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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육체노동의 고단함도…노포의 보쌈 한 점에 ‘훌훌’

등록 2019-03-21 09:30수정 2019-03-21 20:10

백문영의 먹고 마시고 사랑하기
장수 보쌈 입구. 사진 백문영 제공
장수 보쌈 입구. 사진 백문영 제공
밥을 먹으면서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을 좋아한다. 술만 마시자면 어쩐지 속이 공허하고, 밥만 먹기에는 늘 뭔가 아쉽다. “매일 술 마시느냐”는 가족의 책망을 피하고 싶을 때도 반주만 한 것이 없다. 모처럼 쉬는 날이었다. 날씨는 무척 좋았다. 지하철 종로5가역에서 을지로4가역까지 걸었다. 햇볕은 유난히 따뜻했다. 마음은 한껏 들떴다.

허름한 식당을 좋아하기 시작한 때는 언제일까? 낡은 건물 사이에 숨은 듯 있는 옛날 스타일 식당의 간판을 보면 이상하게 군침이 돈다. 중구 방산시장 근처 철물점과 만물상 옆에 있는 ‘장수 보쌈’은 간판부터 남다르다. 위풍당당하다. 미닫이문에는 ‘원 보쌈’이라는 또 다른 상호가 적혀 있다. “지금은 유명한 프랜차이즈 보쌈 배달 집이 된 그 보쌈집에서 일하던 이가 30여년 전에 차린 곳”이라고 함께 간 친구가 설명했다.

보쌈 김치. 사진 백문영 제공
보쌈 김치. 사진 백문영 제공
들어가면 낡았지만 깨끗하게 정리된 실내와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인다. 해 밝은 점심이니까, 낮 메뉴인 ‘보쌈 백반’과 반주로 소주를 주문했다. 갓 지은 희고 고슬고슬한 쌀밥, 김치, 무말랭이, 젓갈과 슴슴하게 끓여 낸 배추된장국이 먼저 나왔다. ‘고기는 구색 맞추기로 조금 나오는 백반이 아닐까’ 하고 우려했던 마음은 보쌈을 받아보고 민망했다. 보쌈 고기의 영원한 친구인 보쌈김치는 배추 한 포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푸짐했다. 뭉텅뭉텅 썰어낸 고기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노포(오래된 가게) 식당의 저력은 무시할 수 없다. 빨간 김치에 큼지막하게 썬 보쌈 고기를 돌돌 만 뒤 생마늘과 매운 고추를 얹어 먹었다. 달콤하고 짜고 아삭한 김치 맛이 느껴질 무렵 기름지면서 부드러운 고기 맛이 추가됐다.

보쌈 고기. 사진 백문영 제공
보쌈 고기. 사진 백문영 제공
책상에 앉아 글만 썼을 때는 ‘많이 먹어야 많이 움직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몰랐다. 요즘 준비도 없이 술집을 차려 육체노동의 세계로 뛰어든 이후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먹고 또 먹어도 배가 고팠다. 살이 쭉쭉 빠졌다. 이렇게 바닥을 알 수 없는 허기를 느낄 때 언제라도 달려갈 수 있는 ‘백반 맛집’, ‘소주 맛집’, ‘반주 맛집’이 장수보쌈이다. 늘 반갑고 고맙다. 입안이 터지도록 고기와 김치 조각을 먹고 단 소주를 목 뒤로 넘겼다.

백문영(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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