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병상 위였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니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보는 중인지 내가 깨어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엄마.” 내가 부르자 고개를 번쩍 든 엄마는 “어. 그래”하고 답했다.
“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단지 목이 잠긴 것이 아니었다. 윗니와 아랫니의 아귀가 맞지 않아 발음이 샜다. 치아구조가 변형되어 있었다.
“기억 안 나?” 어머니는 물었고, “안나”하고 나는 새는 발음으로 답했다. 어머니는 황당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자전거가 있었다. 낡고 고장 나 누가 버린 것을 아버지가 주워온 것이다. 남이 버린 것을 가져다 쓰는 건 아버지의 취미였다. 어머니는 왜 쓰레기를 주워왔냐고 화를 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녹을 없애고, 기름을 칠하고, 도색까지 한 자전거는 내가 타고 다녔다. 타고 다니기 버겁게 큰 데다 기어가 없고 프레임도 철로 만들어져 언덕을 오를 때면 고생을 했으나, 내려올 때 짜릿함이 좋았다.
그렇게 여름방학 내내 신나게 타고 다니던 어느 날, 자전거를 살펴보다 브레이크 페달과 브레이크를 연결하는 철선이 한 가닥만 남은 채 다 끊어진 것을 발견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씽씽 달리다 그 한 가닥마저 끊어져 버렸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했으니까. 하지만 고칠 방법을 몰랐다. 아버지도 고치지 못할 것 같았다. 이건 천생 자전거포에 가져가 수리를 해야 할 텐데, 주워온 쓰레기에 돈을 쓰는 것은 아까웠다. 나는 니퍼를 가져와 남은 한 가닥 브레이크 선을 끊어버리기로 했다. 이쯤에서 이별하는 게 서로에게 좋겠다 싶었다. 말은 이렇게 담담히 하지만, 당시의 심정은 애마의 목을 치는 김유신과 같았다.
비장하게 브레이크 선을 자른 뒤 자전거는 한구석에 처박아 놓았다. 행여나 누군가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가족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고치면 되는데 저놈은 정말”하고 아버지는 순간 흥분했지만, 그 뒤로 고치지 않은 걸 보면 내 판단이 옳았음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병원에서 깨어난 그 날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서 돌아온 내가 스스로 그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고 했다. “얘. 그거 브레이크 끊어졌다며!” 하고 어머니는 외쳤지만, 이미 나는 사라진 뒤였다. 이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당시 다니던 중학교에 도착했다. 대개의 학교처럼 언덕배기 위에 있는 학교였다. 무거운 자전거를 질질 끌고 언덕 꼭대기 정문까지 도착한 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간다아아!”
내 자전거 브레이크 선이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는 걸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말렸으나, 나는 커다란 자전거 위에 올라타 망설임 없이 페달을 밟았고,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달려서는 그대로 시멘트벽에 격돌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친구는 ‘마치 자살특공대 같았다’고 회상했다.
친구들은 부랴부랴 집에서 우리 부모님을 데려왔다. 출동한 119 요원은 괴상한 각도로 몸을 뒤틀고 기절한 나를 옮기기 전, 부모님에게 “불구가 되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게 이 사건의 전모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을 들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이 되는 게 없었다. 직접 브레이크 선을 끊은 자전거를 타고 나가 사고를 당하다니. 동시에 무서웠다. 죽음이라는 건 이렇게 의식하지 못한 순간 닥칠 수 있구나. 이렇게 죽는 것이구나.
그 뒤로 나는 변했다. 조심스러워진 것은 아니다. 한층 망설임이 없어졌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것이 삶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구나’하고 인생의 브레이크 선마저 끊어버린 셈이다. 결과적으로 운 좋게 죽거나 불구가 되지 않은, 나는 멋대로 산다. 설사 핵전쟁이 일어나도 폐허 속에서 신나게 살아갈 것이다. 멸망한 도시의 잔해 속에서 운이 좋다면 호두과자를 찾아낼 것이다. 그중에 죽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가 죽고, 그 죽음은 눈치채지 못한 채 다가올 수 있으니까. 무섭지 않다. 끝.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