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몇 살 때, 헝가리의 한 민박집에서 청소와 설거지를 하며 머문 적이 있었다. 그곳엔 나 말고도 아침 식사를 만들어 주러 오는 엘리자베스라는 50대의 아주머니가 있었는데(‘보통의 디저트’ 3화에 등장하는 그녀다) 매우 뚱뚱해 마시던 맥주캔을 큰 가슴 위에 올려놓고 껄껄 웃으며 내게 욕을 하던 모습이 내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아침마다 “아민데닛! 데 부타바이!(야 이 바보 멍청아!)”하고 소리를 질러 나를 깨웠다. 그제야 일어난 내가 부엌으로 가 그녀의 뺨에 뽀뽀한 뒤 설거지를 시작하면, 그녀는 뺨에 묻은 침을 닦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연신 욕을 해댔다.
설거지가 끝나고 한가로워지면 우리는 청소를 했다. 청소하는 동안엔 언제나 라디오를 큰 소리로 틀어놓았다. 노래는 대부분 팝송이라 휘파람으로만 따라 불렀다. 그녀도, 나도 영어를 못하지만 휘파람은 잘 불었다.
청소가 끝나면 그녀는 내게 돈을 주며 근처 술가게에서 맥주 4캔을 사오게 했다. 하나는 그녀가, 하나는 내가 마시고 나머지는 냉장고에 넣었다. “두 개는 집에서 마실 거야”라고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따뜻한 햇볕이 비추는 부엌 식탁에 마주 앉아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나눠 피우며 내내 휘파람을 불었다.
반쯤 취하면 신기하게도 평소보다 말이 잘 통했다. 그녀에겐 나보다 나이가 많은 아들과 딸, 그리고 매일 술을 먹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이 있었다. 가끔 그녀는 울었다. “우리 남편, 미쳤어. 애들한테 신경도 안 쓰고 매일 술 먹어. 바람도 피우고.” 맥주캔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그녀는 훌쩍였다.
그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시 또 휘파람을 불고, 점심을 만들어 사이좋게 나눠 먹고 나면 엘리자베스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캔 두 개를 달랑달랑 들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내가 벌게진 얼굴을 한 채 창가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녀는 뒤를 돌아본 뒤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또 뭐라 뭐라 소리를 쳤다. 아마도 욕이었겠지.
시간이 흘러 헝가리를 떠나는 날. 민박집 주인과 인사를 하고, 엘리자베스를 기다렸으나 출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데 버스 시간이 다가와 아쉬운 마음으로 짐을 들고 민박집을 나와 걸어가는데, 멀리서 엘리자베스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싶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는 큰 소리로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하지만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내가 가까이 달려가며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쳐도 그녀는 앞을 바라본 채 걷기만 했다. 심지어 걸음이 더 빨라졌다.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나는 바로 앞까지 다가가 다시 큰 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자베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나를 부둥켜안으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다. 먼 이국에서 50대의 유부녀에게 안김을 당할 줄이야. 그녀는 내 티셔츠 앞섶을 흠뻑 적실 정도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었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쥔 채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제디, 제디(나의 헝가리 이름).”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왜 그래 엘리자베스? 난 다시 돌아올 거야. 울지 마”라고 내가 말하자 그녀는 “꼭 다시 와야 해. 행복하고 건강해야 해”라는 말을 반복했다. 다른 말도 했지만 나의 어쭙잖은 헝가리어 실력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 건강해야 해. 난 돌아올 거야”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엘리자베스도 행복해야 해”라고.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난 맥주를 마실 때면, 언제나 그 따뜻했던 부엌과 휘파람과 엘리자베스를 떠올린다. 그녀는 이미 할머니가 되었겠지. 돌아간다는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부디 행복하게 살고 있길 바랄 뿐이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