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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예의바른데, 차갑다면?

등록 2020-01-31 14:27수정 2020-01-31 14:31

박세회의 사람 참 어려워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영어 기사를 읽는 게 직업이긴 하지만, 영어로 말하기를 할 일은 자주 없어서 을지로에 있는 한 영어학원의 시사 토론 수업에 등록했다. 영어학원 등록은 사춘기 직장인의 시작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았다. 같은 반 수강생의 절반 이상이 회사에 다니고 있는 과장급으로 보였고, 실제 나와 대화를 나눈 4명 중 2명이 실무자였다. 수업은 처음 절반은 공통된 주제로 테이블 별로 의견을 나누고, 다음 절반은 각자가 관심 있는 분야의 기사를 뽑아와 돌아가며 설명하고 토론하는 식이었다. 이번 주 수업의 공통 주제는 ‘따뜻한 사람이 되는 법’이었다. 영국인 선생은 알랭 드 보통이 창립한 ‘인생학교’에서 제작한 한 영상을 보여줬다. 영상은 손님들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고, 최근에 다녀온 여행이 어땠는지를 묻고, 식사할 때면 그레이비 소스가 더 필요한지를 살피고, 최근 문학상을 받은 소설에 대해 논하는 호스트를 보여줬다. 동시에 호스트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도 어쩐지 손님들의 기억에는 남지 않는 ‘차갑고 예의 바른 사람’이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 반대인 ‘따뜻하고 예의 바른 사람’은 레스토랑이 아닌 자기 집에 초대해서 치즈 샌드위치를 대접하고, 화장실 벽을 사이에 두고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사춘기 시절에 듣던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영상을 본 후 일부 수강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보였다. 뒤쪽 테이블에서 누군가 “차갑고 예의 바른 사람이 훨씬 낫지 않아요?”라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내 왼쪽 책상에 있던 한 수강생은 유창한 영어 발음으로 말했다. “일할 때는 따뜻한 것 보다는 차가운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테이블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직장인들이다 보니, 친구 사이보다는 ‘일로 만난 사이’가 먼저 떠올라서다. 영상이 그린 ‘따뜻하고 예의 바른 사람’을 직장에서 만난 관계로 환원해 생각하니 악몽이 따로 없었다. 같은 회사 과장님이 한턱내겠다며 자기 집으로 부르더니 라면을 끓여주고, 화장실에 볼일 보러 갔는데 자꾸 밖에서 말을 건다면? 게다가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영턱스클럽의 ‘정’이나 자자의 ‘버스 안에서’가 들리고 그가 춤을 출 준비를 하고 있다면? 혹시 양준일 신드롬에 편승하셔서 ‘리베카’라도 듣게 하고는 ‘너도 이 노래 좋아하잖아’라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스텝을 밟는다면?

우리는 서툰 영어로 대화를 이어 갔다. 다른 수강생이 “따뜻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있다면 최고겠지만, 대부분은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예의 없는 사람”이라며 “영국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직장에 오히려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말했다. 나는 해당 영상에서 “아플 때면 ‘열은 좀 어떠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을 ‘따뜻한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파서 갑작스레 연차를 냈더니, 굳이 전화를 걸어 “걱정되어서 전화했다”면서도 “목소리가 그리 많이 아픈 것 같지는 않다”고 꼬집던 신입사원 시절의 부장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플 때가 아니면 갑자기 연차를 쓸 수도 없는 시스템과 따뜻함을 가장해서라도 진짜 아픈지를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력관리의 기술 사이에서 진정한 따스함이 파고들 여지가 있는가?

결국 한 수강생이 말했다. “대체 따뜻함이 뭔가요?” 질문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따뜻함이란 뭘까? 문득 나는 따뜻함과 차가움을 대결 구도로 둔 영상의 문제의식에 결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따듯한 사람과 차가운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차갑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서로 시간과 공을 들이다 보면, 마치 부싯돌에서 불꽃이 일어나듯 관계를 이어주는 따스함이 생긴다. 관계가 변하는 순서와 속도는 두 사람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에 따라 정해지기 마련이라서 여간해서는 바꾸기 힘들다. 다른 팀원이 말했다. “굳이 따지자면 뜨거운 사람보다는 차갑고 예의 바른 사람이 나아요.” 그렇다. 적어도 나에겐 격식을 차린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최근에 다녀온 여행과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신작 소설에 대해 예의 바르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직장에서는 더 소중하다. 이미 너무 뜨거운 세상이 아닌가?

박세회(허프포스트 뉴스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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