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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빛도 과식하면 탈 난다

등록 2020-03-18 21:12수정 2020-03-19 02:41

노골적으로 밝은 빛은 부담
내겐 LED 조명이 대표적인 것
“변기에 앉으니 길거리에 용변 보는 듯”
도시의 조명과 연애의 성공은 직결
극단적으로 밝은 빛은 눈 피로 불러와
직광보다는 반사광·산란광 추천
테이블 위 조명을 낮추어 빛으로 만든 둥지를 연출했다. 사진 최이규 제공
테이블 위 조명을 낮추어 빛으로 만든 둥지를 연출했다. 사진 최이규 제공

며칠 집을 비웠더니, 부지런하고 꼼꼼한 집주인께서 그새 모든 집안 조명을 깡그리 바꿔 놓으셨다. 달려있던 거실 형광등 2개 중 하나가 깜빡깜빡한 지 오래됐지만, 오히려 그걸 다행스럽게 여기던 참이었는데. 노골적으로 밝은 불빛이 늘 성가셨다. 마음속에 남아있는 한 점 양심의 때까지 모조리 찾아내 비추겠다고 작정한 듯한 부담스러운 녀석들을 피해 늘 좁은 집안 구석에 몸을 숨기곤 했지만, 이제 죽어버린 형광등 따위와는 비교조차 불가! 예수의 재림처럼 빛나는 엘이디(LED) 조명의 습격에 덜컥 당해버린 나는 뱀파이어만큼이나 짜증이 났다. 이 친환경적이고, 잘하면 원전 하나 없앨 수도 있을 거 같은 엘이디가 고맙기만 해야 하는데, 나는 어째 영 못마땅하다. 누런 포장지를 꺼내어 꽁꽁 감싸버렸더니, 이제 좀 눈이 편해진다.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음예 예찬>에서 어떤 한적한 절간의 거무스름한 뒷간을 찬미한 적이 있는데, 우리 집 화장실은 그것과는 반대가 되었다. 새로운 주광색 엘이디 발광체는 흰 타일들에 반사되어 몇 배로 증폭된 괴력을 내뿜고 있었다. 내 코가 드리우는 검은 그늘이 바닥까지 이어질 만큼 강력한 불빛이 돼버렸다. 변기에 앉아있자니, 마치 대낮 길거리에서 용변을 보는 느낌이다. 거칠고 울긋불긋한 피부도 전혀 여과 없이 거울에 반사되어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자존감 하락이 우려되지만, 그렇다고 화장실 천장에도 종이 쪼가리 미봉책이 통할 리가 없었다. 습기가 많아 금방 흉하게 떨어져 게 뻔하다. 나는 그냥 눈을 감자는 쪽을 택했다.

모닥불을 연상하게 하는 도시의 주황색 불빛들. 밴쿠버 새벽 풍경. 사진 최이규 제공
모닥불을 연상하게 하는 도시의 주황색 불빛들. 밴쿠버 새벽 풍경. 사진 최이규 제공

사람은 어두울수록 예쁘게 보이기 마련이다. 세계 어느 도시를 가도 가스라이트가 켜진 올드 시티가 가장 로맨틱한 이유다. 돈이 없어서도,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다. 딱 그 정도 불빛 아래서 상대방에게 느끼는 만족도가 가장 높기 때문이다. 도시의 조명이 연애의 성공과 직결된다는 주장은 과장이 아니다. 아무도 없는 광장에서 음악 없이 춤을 추더라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으면 된다. 프랑스 파리의 보옐디외 광장이 그런 밝기다. 보름 달빛보다 조금 밝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다 아는 것보다 당연히 낫기 때문이다. 중동의 어느 족속은 별빛 아래서만 결혼하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가죽의 반사판을 이용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 거실등. 사진 최이규 제공
가죽의 반사판을 이용해 편안한 분위기를 연출한 거실등. 사진 최이규 제공

그런데 우리의 조명 문화는 뭐든지 잘 보여야 안심이 되는 문화다. 그리 뜯어볼 일도 없고, 밤새워서 책을 읽을 일은 더욱 없지만, 아직도 우리는 너무나 밝게 산다. 불을 잘 끄고 살면 될 것을, 굳이 엘이디로 바꿔가며 별 쓸모도 없이 켜놓고 산다. 밤에 천장 벽지의 무늬나 몰딩의 윤곽까지 또렷이 봐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낭만적으로 살자는 말이 아니다. 달을 티브이(TV) 삼았던 백남준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 그저 좀 편안해지자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엘이디에 반대하는 편이다. 아니, 엘이디의 사고방식에 반대한다는 편이 맞겠다. 건물 깊숙한 곳에서 식물의 벽을 키우느라 훤히 불 밝히고 있는 모양새가 너무 속물답다고 느낀다. 귀해야 아껴 쓰는 법인데, 막 아무렇게나 써도 괜찮다는 저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자라야 소중한 법인데…. 아니 꼰대 같은 소리는 그만두고. 어차피 나도 그리 살뜰한 편도, 환경을 위해 내 한 몸 희생하는 쪽도 아니다. 솔직히 엘이디에 진짜 불만은 빛의 ‘질’에 대한 것이다. 헤드램프 쓰고 야간 산행을 해 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다. 강한 빛은 역설적으로 강한 어둠을 만든다. 엘이디가 만드는 극단적인 밝음과 어둠의 차이는 눈을 상당히 피곤하게 한다. 20년 써온 고전적인 페츨램프의 스페어 전구가 수명을 다했는데, 나는 더는 엘이디가 아닌 일반 전구로 된 제품을 구할 수가 없다. 선택지가 없어진 것이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실내 조명. 사진 최이규 제공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실내 조명. 사진 최이규 제공

눈을 찌르는 듯한 불쾌감 또한 엘이디의 문제다. 일광전구 사장님으로부터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엘이디는 기본적으로 단속적인 불빛이다. 극소한 간격이지만 끊임없이 켜짐과 꺼짐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요즘 나오는 차량에 장착된 헤드라이트도 반대 차선에 있는 차의 심기를 거스를 때가 잦은데, 굳이 집안에서까지 내 눈을 찌르는 엘이디 등을 달아야 할 필요는 없다. 괜한 빛의 홍수를 만들지 말고, 잘 모아서 빛의 단지 속에 얌전히 담아두는 편이 나을 것이다. 평창동 최아무개씨의 집에서 볼 수 있듯, 조명의 높이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빛으로 인한 과로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빛의 색도 매우 중요하다. 요즘엔 엘이디도 다양한 색의 전구가 시판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써야 한다면 선택의 폭은 넓은 편이다. 백색은 사람을 창백하게 보이게 만들고, 주황색 불빛은 사람을 생기 있고 따뜻하게 보이게 한다. 그 자체로 인류가 진화하면서 수백만년 동안 봐왔던 모닥불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준다는 건 순전히 근거 없는 내 추측이다.

평창동 최아무개씨 주택. 사진 최이규 제공
평창동 최아무개씨 주택. 사진 최이규 제공

직진이냐, 꺾어진 빛이냐, 한 번 걸러진 빛이냐 등도 고려해야 할 점이다. 여유가 된다면 직광보다는 반사광 내지 산란광 조명을 사용해 보는 것도 좋다. 모델들의 인물 사진을 촬영할 때, 얼굴에 대고 플래시를 터트리는 사진가는 없다. 항상 반사광을 쓴다. 편안하고 예쁜 빛을 주기 때문이다. 전구가 방향성이 있다면 곧바로 생활 공간으로 투사시키는 편보다는 종이나 표면이 불규칙한 천 소재, 혹은 벽면을 통해 반사한 빛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창호지 같은 얇은 소재가 있다면 옛사람들처럼 전구의 주위를 감싸서 산란광을 만들어 내면 훨씬 더 안온한 분위기의 부드러운 빛을 만들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조명을 살 수 없다면, 저렴하게 만들어 보는 것도 방법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다들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밤늦게까지 훤히 불을 켜 놓고, 쉬지 않는 경우가 잦다. 많은 사람이 사소하게 여기지만, 빛은 심각한 과로를 초래한다. 티브이나 핸드폰도 피로를 누적시키지만, 그저 별생각 없이 켜놓은 불 또한 과로의 원인이다. 저녁에 촛불 하나만 켜놓고 화장실을 쓰기만 해도 훨씬 더 집에 온 기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 해가 지면 어두워지는 집이 눈에도, 건강에도 좋은 집이다. 음식에 대한 무절제도 해롭지만, 빛을 과식하는 것도 좋지 않다.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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