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저트에 대한 글을 씁니다”라고 말하니 “그건 애들이나 먹는 거잖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회의를 끝낸 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참이었다. 나는 물었다. “그럼 디저트를 안 드세요?” 상대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다 큰 어른이 디저트는 무슨 디저트.”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그에게 디저트란 아마도 덜 자랐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자연히 디저트에 대한 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문득 엄기호 작가의 <단속사회>라는 책이 떠올랐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끊임없이 서로를 검열해 편을 가르는 것으로 단속하며, 그 결과 ‘곁’이 사라져 ‘편’만이 남아 관계는 분절되어 연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별 연관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나는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우겨넣기만 했었던 것들을 새삼 이해할 수 있었다.
정보화 시대다. 모잠비크 공화국의 주요 수출품이 다이아몬드이며, 최근 전 지구적 소비량 급감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변기에 앉아 똥을 싸는 동안에도 손쉽게 알아낼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문화, 다른 사회, 다른 사람과 연결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무엇과 연결될지를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다. 누군가는 이전까지 몰랐던 것들과 연결될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 연결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좋아하고, 비슷하며, 그래서 익숙한 것들과만 연결할 수도 있다. 몰랐던 것, 나와 다른 것을 접한 사람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을 좁히고 차이를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점점 넓어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동류의 것만을 분류해 선택하는 사람의 세계는 확장되지 못한 채 나날이 고립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무지를 인정하며 차이와 다름을 받아들이기 위한 고통이 수반되기에 괴롭다. 반면 후자는 끊임없이 ‘내가 옳았다’는 것을 반복하여 확인할 수 있으니 더없이 안락할 것이다.
나는 후자였다. 푸딩은 물론 온갖 디저트란 디저트는 모두 좋아하는-그래서 디저트에 대한 칼럼을 1년이 넘게 쓰고 있는-나는, 디저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더 이상의 관계를 단념해 버렸으니. 순서로 따지자면 그가 먼저였겠지만 ‘디저트를 먹는 사람을 무시하는 걸 보니 인간이 덜 됐군’하며 나 역시 입을 닫아버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됐다. 차이를 인정한답시고 “그렇군요”하며 침묵을 선택해 버리는 것은 결국 그도 나도 서로의 세계에 고립시키고 마는 꼴이니까.
“푸딩을 한번 먹어 봤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는 ‘푸우디잉?’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에 만화로만 봐서 너무 먹고 싶었었는데,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 먹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만화로 본 것과 똑같은 모양의 푸딩을 편의점에서 발견해 바로 샀습니다.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푸딩 생각 뿐이었지요. 어떤 맛일까? 먹고 나면 나도 만화 주인공처럼 행복한 표정을 지을까? 정말 그렇다면, 남은 기간 내내 푸딩을 먹어야지, 하면서요. 기대에 부푼 채 숙소에 도착해 헐레벌떡 푸딩을 꺼내 포장지를 열어 드디어 한입 떼서 물었는데, 조금 실망했습니다. 상상만큼 부드럽지 않고, 상상보다 달았습니다. 결국 반도 먹지 못하고 남겼습니다. 그때 저도 생각했습니다. ‘이런 건 애들이나 먹는거겠군’”
그는 ‘그럼 그렇지’라는 얼굴로 “그렇다니까요”하고 답했다.
“하지만 그 뒤로도 꾸준히 푸딩을 먹어보고 있습니다. 세상엔 정말로 다양한 푸딩이 많으니 언젠가는 마음에 쏙 드는 푸딩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느닷없는 푸딩에 대한 나의 고백을 들은 그는 웃으며 말했다.
“푸딩 탐험가시네.”
모두가 나의 편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내 곁에 둘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디저트 역시 마찬가지. 모두가 디저트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디저트를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 걸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른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