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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애호박이 부른 취기

등록 2020-02-14 11:11수정 2020-02-14 11:15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동리장의 애호박술국. 사진 백문영 제공
동리장의 애호박술국. 사진 백문영 제공

슬슬 봄이 온다지만, 겨울 추위는 여전히 끈질기다. 겨우내 몸에 밴 차가운 공기는 빠질 기미가 없다. 아재 감성의 뜨끈한 국물과 차가운 술이 자꾸 생각난다. 매콤하고 따끈하고 기름진 국물에 찬술을 곁들이면 마성의 행복이 몰려온다. 이 확실한 행복을 찾으러 지하철을 타고 마포역으로 향했다. 마포에서 공덕동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서울의 동서남북에서 밀려 들어오는 수많은 인파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작은 맛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목표는 단 한 가지. 녹진하고 되직한 찌개와 술이었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면서 마포역 3번 출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불교방송>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리장’은 <불교방송> 건물 옆을 쭉 따라 걸어 올라가다 보면 작은 골목이 보이는데, 그곳에 있다. 허름한 시골풍의 열쇠 수리점과 술집 사이에 간신히 끼어 있는 듯한 외관, 그 옛날 여인숙에나 붙어있을 법한 간판까지 들어가기 전부터 제대로 찾아왔다는 느낌이었다.

메뉴도 독특하다. 애호박찌개와 애호박전, 애호박 칼국수를 중심으로 어리굴젓 수육, 차돌말이찜 같은 묵직한 안주류를 함께 판매한다. “애호박찌개라는 음식 이름은 처음 들어본다.” 나의 이런 말에 친구는 “일단 한 숟가락 뜨면 무슨 맛인지 알게 될 것”이라는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애호박찌개, 옛날 분홍색 소시지와 배추쌈이 나오는 ‘애호박찌개 정식’도 좋지만, 그날의 주인공은 술이니 애호박술국을 주문했다. 검지만큼 두툼한 두께로 썬 애호박과 두꺼운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 큼지막한 양파가 듬뿍 든 술국이 등장했다. 한입 떠먹고 나서야 친구가 했던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고추장찌개인 듯, 쌈장찌개인 듯 매콤하고 달곰한 맛, 김치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도 느껴지는 적절한 산미에 오독오독한 애호박의 식감이 더해져 먹으면 먹을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계속 술을 불렀다. 국물 한입과 칼국수 사리 한 젓가락에 술이 저절로 따라붙었다. 비어가는 술병만큼 옆 테이블의 손님이 바뀌는 속도도 빨라졌다. 간단한 식사와 지난한 술자리를 모두 아우르는 포용력은 동리장의 것일까? 한식의 힘일까?

평범한 애호박 하나로도 부침개, 국수, 찌개까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연성과 어떤 술과 반찬에도 무난하게 두루두루 어울리는 포용성이 반갑다. 뜨끈한 찌개를 곁에 두고서 도란도란 취해가는 겨울밤이었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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