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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삶을 소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아”

등록 2020-03-05 09:39수정 2020-03-05 20:42

한때 모태 신앙 천주교 신자였던 나
작가 되면서 일부 교회와 마찰 빚기도
이젠 남 평가하는 일 그만둬
청년들과 함께할 일 집중할 터
하지만 최근 벌어진 작은 소란
선의와 선의 결과에 대해 고민하는 계기 돼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나는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개 모태 신앙이라고 한다. 십자가와 묵주와 코란과 염주를 두고 돌잡이를 한 기억은 없다. 누군가 내게 “아가야 너는 불가지론이나 범신론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는 없어. 설마 빌어먹을 유물론자가 될 생각은 아니겠지?”라고 물어본 기억도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종교가 결정된다는 건 아무래도 괴상한 노릇이다.

교리 공부에 꽤 재능을 보였던 것 같다. 성서와 성인들의 삶을 다룬 책들을 어렸을 때부터 읽은 게 도움이 되었다. 갖가지 역병과 질투와 복수, 그리고 대홍수와 같은 리셋버튼으로 가득한 구약보다는 각성과 재생을 다룬 신약 쪽이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영웅 서사시에 고전적 뼈대를 제공한 신약은 그 방면으로는 일종의 레퍼런스와도 같았다. 그 뼈대가 훨씬 더 오래된 다른 고전들로부터 왔다는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성당에 관련한 기억은 모두 좋았다. 여름캠프도 좋았고 내가 흠모했던 단발머리 친구도 좋았다. 시편 외우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좋았고 교리반 별로 신문을 제작했는데 남들이 사순절 주간에 대해 쓰는 동안 나 혼자 5공 청문회에 관해 썼다가 어른들로부터 굉장히 어색한 시선을 받았던 것도 좋았다. 교리 공부하러 지하에 내려갈 때마다 어김없이 코끝을 간지럽히던 장미 향기도 좋았다. 미사 중에 내 손등에서 별안간 딱지가 떨어져 피가 나자 수녀님이 달려와 성흔 아니냐며 흥분했던 기억도 좋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그건 내가 선택한 종교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강요되었던 것이다. 미성년자 딱지를 떼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수염이 훨씬 더 수북하고 성이 네글자인 유대인 마귀가 들어와 예수님을 쫓아내고 말았다. 문제의 붉은 마귀를 불지옥으로 쫓아낸 이후에도 나는 꽤 오랫동안 유물론자로 살았다.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면서도 C.S. 루이스의 변증법에 동의하기보다는 글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됨됨이에 감복하는 식이었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기독교 내 다른 분파를 멸시하는 일부 개신교인이 <순전한 기독교>를 주변에 추천하면서 저자가 영국 성공회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건 해괴한 일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종교들에 관심을 가졌다. 종교들이 보여주는 이야기 속 상징체계에 마음을 빼앗겼다. 기독교의 공의회나 불교의 결집처럼 말씀을 종합하는 역사적 사건에서는 다음 세대를 위해 삶의 지혜를 전승해내고자 하는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별처럼 숱하게 많은 종교 가운데 네 이웃과 공동체를 해하라고 가르치는 말씀은 전무하다는 데 무엇보다 감동했다. 종교는 인간의 선의를 끌어냄으로써 공동체가 선순환하는 데 기여한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니 도대체 이 붉은 마귀를.

하지만 글쓰기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면서 반복해서 일부 거대 교회와 마찰을 빚는 일이 생겼다. 고소 고발을 겪었다. 대부분 기소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애초 사건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정보통신망법에 의거해 웹에 올라간 기사를 블라인드 처리하는 경우는 있었다. 속이 상했다. 당시 내가 글을 쓸 때 가장 많이 인용했던 구절은 “네가 이 큰 건물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리라”는 마가복음 13장 2절까지의 말씀이었다.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거대 교회의 위용에 압도되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제사장과 서기관들의 비리를 간파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뜨겁게 살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건 오래되었고, 실제 그렇게 살게 된 것은 1년 정도 되었다. 병상에서 여러번 생각했다. 뜨거움은 삶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 정작 단 한 번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게 한 번 살아봤으니,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전혀 다르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운이 좋았다.

나는 남을 평가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평가받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영혼을 파괴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일도 그만두었다. 최근 몇년 사이 사안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독자보다 그래서 너는 누구 편이냐고 묻거나 마음대로 단정 짓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더 이상 삶을 소음으로 채우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바꿀 수 있는 작은 걸 떠올려보자는 생각이었다. 이제 나는 다음 책을 비롯한 사사로운 작업들과, 가난한 청년들이 나와 같은 이십대를 보내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만 집중한다. 다른 일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 최근 작은 소란이 있었다.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써 올렸다. ‘공동체에 당장 치명적인 위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의 이름을 팔아 자유만을 고집스레 주장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이시여 이들을 용서하소서. 지역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대규모 예배를 강행하겠다는 교회도 있습니다. 신이시여 그들도 용서하소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이 역병을 물리치고 위기를 극복하는 날, 저들이 자기 기도가 응답을 받은 것이라며 기뻐하지 않게 하소서.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저들에게 염치를, 우리 지역과 국가 나아가 전 세계 공동체에 평화를 주소서.’

일부 개신교 분들께서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마 비꼰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정말 아니었다. 나는 진심이었다. 신천지의 몰염치에 관해선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웃을 사랑하고 내 몸처럼 보살피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고작 주말 예배를 어디에서 하느냐는 문제 때문에 이웃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달가워하실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전염병의 지역사회 전파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록을 감추거나 대규모 예배를 강행하겠다는 이들의 선의에 대해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선의를 이해했기 때문에 신에게 용서를 대신 구한 것이다. 신자가 아니라는 자격을 꾸짖는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내용에 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를 더하고 싶다. 더 큰 선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지에 관해서다.

댄 애리얼리는 근래 가장 바쁜 행동경제학자일 것이다. 다큐든 책이든 그를 자주 보게 된다. 그가 최근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주사위 실험이다. 두개의 주사위를 피실험자에게 제공한다. 그걸 던져서 나온 두개의 숫자를 더한 뒤 혼자만 알고 있으라고 말한다. 실험이 끝난 뒤 피실험자가 말하는 숫자에 맞게 현금을 쥐여준다. 1+1부터 6+6까지 말이다. 물론 피실험자들이 진실을 말했는지 여부를 검증할 방법은 없다.

두번째 실험은 같은 실험을 거짓말 탐지기를 두고 한다. 피실험자가 거짓말을 하면 기계가 반응한다. 단, 조건이 붙는다. 이 실험으로 생기는 모든 수익은 전부 피실험자가 선택한 단체에 본인의 이름으로 기부된다는 내용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먼저 수행한 실험의 평균값에 비해 '운이 좋은' 사람들의 비율이 거의 폭발적으로 급등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6+6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가장 놀라운 점은 이 '운이 좋은' 사람들이 거짓말 탐지기에도 반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선 실험의 결과를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알고 있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때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 나아가 심지어 거짓말이 아니라고 인식한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만이 오직 거짓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선한 마음으로부터 악한 행동이 나올 수 있는가. 그렇다. ‘공동의 선이나 대의’라는 것은 어느 언덕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역사 속 각기 다른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가장 나쁜 일들과 애국 애족의 이름으로 촉발되었던 크고 작은 전쟁은 대개 이런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네 이웃과 공동체를 해롭게 하라 가르치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의를 이해하되, 우리는 그 선의가 이끌 수도 있는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도 늘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말씀을 따르는 삶이란 그렇게 어렵다.

내 주변 사람들은 한두번씩 들어봤을,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떠올리는 말씀이 있다. 사실 나는 바오로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울에서 바울이 되는 격정의 삶은 전향자들이 쉽게 과격한 근본주의자가 되는 과정과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3장 1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 특히 12절의 이야기는 매번 가슴을 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뿌옇게 서리가 낀 것처럼 투명하지 않고 확고한 단 하나의 진실을 기대할 수 없는 삶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내게는 천금과도 같은 약속이었다. 가장 힘들 때마다 저 말은 나를 구했다. 당신이 나처럼 종교가 없든, 혹은 비기독교인이든 관계없이 저 12절의 말씀으로부터 바로 이어지는 문장을 함께 나누면서 이 글을 마치고 싶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입니다.

허지웅(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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