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찌민에 갔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해가 빨리 뜨기 때문일까? 하루도 일찍 시작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걷다 보니 벌써 문을 연 카페에서 사람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한쪽에 앉아 ‘까페스어다’를 시켰다. 진하게 탄 커피 믹스에 얼음을 가득 부은 맛이었다. 가격은 한 잔에 2만동으로 한국 돈으로 1000원이었다. 쌌다. 커피뿐 아니라 대개의 것들이 쌌다. 관광객 입장에서야 좋지만 이해 불가능한 저렴함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베트남 급여 노동자는 한국 돈 기준 월평균 30만원 정도를 받았다. 300만원정도인 한국의 10분의 1인 셈이다. 지금 마시는 커피가 베트남 사람들에겐 1만원짜리인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싸지만 싼 게 아니었다. 그 이유가 뭘까 싶어 좀 더 알아봤다. 베트남의 총인구 약 9500만명 중 20살 미만이 약 50%인 4700만명 정도였다. 우리나라는 약 17%인 880만명으로 4배 이상 차이가 났다. 사람이 많아 사람값이 싼 것일까. 그래서인지 베트남 산업에 외국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저렴한 인건비의 베트남 사람들을 생산직으로 고용하는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고학력 베트남인들은 갈 곳이 애매해지지 않을까. 대학을 나와도 생산직이 될 것이라면 굳이 그래야 할 필요를 못 느끼지 않을까 싶고, 베트남 자생산업 기반도 연약해질 것이다. 만약 오르는 물가와 최저임금 때문에 머지않은 미래에 저렴한 인건비라는 매력을 잃은 외국 자본이 인건비가 더 저렴한 나라를 찾아 떠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이 고민은 베트남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겠지만, 커피를 마시는 내내 그런 근심이 마음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깜언.(감사합니다)”
계산하고 돌아오는 길. 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매연 때문일까? 저마다 마스크를 쓰고 있었고, 단속하는 것인지 모두가 헬멧을 쓴 채였다. 혼잡하기 그지없는 도로 위를 사람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부지런히 달렸다.
그때, 길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주스를 파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출근길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마실 음료를 사 가는 것을 종종 보았다. 하지만 할머니가 파는 주스는 인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료가 실린 아이스박스를 실은 오토바이를 대놓고 이런저런 과자와 함께 음료를 파는 다른 상인에 비해 할머니의 자전거는 너무나 볼품없었다. 노란 플라스틱 바구니 안엔 뭔지 모를 과일즙이 담긴 페트병과 컵, 설탕과 얼음뿐. 게다가 자전거 옆 길바닥엔 손녀 같아 보이는 아이가 잠옷을 입은 채 바닥에 앉아 인형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풍경이었고, 그게 내 발길을 잡았다.
주문은 어려웠다. 할머니는 영어를, 나는 베트남어를 못했으며 메뉴판은 당연히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뭔지 알 수 없는 음료를 하나 시키자 할머니는 싱글벙글 웃으며 만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아이를 보았다. 아이도 나를 보았다. 오늘만 특별히 따라 나온 것인지,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흙먼지를 뒤집어써 시커메진 인형이 그간의 시간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주스를 다 만든 할머니는 컵에 빨대를 꽂아 내게 내밀었다. 얼마냐 물으니 할머니는 지갑을 뒤져 5000동짜리 지폐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국 돈으로 250원이었다. 나는 5만동을 꺼내 주었다. 할머니는 지갑을 뒤지며 잔돈을 꺼내었으나, 나는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할머니가 뭐라 뭐라 말하는 것이 들렸지만, 나는 뒤돌아보고 못 알아들은 척했다. 실제로 못 알아들었고. 그동안 아이는 인형을 안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엔 고층빌딩 건설 현장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저 빌딩들이 다 만들어지는 때에 그 아이가 맞이할 미래는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며 주스를 마셨다. 말도 못 하게 시고 달았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