과 삶은 면을 넣는다. ② 소금 간하고 올리브오일을 섞는다. 볶은 주키니 호박을 마저 넣는다. ③ 접시에 담은 후 어란과 어란 파우더를 올린다.
※ 피시 스톡 냄비에 오일을 두르고 생선뼈 넣는다. 화이트와인 200㎖ 붓는다. 물 4ℓ 채운 후 양파 100g, 당근 150g, 셀러리 25g, 마늘 3개, 통후추 2g, 월계수 잎 2조각을 넣어 마저 끓인다. 반으로 졸아들면 꽃소금을 넣는다. 체에 거른다.
부드러운 크림을 바른 바삭한 바게트에 얇게 자른 어란을 올려 먹어도 근사하다. 흰살생선 카르파초에 다진 어란을 뿌리기만 해도 별미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