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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힘든 인생 되돌리기와 보호필름 다시 붙이기의 공통점은?

등록 2020-03-18 21:10수정 2020-03-19 02:40

허지웅의 설거지2
<굿 와이프> 시즌7의 11번째 에피소드
삶을 관통하는 7가지 장면 등장
최근 받은 다른 내용의 쪽지 두개
삶이 힘들고 시간 되돌리고 싶다는 내용
그들에게 쉽게 할 수 있는 위로 대신
지난 생의 7가지 장면 찾아보라고 권유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굿 와이프> 일곱번째 시즌 열한번째 에피소드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다. 모두 일곱개의 컷으로 이루어져있다. 첫번째는 딸이 태어나 처음으로 걷는 날이다. 두번째는 벌써 조금 자란 아이가 첫 등교를 하는 날이다. 세번째는 아이가 학교에서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날이다. 네번째는 어느새 사춘기를 맞은 아이가 교정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고 슬퍼하는 장면이다. 다섯번째는 부쩍 자란 아이가 졸업 무도회에 가려고 드레스를 차려입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다. 여섯번째는 그녀가 첫사랑과 키스를 하는 장면이다. 일곱번째는 이제 성인이 된 그녀가 아버지와 평화롭게 대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어디선가 잘못 날아온 총알에 맞아 사망한다. 여기까지 2분이 걸린다.

처음 보고 두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번째, 편집을 잘했다. 두번째, <굿 와이프>가 종종 민주당 프로파간다를 자처하는 건 사실이지만 총기 금지 이슈 파이팅을 위해 이렇게까지 선정적으로 했어야 했나. 특히 두번째 이유 때문에 다소 분했다. 총알이 날아오기 전까지 그 2분 동안 정말 내 딸처럼 애틋했기 때문이다.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최근 우연히 이걸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과는 많이 달랐다. 이야기 자체와는 무관하게 다른 종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라면 어땠을까. 삶을 일곱가지 장면으로 요약하라고 했을 때 나라면 무얼 골랐을까.

요즘 부쩍 삶이 너무 힘들고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호소를 자주 듣는다. 구체적인 어려움을 호소하고 해결책을 찾는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문제를 파악하거나 해결하는 일에 관해 이미 희망을 놓아버린 상태다.

어제는 이런 쪽지를 받았다. 별일 없는 하루다. 언제나 그렇듯이 남편과 싸웠다. 나만 찾는 아이가 오늘은 유독 더 힘들다. 오늘 하루 내내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웃어본 적이 없구나. 내 아이는 엄마의 얼굴에서 행복이라는 걸 본 적이 있기는 한 걸까. 벌써 마흔이 다 되어가는데 나는 어른이 맞기는 한 걸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아 봤자 부모님은 걱정을 하실 테고 친구들은 적당히 공감하고 위로할 테다. 그러니 애초 그냥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인생이 완전 망한 것 같다.

오늘 새벽에는 이런 쪽지를 받았다. 올해 스물일곱살인데 스무살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 남들은 좋은 나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가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한다. 철딱서니 없게도 말이다. 아마 스물일곱살밖에 안 되었으니 그 정도 생각밖에 못 하는 모양이다. 시간을 돌리고 싶은 건, 세상에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스무살 때로 돌아가면 뭐 하나라도 열심히 해서 적어도 남들만큼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열등감과 자존감 문제라는 걸 알고 있다. 학벌, 외모, 직업, 집안 무엇 하나 내놓을 게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두가지 질문 모두 나는 대답을 할 수 없다. 나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시간을 돌리는 방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 특히 시간을 돌리는 방법에 관해선 알더라도 돌리고 싶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은 벌어진 대로 잘 껴안고 살아갈 생각을 해야지 그것을 인력으로 애써 돌이킨다고 해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삶을 통해 잘 알고 있다. 맙소사 그걸 이 나이 먹고서야 안다.

액정보호필름을 붙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붙이기 어렵다. 먼지가 들어가고 지문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확 떼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거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망치게 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먼지를 빼고 지문을 지우려다 아예 구겨지고 망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운이 좋은 아이들은 액정보호필름을 새 걸로 다시 사주는 부모가 있다. 그런 부모가 없다고 화를 내거나 아파하지 말아라. 시간 낭비다. 그냥 먼지와 지문을 참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빨리 배우면 된다. 부모가 사준 두번째 기회를 누리는 아이들은 그런 방법을 배울 굴곡이 없다. 언젠가 알게 되겠지만, 나와 내 주변의 결점을 이해하고 인내하는 태도는 반드시 삶에서 빛을 발한다. 그걸 할 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삶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거나 당신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걱정할 것 없으니까 삶을 즐기세요, 어머니는 강합니다, 따위의 해괴한 덕담이나 쉽고 따뜻한 말로 에두를 수도 없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얼마든지 외워서 해답처럼 중얼거릴 수 있는 명제와 구호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쌀로 밥 짓는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없다.

나는 이 두 사람에게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대답 대신에 내가 하고 있던 과제를 나누어 주기로 했다. 앞서 이야기했던, 일곱가지 장면을 찾는 일 말이다. ‘제게는 해답이 없습니다. 다만 제가 얼마 전 생각해낸 걸 같이해봅시다. 내 삶을 대표할 수 있는 일곱가지 장면을 꼽아 보세요. 남에게 보여줄 건 아니고 혼자 하시는 겁니다.’

유물론자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죽음 이후에 뭔가가 더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이제 막 죽은 당신에게 일곱가지 장면으로 삶을 요약해보라는 과제가 주어졌다고 해보자. 일종의 포트폴리오다. 유튜브 섬네일 이미지라고 생각해도 좋다. 대표 이미지를 일곱개 고르는 거다.

내 인생은 그저 하찮고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서 일곱개씩이나 되는 장면을 고를 수가 없다며 낙담하는 사람도 있고,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하고 중요해서 고작 일곱개의 장면으로는 요약하는 게 불가능하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담하는 자도 화를 내는 자도 결국에는 똑같이 겸허한 마음으로 과제를 마치리라 생각한다. 적막한 삶도 소란스러운 삶도 마지막 일곱번째 장면은 똑같이 죽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혼자 죽는다.

막상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는 작업이다. 눈을 감고 여태까지의 삶을 펼쳐본다. 내 삶의 가장 충만한 순간이 떠오른다. 또한 가장 비참한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가장 시끌벅적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가장 고마웠던 순간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가장 억울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내가 들은 가장 기쁜 말들과 가장 아픈 말들이 뒤를 따른다. 마지막까지 남아 잘 지워지지 않는 얼굴과 이름들이 있다. 미련이 남지 않게 잘 눌러서 마저 지우고 고개를 들면, 그렇게 일곱가지 장면을 모두 정한다.

나는 여태 내 삶이 농담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농담 말이다. 백명의 관객 가운데 두명밖에 웃기지 못한 실패한 농담. 그게 내가 생각하는 내 삶이었다. 그런데 일곱가지 장면을 꼽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꽤 입체적이다. 이야기 속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때 적어도 애정을 가지게 되는 종류의 캐릭터 말이다. 일곱가지 장면을 꼽는 일은 내 삶을 이야기로, 나를 캐릭터로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지나가던 행인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과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사실 이 과제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어디까지나 혼자만의 작업이어야 한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선별한 일곱가지 장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과제를 나누어준 다른 두 사람에게도 나와 같은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망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으면 한다. 시간을 돌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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