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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글, 그 사람이 쓴 글, 그게 그 사람이더라!

등록 2020-04-24 10:23수정 2020-04-27 13:30

<내일은 미스터 트롯> 방송 화면 갈무리.
<내일은 미스터 트롯> 방송 화면 갈무리.

누군가의 글을 읽고 그 사람을 조금 더 깊이 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 경우엔 장모님이 그랬다. 몇 년 전 아내와 집 앞 갈빗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우리 엄마가 쓴 수필”이라며 글 하나를 보여줬다. ‘없는 번호’라는 제목의 200자 원고지 14장 분량의 에세이였다.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해진 장모님이 별 필요가 없어진 집 전화기를 해지하는 날에 대해 쓴 글이었다. 글을 보니, 장모님에게 그 전화기는 고대하던 남편의 승진 소식, 아들의 대학 합격 소식을 전해준 전화기였다. 새해 첫날 당신의 막냇동생의 부음을 전달한 전화기였으며, 미국에 있는 언니에게 그 부음 소식을 전한 전화기였고, 동시에 그 소식을 들은 언니의 애잔한 울음소리를 ‘비행기보다 빨리’ 전달해준 전화기였다. 장모님은 통신 계약을 해지하고는 아쉬워서 스마트폰에 ‘우리 집’을 검색해서 자신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가 안내 방송의 “없는 번호”라는 대답을 들었다. 장모님 집 전화기는 아내가 32년 동안 쓴 친정 전화기기도 하다. 지금 아내의 휴대전화 뒷자리 번호는 그 집 전화번호 뒷자리와 같다. 돼지갈비를 먹다가 갑자기 한 가정의 역사를 끌어안은 느낌이 들었다. 아내와 장모님을 바라보는 내 눈에 필터가 하나 덧대지는 기분이었다.

〈에스콰이어〉 4월호에는 20년 지기 내 친구의 글을 실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보다 두살 위 형인 안태준은 내가 아는 한 가장 호쾌하게 북을 내려치는 드러머다. 그는 항상 큰북, 작은북, 스네어 드럼, 심벌 할 것 없이 멋지게 내려쳤다. 로큰롤 밴드 ‘오! 부라더스’, 파워 팝 밴드 ‘줄리아 하트’ 멤버였던 안태준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건 10년쯤 전이다. 그가 ‘급성 혼합형 백혈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난 큰 힘이 되지 못했다. 완쾌한 후 우리는 크게 변한 것 없이 예전처럼 맥주를 마시고 놀았다. 그는 아팠을 때 얘기를 길게 한 적이 거의 없다.

이번에 나는 그에게 ‘영미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하던 형이 어쩌다 나이 마흔이 넘어 트로트에 빠졌는지’에 대해 써달라고 청했다. 리틀 리처드, 밥 말리, 스틸리 댄, 팻 메스니 그룹을 사랑하던 안태준은 어쩌다 트로트에 빠졌을까? ‘방송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찬또배기 이찬원의 청국장 같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으나, 그의 답은 내 예상을 크게 빗나갔다. 그는 투병 생활이라는 인생의 굴곡을 지나자 트로트가 귀에 들어왔다고 썼다. “대학 병원 무균실에서 아빠를 만나러 온 갓 돌 지난 아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울음을 삼키며 버텼다”라며 “조혈 모세포 이식을 받은 후 ‘재발 위험성이 매우 적은’ 지금 상태에 이르기까지 내게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어넣어 준 것도 역시 아들”이라고 썼다. 그런 얘기를 내게는 한 적이 없다. 또 그는 “트로트의 매력은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어느 정도 맛본 사람에게 느닷없이 찾아온다”며 “가족 여행에 함께 나선 장인어른이 부르는 송대관의 ‘딱 좋아’ 가사가 귀에 꽂혔다. 인생의 크나큰 곡절들을 넘어온 내 가슴에 이 노래 가사의 여운이 마치 전복 내장의 맛처럼 무겁고 둔탁하게 천천히 가라앉았다”고 썼다. 장인어른과 아들의 손을 잡은 안태준이 산길을 걸으며 “눈물도 흘렸다. 원망도 해봤다. 삶에 지쳐 쓰러져도 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이 딱 좋아”라며 송대관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왜 이렇게 감상 돋게 썼어”라고 하면서도 가슴이 뭉클했다.

소설가와 인터뷰를 할 때 “독자가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자신이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느끼게 했다면 좋은 소설”이라는 답을 들었다. 그게 꼭 소설에만 해당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는 언젠가 먼 훗날에 안태준의 아들이 그가 2020년에 쓴 글을 읽는 날을 상상한다. 내가 장모님이 쓴 수필을 읽고 내 아내 가정의 역사를 끌어안는 느낌을 받았던 것처럼, 안태준의 아들도 아빠의 글을 읽으면 눈에 필터가 하나 덧대지는 경험을 할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고도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문자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내고, 페북에 올릴 포스팅을 수필로 써보면 어떨까?

박세회(<에스콰이어>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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