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였다.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들이 도처에서 폭탄처럼 튀어나와 터졌다. 늘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짜증과 신경질도 늘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외유다. 늘 머물던 공간에서 벗어나 잠깐 바람을 쐬고 오는 것만으로도 여유가 생길 것 같았다.
서울은 늘 복잡하고 번잡하다. 모처럼 내는 휴가인데, 시간에 쫓기지 않는 채로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 취중에 부산으로 가는 열차표를 끊었다. 굳이 ‘취중’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 요즘 같은 초고속시대에 고속열차가 아닌 무궁화호를 예매했으니까.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꼬박 5시간30분. “이 정도면 그냥 자동차 타고 가는 것이 낫지 않냐!” 우스갯소리도 스스로 했지만, 낡은 무궁화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성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었다. 세월의 더께가 낀 낡았지만 깨끗한 열차, 느리지만 꾸준히 달리는 무궁화호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정답고 한적한 기찻길은 색달랐다. 쫓기듯 예매한 열차에서 찾은 느린 평화였다.
숙소에 짐을 대충 풀고 향한 곳은 지하철 해운대역 근처의 ‘해성막창집’이다. 부산까지 가서 왜 막창을 먹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고기 맛이야말로 ‘부산 사나이’의 맛이다. 부산으로 갈 때마다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늘 사람이 북적이고, 식사 시간은 물론, 낮에도 밤에도 심지어는 아침에도 줄을 서는 유명한 곳이다. 대기표를 뽑아 들고 40여분이나 기다렸을까? “들어오세요.” 소리가 구원처럼 들렸다. 이곳의 주문 방법은 역시 잘 되는 집답게, 남다르다. 고기만 주문할 때는 기본 3인분 이상, 곱창전골은 2인분 이상 시켜야 한다. 메뉴도 단출하다. 소 막창, 대창, 곱창전골이 전부다. 소 막창 2인분, 대창 2인분, 곱창전골 2인분을 주문하면서도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할 수 있으니까! 다 먹어 치울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모든 메뉴는 1인분에 1만원, 서울의 유명하다는 곱창집에 견주면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가격이다. 쭈글쭈글하고 평평한 막창과 소시지와 같이 통통한 대창을 불판 위에 올리고 20여분간 굴려가며 구웠다. 이곳에서는 무엇이든 셀프다. 내가 굽고, 내가 썰고, 내가 맛있게 먹으면 된다. 막창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르고, 대창도 살며시 썰었다. 함께 나온 양파 양념장에 대창을 찍어 한입 먹으면, 기름의 맛, 그 위대한 죄책감의 맛이 몰려든다. 아삭하고 서걱서걱한 막창을 먹고 대창을 먹다가 조금 느끼해진다 싶으면 곱창전골 국물을 떠먹으면 된다. 맵고 칼칼하고 마늘이 가득 든 곱창전골은 기름기가 지글지글한 데도 연신 퍼먹게 된다. 우동 사리도 건져 먹고 고기도 골고루 건져 먹다 보면 “2인분 추가”, “3인분 추가”라는 말이 이어진다. 얼굴은 열기로 점점 번들거리고 입가는 기름이 잔뜩 묻었는데도 계속 소주를 마시고 고기를 집어 먹고 국물을 떠먹다 보니 어느새 만취 상태가 된다.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쓰는 것만큼이나 사치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골라 먹기에도 짧은 시간이다. 부산에서도, 서울에서도 결국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곱창을 씹으며 생각했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