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지면의 편집디자인을 담당하는 나는 6개월 차 임산부다. 더구나 결혼 5년 만에 첫아이를 가져서 태교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는 ‘예민 끝판왕 예비맘’이다. 어느 정도로 예민하냐면, 호러물은 물론이고 스릴러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가미된 영화는 50인치 이상 스크린에서는 안 본다. 심지어 평소 팬인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도 눈 딱 감고 안 보기로 결정했다. ‘임산부 정서에 좋지 않다’는 한 줄 관람평 때문이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너무 시끄러워서, 4디(D)로 봐야 제맛이라는 <알라딘>은 의자가 흔들리기라도 하면 태아가 놀랄까 봐 관람을 접었다.
그런데 이번 주 ESC 커버스토리 주제가 하필이면 ‘공포 체험’이라니…! 팀장에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얘기를 하자는 거냐”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무참히 외면당한 난 어쩔 수 없이 디자인 작업을 위해 온갖 괴기스러운 공포물 자료를 들여다봐야 했다. 그런데 6개월간 아름답고 예쁜 것만 보려고 노력한 덕분일까? 웬만한 사진과 그림으로는 공포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기사를 근사하게 만드는, 독자를 확 잡아당기는 1면 이미지는 나의 선택과 능력에 달렸다. 나는 ‘프로 직장인’. 과거 연재했던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도 종일 읽었지만, 내 안의 ‘호러갬성’은 6개월간 매초 집중한 ‘태교갬성’에 눌려 살아나지 않았다. 태교의 힘은 실로 강했다.
내 안엔 아름다운 꽃밭밖에 없는데, 무슨 수로 1면을 ‘무섭게, 더 무섭게’ 디자인한단 말인가!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며 퇴근한 그 날 밤.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3시쯤 깨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인기척과 함께 거울에서 등 뒤 문이 스르르 열리는 게 보였다. 얼마나 놀랐는지는 글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짧은 찰나에 ‘조수진의 미제사건 노트’에서 그려진 무참히 살해당한 혼자 사는 여자 얘기와 대수롭지 않게 보고 넘겼던 온갖 무서운 그림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튀어나왔다. 비명을 꽥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소변을 본 뒤가 아니었다면 단언컨대 속옷에 몹쓸 짓을 하고 말았을 거다.
내 비명에 놀란 무언가가 후다닥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고, 자다 깬 남편이 식겁하며 달려왔다. “저기, 저기! 누가 도망갔어!” 밖을 삿대질하며 가리키는 내 손가락을 따라 뒤를 돌아본 남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내뱉었다. “…루피잖아.”
맙소사. 우리 부부가 첫째 아들이라며 사랑으로 키우는 고양이를 임산부 살인미수범으로 둔갑시킬 뻔했다. 늦은 밤 화장실에 가는 엄마가 걱정돼 따라와 지켜주려던 루피는 토라져서 아침에 출근하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공포심 덕분에 이번 지면 작업은 수월하게(?) 끝날 것 같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의문이다. 어쨌든 내 안의 ‘호러갬성’을 깨워준 우리 루피에게 감사하며 오늘 퇴근 후에는 츄르(고양이 간식)라도 하나 까줘야겠다.
글·사진 김은정 기자 ej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